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 시간이 다 되도록 약속 장소에는 아무도 없다. 10분쯤 지나서야 저 멀리서 한 사람이 걸어오고 있고, 맞은 편에서 다른 사람이 천천히 걸어오고 있다. 약속 장소에 비슷하게 도착한 이 사람들. 서로 마주보며 어색하게 씨익 웃으며 말한다. ‘역시, 관악타임이군.’ 약속 시간에 조금(?) 늦는 관악인들의 시간 관념을 뜻하는 ‘관악타임’은 우리 학우들에게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어 가고 있다. 표를 보면, 관악타임이 집회나 과모임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동아리 차원의 공식적 행사가 늦어지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개인간의 약속까지 생각한다면, 관악타임의 규모는 엄청나리라고 짐작된다. 새내기여, 관악타임에 적응하라! 하지만 ‘관악’타임이라 불리는 것처럼 관악타임은 우리 학교 내의 국지적인 것이다. 그래서 외부인은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특히 새로이 관악에 들어온 새내기들은 모를 수밖에 없다. 신입생 환영회 때, 새내기들은 지방에서 꼭두새벽에 올라오는 반면 재학생들은 약속 시간에 한 두시간 늦는 것은 예사이다. 그래서 환영회 행사는 계속 밀리게 되고, 준비한 행사도 제대로 못하고 밤 늦게 겨우 뒤풀이 장소로 옮기곤 한다. 이 때까지만 해도 조금은 어리버리한 새내기들. 하지만 새터에서 뼈져리게 느끼게 된다. 출발 시간이 되어도 출발할 생각을 하지 않고, 힘들게 도착해서도 지연되는 행사들. 대학 생활의 첫 출발을 좋지 않은 기억으로 남게 할 수 있다. 개강을 하면 다양한 과 행사, 점심 모임, 개강 파티 등에서 관악타임을 계속해서 경험하게 되고, 이제는 새내기가 서서히 늦게 나타나기 시작한다. 때로는 ‘대학 생활 적응 잘 했구나’라는 칭찬 아닌 칭찬을 듣게 되는 경우도 있다. 대다수의 학우들 문제점 느껴 그렇다면 학우들은 관악타임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지난 9월 ‘서울대저널’에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관악에서 생활할 때 문제점 중 가장 으뜸으로 꼽은 것이 250명 중 70명이 선택한 ‘관악타임’이었다.(표 참조) 관악타임의 체감 정도에 대해서는 60%의 학우가 심하다고 대답했으며, 이 중 18%는 매우 심하다고 응답하였다. 즉, 관악타임이 학교 생활에서 많이 일어나고 문제점으로 받아들여짐을 보여주고 있다. 관악타임을 주로 경험하는 경우는 과 모임, 집회, 개인약속 순으로 조사되었다. 주로 학내 약속에서 관악타임이 많은 것으로 드러나 관악타임이 ‘관악’에서 형성되고, 널리 퍼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관악타임이 생기는 이유에 대해서는 절반 정도의 학우가 ‘내가 지켜도 다른 사람이 지키지 않아서’라고 답하여, 관악타임의 악순환이 반복됨을 보여주었다. 바쁜 일상 때문이라고 답변한 비율은 10%를 넘지 못해서 관악타임이 불가피하다기 보다는 습관의 문제라는 인식이 강했다. 학내 현실이 이렇듯 관악타임이 팽배한 분위기이지만 많은 학우가 ‘약속 시간 엄수는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즉, 관악타임은 분명 좋지 않은 습관임을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관악타임은 도대체 왜? 관악타임은 분명 관악산으로 캠퍼스를 옮기고 나서 생긴 말일 것이다. 하지만 그 전부터 관악타임의 행태는 있어왔다. 그리고 관악타임이라는 용어가 생긴 것은 80년대로 추정되고 있다. 발생 이유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설문조사에서처럼 학내 전반적인 분위기가 관악타임을 당연시 여기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관악타임이라는 이름이 붙었을 만큼 우리 학내에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약속 시간이 늦어질 때, 문제제기를 하기보다는 ‘관악타임이잖아’, ‘원래 다 그렇지, 뭐’, ‘좀 늦게 가면 되겠군’ 이라고 생각해버리기 일쑤다. 이것은 계속 악순환이 되어 ‘남이 늦으니 나도 일찍 가서 손해보고 싶지 않다’ 는 생각으로 굳혀진다. 가히 ‘죄수의 딜레마’와 같은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표2 참조) 상대편이 확실하게 약속을 지킬 것이라면 상황이 달라진다. 자신에게 직접적인 타격이 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약속을 지키는 경향이 훨씬 높아진다. 시험 시간에는 관악타임이 거의 존재하지 않으며, 기차 시간 등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전반적인 풍조 때문에 이러한 경우에 늦는 사람도 없지는 않다. 그렇다면 관악타임은 우리 학우들이 모두가 이렇게 영악해서 생기는 것일까? 생활 습관에서도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생활 습관에 맞는 합리적인 시간에 약속을 하지 않는 경우가 문제가 된다. 아침 시간에 약속을 잡을 경우나 과외 시간 등 개인 스케줄을 생각하지 않고 약속을 잡은 경우에는 관악타임이 일어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약속 잡을 때, 시간 배분을 전혀 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약속이 여러 개가 있을 경우 그 사이에 여유를 전혀 두지 않거나 시간을 겹치게 잡아버리는 때가 있다. 물론 약속이 불가피하게 겹쳐서 늦는 경우도 있겠지만, 이 때는 미리 연락을 취한다거나 사회적 중요성에 따라 선택을 하여 피해를 최소화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하지만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약속을 구속되는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 자세에 있다. 약속은 자신의 자유, 권리를 희생해서 다른 사람의 자유를 제한하는 행위이다. 그만큼 책임감을 가질 필요가 있다. 즉, 약속은 ‘당위’인 것이다. 관악타임, 신뢰의 문제 관악타임은 그 약속에 얽힌 사람이 많을수록 더 큰 피해를 가져오게 된다. 개인적인 약속은 당사자간의 문제이므로 약속 시간에 늦더라도 그 영향이 작고 당사자간에 ‘보복과 보상’이 이루어질 수 있지만, 다수 학우들과의 약속일 때는 사정이 달라진다. 개인적인 약속에서 늦게되면 직접적인 신뢰도 하락을 가져오지만 다수가 모이는 집회의 경우 익명성을 갖게 되면서 늦게 와도 직접적인 타격을 입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일찍 와서 기다릴 바에 늦게 오는 것이 이득이 된다. 한 법대 학우는 ‘초기에는 과 모임에 일찍 나오던 사람들도 늦을 때 불이익이 없는 것을 알고는 다들 늦게 나오곤 한다’고 말한다. 또한 학내에서 집회 같은 대형 행사는 학생회 등 소위 운동권의 행사와 관련이 많다. 그리고 앞에서 표를 봤듯이 집회가 늦어지는 빈도가 상당히 높다. 이것이 집회에 참여하는 학우들에게 불신을 가져오고 참여율을 저조하게 만든다. 한 공대 학우는 ‘수업을 안 들어가면서 집회에 참가하고자 했는데, 수업 들어간 친구가 나올 때까지 집회가 시작되지 않을 때도 있었다’며 관악타임이 학생회 행사 전반에 대해 불신감을 주지 않을까 우려했다. 이에 대해 총학생회 관계자는 ‘집회가 늦어지는 것은 사람이 제 때 모이지 않을 때가 대부분이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은 잘 늦지 않는다’고 해명하였다. 그렇지만 잦은 행사 지연이 역량의 약화를 가져오는 것은 분명한 만큼 책임있는 자세가 필요할 것이다. 한편, 우리 학우 사이에서의 약속이라면 완전히 관악타임이 일상화되어도 문제가 생기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외부인의 시각에서는 관악타임을 잘 모르기 때문에 외부인이 손해를 보는 경우가 자주 발생한다. 새터 출발과정에서 2시간 이상 기다린 한 버스기사는 ‘학생들과의 약속시간은 믿지 못하겠다’며 답답해 하였다. 그리고 사회에 진출한 한 선배는 ‘관악타임은 학교 안에서만 통할 뿐, 사회 생활에서 시간을 안 지키는 사람은 신뢰할 수 없다’며 칼타임을 강조하였다. 관악타임이 외부인의 우리 학교에 대한 인식을 나쁘게 하는 요인이 되고 ,자신의 경쟁력을 갉아 먹을 수 있는 것이다. 관악타임을 없애기 위한 노력들관악 학우들은 거의 모든 행사에서 관악타임이 존재하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를 줄이고자 나름대로의 묘안을 짜 내왔다. 제발 늦지 말라고 호소를 하거나 약속 시간이 2시라면 1시에 모이라고 연락을 돌리는 것은 고전적 수법에 속한다. 하지만 이러한 방법은 한 두 번 효용을 보지만 곧 예전 상황으로 돌아간다. 그런대로 효과를 보는 방법이 늦게 오는 사람이나 단위에게 직접적인 불이익을 주는 것이다. 선거 유세 시간이 매번 지연되는 것을 막기 위해, 늦게 오는 후보에 대해서 늦게 오는 만큼 연설 시간을 줄이겠다고 했더니 아무도 늦지 않았다는 일화가 대표적이다. 그리고 모 단대 새터에서는 시간을 지키지 않는 과에 배당된 술을 줄임으로써, 상당한 효과를 보았다고 한다. 한편, 학내 인터넷 언론 SNUnow.com에서 시도했던 총운영위원회 출석부 작성은 ‘공개 망신’형이라 할 수 있다. SNUnow에서는 지난 12월부터 3월까지 총운위 속기록을 근거로 ‘불참자 명단 공개’를 시도한 바 있다. SNUnow측은 ‘관악 타임이 회의나 모임 시작 시간을 늦춤으로써 회의 내용이 부실해질 우려가 있다’며 기획 의도를 밝혔다. 앞으로는 공정성을 위하여 총운영위원회 불참, 지각자의 해명까지도 조사하겠다는 입장이다. 새로운 관악타임을 위하여 지금까지 관악타임을 학생들 사이의 문제로 보았다. 하지만 교수들도 시간 약속에 철저한 것만은 아니다. 일부 교수는 상습적으로 수업에 늦어서 많은 학생들을 기다리게 하는 경우도 많고, 공고 없이 휴강을 해 버리는 교수도 비일비재하다. 설문 조사에서도 이에 대해 불만이 많이 표출되었다. 이 역시 충분히 문제가 되는 사안이며 고쳐나가야 할 것이다. 게다가 이는 도덕의 문제를 넘어서 수업료와 관련된 문제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대학생들이 크게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널럴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고등학교에 비해 수업 부담이 다소 줄고, 그만큼 자신의 책임 하에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된다. 하지만 ‘연세타임’, ‘안암타임’ 이라는 말은 들리지 않는다. 문제 제기가 있다하더라도 ‘코리안 타임’의 연장선상에서 생각할 뿐이다. 그리고 ‘코리안 타임’도 88올림픽 등을 거치면서 워낙 질타를 받아서 지금은 예전같이 심각한 정도는 아니다. 우리만 지키는 관악타임. 이제 새로운 관악타임을 형성해 볼 때가 아닐까? 약속 시간에 먼저 나가서 늦게 오는 사람을 갈구는 재미를 느껴보는 것을 생각하며 조금만 서두르자. 그리고 기다리면서 할 수 있는 꺼리를 준비해 나가서 먼저 기다려보자. 그가 약속 시간에 등장하지 않더라도 실망하지 말고, 이렇게 외쳐보는 건 어떨까? 인 샬라! (신의 뜻대로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