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60년, 한일의 진정한 해방을 위하여

최근 한일관계가 심상치 않다.지난 2월 일본 시네마현의 ‘다케시마의 날’ 제정에 뒤이어 4월 일본 역사왜곡 교과서의 검정 통과 결과가 발표된 것이다.한국 여론은 일본에 대한 비난과 분노로 들끓었고, 한국 정부는 유례없이 강경한 대응책을 들고 나왔다.

최근 한일관계가 심상치 않다. 지난 2월 일본 시네마현의 ‘다케시마의 날’ 제정에 뒤이어 4월 일본 역사왜곡 교과서의 검정 통과 결과가 발표된 것이다. 한국 여론은 일본에 대한 비난과 분노로 들끓었고, 한국 정부는 유례없이 강경한 대응책을 들고 나왔다. 광복 이후, 적절한 문제의식에 의해 철저하게 정리되고 합의되어 끝냈어야 했던 문제들이 지금까지 그런 기회를 가지지 못한 채, 세기가 바뀐 지금에 와서도 ‘현재의 문제’로 남아 분란과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서울대저널 해방60년 연중기획, 이번 호 주제는 한일관계다. 다양한 분야로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존재하는 한일관계 중 이번 기사에서 주로 초점을 맞출 것은, 현 사태의 역사적ㆍ구조적 원인을 직접적으로 짚어볼 수 있는 한일의 역사적 상황과 양국 정치 교류ㆍ관계 영역- 특히 과거사 청산 문제를 중심으로 – 이 될 것이다. 전후처리의 미완, 일본과 연합국의 합작 지금으로부터 60년 전인 1945년, 일본에게는 2차 세계대전 패전의 해이자 한국에게는 광복의 해, 한반도가 지금과는 다른 열기로 휩싸였던 그 때로 돌아가 보자. 이 때 해결이 되었어야 할 많은 문제들은 왜 60년이 흐른 뒤에도 논쟁의 싹으로 남아있는 것일까. 패전 이후 6년간 일본을 점령했던 연합국과 일본 당국에 그 원인이 있다. 전쟁 이듬해인 1946년, 연합국 총사령부는 일본 전쟁범죄인 책임 추궁과 처벌을 위한 극동국제군사재판(동경전범재판)을 연다. 그러나 이 재판에 기소된 전범들의 주된 죄상은 대미 개전이었고 여기에 조선 식민지지배에 대한 책임추궁은 완전히 배제된다. 식민지 종주국을 포함한 연합국 11개국으로 구성된 동경제국의 검찰진은 식민지배 그 자체의 시비론으로 발전할지 모르는 일본의 조선지배 문제를 의도적으로 배제시켰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전반적으로 이 재판은 전범들에 있어 관대하게 이루어졌는데, 이는 동서 냉전이 본격화 되어가는 세계정세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미국과 소련과의 대립이 첨예화되자, 미국은 일본을 아시아 공산주의에 대한 방벽으로 간주해 일본 반공세력의 온존 및 육성에 힘을 기울이는 방향으로 대일점령정책 방향을 급선회한다. 이로 인해 일본은 전쟁 패자, 가해자의 입장이 아닌 냉전의 대미협조자라는 유리한 입장에서 전후처리에 임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일본 사회에서는 군국주의적 전쟁지도를 수행했던 전전의 엘리트 그룹이 재등장하고, 이는 필연적으로 일본에서 전후에도 전전(戰前)의 제국주의적 역사인식이 계승 부활될 수 있는 토대를 조성한다. 미국의 이러한 정책 방향은 1952년 연합국의 일본 점령이 끝날 때까지 변하지 않는다. 물론 일본의 국제적 전후처리의 기본 틀을 제시한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도 이 방향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 조약은 일본의 아시아 침략에의 면죄부로서의 성격마저 띠는데, 이 조약에서 일본의 배상 의무는 최소화되고, 한국과, 일본 침략의 최대 피해자였던 중국은 강화조약의 서명에서 배제된다. 강화조약의 발효를 앞두고 참가 대신 한국에게 주어진 것은 미국 주선의 개별적 한일회담이었다. 찜찜한 한일조약 체결, 과거사 청산은 뒷전 국교정상화를 위한 회담이 시작된 지 14년만인 1965년, 우여곡절 끝에 당시 한국 박정희ㆍ일본 사토 에이사쿠 정권 사이에 한일기본조약이 체결된다. 이는 명목상 일본의 조선식민지 지배와 관련한 과거사 청산문제를 법률적으로 매듭짓는 조약이었으나 실질적으로는 그 역할을 하지 못한다. 이는 올바른 과거사 청산 문제의식보다는 당시의 상황, 즉 ‘경제’와 ‘냉전’의 두 논리에 기반해 체결된 조약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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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교수립에 대한 적극적인 추진의사를 갖지 않았던 이승만 정권과는 달리, 장면 민주당 정부와 박정희 군사정부는 경제협력 방식의 수교교섭을 추진했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이는 두 정부 모두 국민들로부터 정당성을 인정받기 위해 경제발전을 필요로 했기 때문인데, 특히 군사정부는 혁명공약으로 국민의 생활고 해결과 경제의 자립화를 내걸었던 만큼 그 필요성이 훨씬 절실했다. 군사정부는 출범한 이듬해인 1962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발표했다. 이 계획의 핵심재원은 외국자본의 도입으로 충당될 예정이었으나, 계획 첫 해부터 외자도입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군사정부는 일본으로부터 자본을 유치하기 위한 기본 작업으로 일본과의 수교타결을 서두르게 된다. 한일 수교가 이루어진 두 번째 근거는 당시의 냉전체제의 세계 질서에 있다. 동서대립의 구조 아래서 미국은 한미방위협정과 미일 방위협정, 즉 한국과 일본을 양축으로 한 미국 주도의 동아시아 반공 동맹 체제를 견고하게 하는 맥락에서 한일회담의 신속한 타결을 종용했던 것이다. 이러한 배경 아래 체결된 한일조약에 따라 남한에게 일본이 무상자금 3억 달러, 유상자금(장기정부차관) 2억 달러를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배상으로 제공하게 된다. 이 자금은 남한정부의 경제개발계획의 주요재원으로 사용되어 국가경제 발전에 밑거름이 되지만, 한일조약으로써 진정으로 추구해야 했을 과거사 청산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한일조약은 한일간에 존재하는 역사인식의 괴리를 형식적으로 봉합하는데 그친 정치적 타협문서에 불과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탈냉전, 변화하는 한일관계 1985년 이후 구소련의 체제 개혁과 미소관계개선으로 시작된 국제 냉전 완화 움직임은 1989년 미소 냉전체제 종식으로 귀결되기에 이른다. 따라서 냉전시기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의 하위 체제로서 위치하던 한일관계는 탈냉전을 맞아 필연적으로 변화하게 된다. 다시 말하자면, 냉전기의 한국과 일본은 미국의 강력한 지배 하의 동북아시아 자유주의 진영이란 이름으로 갈등보다는 협력과 결속 위주의 관계를 가지는데, 이러한 안정된 구도는 탈냉전기에 접어들어 소련이라는 최대의 적이 사라지면서 균형을 잃는다. 동북아시아 미국-남한-일본 체제와 소련-북한-중국 체제의 대립이 무너지면서 각국 간의 관계는 협력 또는 대립의 편짜기가 아닌 개별적인 다자 관계로 변화한 것이다. 따라서 한일관계는, 탈냉전기 동북아 국가들이 맺는 관계의 성격 자체의 변화와 시대에 따른 세계정세의 변화, 그리고 양국간의 변화가 맞물려 전환기를 맞게 된다. 탈냉전기를 맞은 양국의 변화 중 특히 현재 한일관계 위기의 요인이 되는 것을 짚고 넘어가기로 한다. 한국의 변화 – 국민의 힘, 강해지다 탈냉전기, 전세계적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욕구가 높았던 정세에서 한국도 벗어나지 않았다. 1980년대 이래, 1993년 문민정부가 들어서는 등 사회정치적 민주화의 발전이 진행됐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일간 과거사 문제-일본 고위 관료들의 문제 발언, 독도 영유권 문제, 교과서 왜곡 등-의 쟁점화가 이전에 비해 활발하게 이루어진다. 80년대 중반까지의 권위주의적 정권하에서는 이러한 사항이 외교적인 쟁점으로 등장하는 일은 그리 흔하지 않았다. 이 시기 정부는 대일관계 악화가 가져올 악영향을 고려하여 과거사 문제를 전면적으로 제기하지 않았고, 혹 문제가 되더라도 이를 조기에 수습하려는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80년대 후반 이후 진행된 정치민주화의 흐름에 따라 권위주의 하에서 억압되어 있는 대일감정은 폭발적으로 표출된다. 이러한 변화는 국력신장과 더불어 한국정부의 대일정책의 변화를 초래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이러한 변화를 설명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요소로 동아시아 자유주의 진영이란 이름으로 한일을 결속시켰던 냉전 체제 하에 잠복되어있던 한일간의 역사청산 문제 관련 갈등의 표면화도 들 수 있다. 미국의 압력 하에서 최소한으로 억제됐던 민족적 갈등이 분출된 것이다. 일본의 변화 – 1. 일본, 정치군사대국을 지향하다 서울대 국제대학원 일본연구소 김용덕 소장은 “일본은 세계 제 2위 경제력에 걸 맞는 구체적 위치를 차지하려 한다”며 탈냉전기의 일본 정부의 정책 방향을 설명한다. 일본의 군사력은 패전 이후 제정된 평화헌법의 제한을 받아, 일본은 경제대국/군사소국의 양면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탈냉전기 일본은 이 양면성의 극복을 과제로 삼는다. 그리고 그 극복은, 현재까지 일본의 안보를 담당해왔으며 탈냉전기 세계정세를 주도하는 미국의 영향 범위 내에서 이루어진다. 일본은, 일본과 긴밀히 공조하여 일본을 ‘동북아의 영국’으로 활용해 패권을 유지하려는 미국의 전략에 응하여, 국제사회에서의 일본의 공헌 및 역할을 증대시킴으로써 유엔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으로의 진출과 더불어 정치군사대국으로의 발전을 목표삼고 있는 것이다. 일본의 이 목표에는 중국의 동아시아 패권 장악 견제, 신뢰할 수 없는 북한 견제와 나아가 최근 독자적인 외교 노선을 견지하는 남한 정권에 대한 견제 등의 요소가 포함된다. – 2. 일본 열도, 오른쪽으로 기울다 그렇다면 일본의 정치군사대국화로의 정책 방향과 최근 특히 두드러지는 우경화는 어떠한 연관이 있는 것일까. 필연적인지 우연적인지 이 두 요소가 맞물려 현재 일본의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음을 우리는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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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관계사학회 최영호 영산대 교수는 현재 세계정세가 “경제 피로화와 국제 테러리즘의 위협으로 인한 안보에 대한 불안 의식으로 대부분의 선진국이 보수화되어가는 형세”라며 일본의 우경화도 이러한 맥락에서 존재한다고 말한다. 다만 일본 사회의 보수화에는 다른 선진국들 사이에서 볼 수 없는 뚜렷한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지난 식민지 지배와 2차 세계대전 전범의 과거사 청산과 반성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보수화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의 정치군사대국으로의 전환을 위한 국민 통합 방침은 미래 지향이 아닌 과거 지향성을 띤다. 즉, 일본은 지금 상황의 돌파구이며 국민의 신뢰를 얻을 수 있는 방법으로 과거로의 회귀를 택한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런 상황을 일본의 신을 과거 전쟁을 이끌었던 신으로부터 찾고 있다고도 해요. 선진국, 경제대국이 되기까지는 경제를 제일의 목표로 열심히 뛰었지만 이제는 그게 없지요. 따라서 군국주의, 즉 이전에 일본을 통합했던 힘을 추구하는 겁니다.” 최영호 교수의 설명이다. 이러한 일본의 군국주의 방향이 20세기의 그것과 비교해 다른 점은 현재 그것이 미국의 영향 아래 있다는 것이다. 중앙대 손열 교수는 동아일보 주최의 “신아크로폴리스” 강좌에서 일본의 현 군국주의화는 “군사적 재무장의 길이라기보다는 오래된 과거의 상징에 의지한 사회통합적 도덕적 재무장이라고 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현재 대미종속적 군사동맹이 강화되고 있는 현실 속에서, 일본이 미국 패권으로부터 일탈하여 독자적 군사대국화를 이룩하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청산되지 못한 과거사의 현재형 – 한일관계의 진정한 해방을 위하여 탈냉전기를 맞아 우호와 협력 방향으로 가야 할 한일관계는 불안하게 흔들린다. 한일관계는 완전히 현재에 기반해 있지 않다. 청산되지 못한 과거사는 아직까지 양자간 협력의 걸림돌로 남아, 현상으로 표출될 때마다 한일관계를 뒤트는 것이다. 자칫 한일관계의 흐름을 중단케 할 수도 있는 이러한 변수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한일관계에 정상적인 교류와 발전을 기대할 수는 없다. 일본은 과거사의 인정과 철저한 반성을 통해 국내에서 군국주의 과거의 잔해를 씻어내는 동시에, 한국을 비롯한 당시 피해국에 대한 진정한 사죄와 보상을 해야 할 것이다. 이는 비단 과거 피해국들을 위한 일이 아니며, 일본인의 자아 정립과 일본의 정체성을 회복하기 위한 것이다. “과거에 대해 눈을 감는 자는 현재에도 눈이 멀게 된다”며 “비인간적 행위를 마음에 새기려 하지 않는 자는 또 그런 위험에 빠지기 쉽다”고 말한 바이츠제커 전 서독 대통령의 지적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한편 한국은 일본에 우리의 입장을 표명하고 과거사 진상 규명을 촉진해야 할 것이다. 김용덕 교수는 “정권 변화와 관계없이 우리의 입장을 일관성있게 개진해 나가는 태도가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이는 감정에서 비롯된 일시적인 반응이 아닌, 논리에 입각한 지속적인 대응의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더불어 한국 내의 관거사 청산에도 같은 수준의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이는 정부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독도수호대 김점구 사무국장은 “‘우리’의 대응이라고 할 때 그 ‘우리’에 자신이 포함되어 있는지 돌아봐야 한다”며 국민의 행동을 촉구했다. 한일 관계 과거사에 관련한 쟁점들이 타결되는 방식은 21세기 한일관계의 새로운 패턴을 정립하는 시금석이 될 것이다. 한일 양국이 그것의 해결 방향으로 점점 나아가 마침내 현재의 기반 위에서 양국의 관계를 정립할 수 있을 때, 그 때 비로소 양국은 과거로부터의 진정한 해방을 맞이하여 거침없이 미래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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