세 번 이상의 퇴고를 거칠 것
편집장이 되고 난 후, 편집실 칼럼을 써야한다는 생각을 했을 때 두가지 원칙을 세웠었다. 첫 번째가 편집실에서 벌어지는 일을 넣을 것. 두 번째는, 서울대에서 벌이지고 있는 일들을 주제로 잡을 것. 그러나 이제는 한가지를 더 첨가해야 할 것 같다… 어제(2001.10.6)까지의 ‘이훤씨의 성폭력 진위논쟁’을 바라보다 처음 이훤씨의 대자보가 붙었을 때.. 아니 좀 더 솔직히 말해서 그 일이 일파만파(一波萬波) 번져 무언가 내 사고의 틀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감지 했을 때, 문득 ‘차분’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나서, ‘서울대저널’에서는 그 일에 대해 되도록 신중하라는 이야기를 회의 때 기자들에게 했다. 일단 조급하게 나설 일이 아니라는 판단도 있었지만, 그 일을 거의 전적으로 주관했던 SNUnow 구성원들에게 (언젠가, 작년 대학신문 편집장이었던 신호철씨가 『서울대저널』에게 “OK”싸인을 보내듯) 나는 전적의 신뢰를 보냈기 때문이다. 지난 4월, 한 후배와 “논쟁”에 관해 논쟁을 하다 녀석이 나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로마인 이야기에 보면 ‘카토’라는 인물이 나온다. 포에니 전쟁때 한니발이 로마를 쳐들어와 로마 최대의 위기가 온 적이 있다. 처음으로 기병을 사용한 전법으로 로마를 쑥대밭으로 만든 한니발을 물리친 건, 스피키오라는 장군이다. 그 동안의 관습들을 많이 깨뜨리며 결국 한니발을 물리치고 돌아온 스피키오에게 카토는 법정 소송을 건다. 그 사람이 행한 것 중 잘못된 것들만 찾아내고 나름대로의 완벽함을 자아낸 것이다.” 차라리 ‘스피키오’가 되라. 평생을 그렇게 완벽이라는 이름하에 아무 것도 행한 것 없이 남의 잘못만을 파해치는 바보 같은 짓은 하지 마라. 이러한 이야기를 거드는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익명을 보장 받아 남의 잘못만을 가르켜 질타를 하는, 믿지 못할 일부 네티즌 때문이다. 물론 누구든 웹진을 하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기본 바탕에 그런 “네티즌”쯤을 무시하고 넘어가겠지만, 힘이 빠지는 것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일이므로. 익명은 아무리 내용이 옳더라도, “당신은 왜 떳떳하지 못합니까?”라는 도덕적인 물음을 피할 수 없는 노릇이다. 누구든 사건에 대한 명쾌한 대답을 원한다 지금까지 진행된 상황에서 명쾌한 대답을 얻지 못할만한 글이라면, 그 글은 이미 죽은 글이다. 상대방의 도덕성만 물고 늘어지는 그런 글은 결코 명쾌하지도 못할 뿐더러, 오히려 도덕성의 역습을 당하기 쉽다. “피리춘추”라는 말이 있다. 말로 잘잘못을 가리지 아니하는 사람도 마음 속으로는 셈속과 분별이 있다는 뜻이다. 결국, 이런 식의 글이 없어도 사람들은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가끔 어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을 믿으려 하기 때문에 이렇게 덧붙인다. 이제부터의 핵심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누구도 이번 사건에서 명쾌한 대답을 줄 수 없다면, 더 이상의 논쟁은 멈추어져야 한다. 그리고 소모적인 대자보 논쟁은 이제 그만하고, 당사자들은 직접 만나야 함이 수순이라 하겠다. 또한, 성폭력 상담소의 조사위원회는 스스로 그들의 권위를 회복해야 한다.(적어도 작금의 한국사회에서 그들이 사라진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혹자는 “이번 논쟁에서의 가장 큰 피해자는 여성A이다. 그 사람의 심경을 생각하면 착찹하기 그지없다”라고 말한다. 충분히 인정한다. 그 분에게는 말할 수 없는 더한 고통이 있을 것이란 이야기 되겠다. 그러나, 무릇 행동이 없는 사고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 예컨대, WTC 테러에서 죽은 수많은 영혼들에게 관해 명복을 비는 것은 한시대를 살고 있는 인간으로서 당연한 일이 되겠다. 그러나 우리의 사고와 행동은 그 곳에서 멈출 수는 없는 일이다. 마지막으로… 자칫하면 소모전이 됐을 수도 있을 이번 논쟁에 한줌(?)의 성과를 안겨다 준 사람들에게 일단 박수를 보내고 싶다. 필자 스스로도 아직까지 명쾌한 대답을 그 누구에게도 듣지 못했지만, 대자보의 허술한 논쟁 양태의 관습을 깬건 아무튼 SNUnow 사람들이다. 난 SNUnow를 지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