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에 고함!

고등학교 1학년 때 학교를 중퇴하고 조기 유학을 온지 벌써 7년이다.그래서일까.요즘은 일상에 서 문득 미국인과 다를 바 없는 나의 모습을 발견 할 때가 많아졌다.

고등학교 1학년 때 학교를 중퇴하고 조기 유학을 온지 벌써 7년이다. 그래서일까? 요즘은 일상에 서 문득 미국인과 다를 바 없는 나의 모습을 발견 할 때가 많아졌다. KBS 심야 토론 프로그램에서 토론자들이 ‘프로세스’ (process), ‘노멸’ (normal), ‘그랜드 플랜, (grand plan) 등의 거 추장스러운 영어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보고 쓴웃 음을 지 었던 때가 어제같은데, 이제는 가족이랑 통화할 때 “~에 다다랐다’ 라는 표현도 바로 생 각이 안 나서 arrived at, got to하는 식으로 어 설프게 맴질하기 일쑤다 또한 미국에 도착하고 처음 몇 달동안 그렇게 그립던 먹묶이, 물냉면도 이제는 거의 잊고 지내는 반면, 스파게티, 칠면조 샌드위치 등은 일주일이라도 못 먹고 있으면 불안 할정도다. 하지만 이러한 일상 생활에서의 행통 변화보다 미국에 와서 가장 크게 변화한 것은 바로 나의 정 치적인 성향이다. 나는 한 인간이 삶의 주관을 형 성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청소년 시기를 7년 동안 미국에서 보냈다. 그 때문인지 한국에 있을 때는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애독해온 한겨레 선문이 어느덧 더 이상 탐탁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중학 교 때까지만 해도 신라의 삼국 통일을 부끄럽게 여기고 반민특위를 다시 설립해야 한다고 생각했 던 나였다 그러나 그런 풋내기 민족주의자였던 나도 이제는 광화문에 운집한 붉은 악마들을 보며 흥분과 동시에 묘한 위협을 느끼는 사람이 되었 다. 나 스스로도 이런 모습들이 때로는 놀랍고 때로는씁쓸하게 느껴진다 나는 70년대와 80년대 초에 재야 민주화 운동을 하신 부모님 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때문에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눈도 – 아벼지 친구분의 말 씀을 빌자면 – ‘삐딱‘ 할 수밖에 없었다. 한 예 로, 초등학교 1학년 때는 평화의 댐 성금을 안 낸 다고 담임 선생님께 대들다가 혼난 적도 있었다. 또한 제 14대 대선 때에는 김영삼이 최고라고 주 장하는 어느 아이와 말다툼을 하다가 결국 주먹다 짐까지 하게 되었으며, 중학교 시사반에서는 한겨 레와 조선일보 사설을 비교한 뒤 왜 조선일보가 나쁜 신문인지를 얄리는 스크랩북을 만들기도 했 다. 물론 그런 행동의 근저(根底)에 어떤 정치적, 철학적 신념이 있었던 것은 절대 아니다. 그저 야 당 일로 바쁘선 아버지와 함께 할 수 있던 시간이 KBS 9시 뉴스를 보며 박성범씨(당시 앵커)를 욕 하는 것이 대부분인 가족 환경에서, 필연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었던 특정 정치 세력에 대한 광적 인 맹신일 뿐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나마라도 학교 사회 시간에는 한 마디조차 거론되지 않는 우리나라 현대사의 거친 모습을 생생하게 현장에서 아버지와 가족을 통 해 – 지켜볼 수 있었던 것은 지금 돌이켜 볼 때 크나큰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1987년 김 대중 당 시 평민당 후보의 보라매 공원 연설을 3층 높이의 단상 위에서 지켜본 일이나, 그 이듬해 명동 성당 의 조성만군 투신 자살 사건을 데모 현장에서 목 격한 것, 그리고 보안법으로 지명 수배를 당해 우 리 집에 한동안 숨어 지내야 했던 청년들과 함께 생활했던 일 참고로 담배 냄새가 상당히 지독한 사람들이 었다 등은 내가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추억들이다. 아니, 추억이라기 보단 부모님께서 물려주신 정신적 유산이라고 하는게 더 정확할 것 같다. 하지만 문화유적도 세월의 향기가 배어나야 그 은은한감동이 더해지듯이, 내가물려받은 민주화 운동의 정선적 유산은 나 자신이 내적인 성숙을 이룰때에 비로소 그 의미가 갚어질 것이다. 한겨 레신문과 김대중 전 대통령을 통해 상정되는 우리 나라 정통 민주화세력에 대한 나의 맹목적인 지지 는 정치와 역사에대한 지극히 감성적인 이해에 기 초한 것이었기에, 언젠가는 삶의 경험을 통해 균 형을 갖춘 올바른 정치신념으로 승화되어야만 한 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7년의 유학생활은 나에게 정말 귀중한 경험이 되었다 내가 유학생활을 통해 얻은 느낀 점은 크게 두가 지이다 첫번째는 우리나라의 문제점을 제대로 파 악하기 위해서는 좌우에 치우지지 않는 균형된 시 각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오랜기간동안 이코노 미스트지나 뉴욕타임즈등의 서구언론매체를 통해 우리나라 안팍의 문제들을 지켜본 나로서는 우리 나라의 정치, 사회토론을 완전히 마비시킨 좌우의 이데올로기적 결벽증에 좌절하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나라의 지식인들이 다른 사상체계에 볼입되 어 해결책이나 결론이 없는 끊임없는 격론에 말려 드는 것은 서양의 지식인들과 다를바 없다고 생각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일어나는 그런 토마스 문 (Thomas Kuhm)식의 패러다임 충돌은 지역 적, 역사적인 갈등의 영향을 받아 더욱 섬화되어 대화와 토론의 민주절차를 약화시키는 것이 아닌 가 생각된다. 모든 토론을 자유무역(신자유주의) 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하는 전보인사들이나 광화 문에 앉아 성조기를 들고 진보진영에 독설을 퍼붓 는 기독교단체들이 대표적인 예이다 정치적인 논 란거리가 있을때마다 고성으로 가득차는 국회의 모습도 우리나라의 잘못된 토론 문화를 잘 보여준 다. 아무리 격 렬하고 결론이 없는 토론을 한다 하더 라도 참가자들이 상대방을 존중하는 최소의 예의 를 지카면 그 토론은 나름대로 그 의의를 가질 것 이다. 다음 토론때 서로의 상반된 의견을 좀더 좁 힐수 있는 동기와 타협적인 분위기를 형성해 주기 때문이다. 내가 편협한 이데올로기에 서 벗어나 균형감각을 가지기 시작한 것도 토론의 도움이 컸 다 나에게 대학생활은 끊없는 토론의 연속이었 다. 생각과 문화적 배경을 달리하는 룸메이트나 친구와의 수많은 토론은 나에게 혼자서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 는 것은 역시 유태인 시온주의자들과 아랍학생들 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토론에 참가한 일이 었다. 내가 재학하는 대학에서는 유태인 학생이 많은 관 계로 그런 토론이 자주 열라는 편이다. 비록 토론 과정에서 격한 감정이 쏟아져 나오곤 했지만 토론 이 끝나면 양측이 서로를 다독거리고 다음 행사를 준비하는 매너를 보였었다. 이는 대학캠퍼스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CSPAN 과 같은 공공채널에서 보여지는 미국국회를 보면 고성이나 욕설과 같은 비신사적인 행통이 허용되 지 않음을 쉽게 알수 있다. 오히려 섬하다 싶을 정도로 서로에 대한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는 다 만약 우리나라도 이런 토론문화를 가꿔갈 수 만 있다면 색깔론 같은 무책임한 정치공세는 더욱 힘들어 질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문화에서 는 공산당이나 사회당 같은 작은 진보정당이 정치 권 한편에 자리잡고 통일과 민족협력에 대한 대화 에 좀더 갚은 의미를 부여할 것이다. 사대주의적 인 관찰이 아니다. 그저 요르겐 하벼마스(Jurgen Habermas)가 꿈꿨던 대화와 토론의 사회를 이 루기 위해서는 좀더 서구식의 격식을 갖춘 열린 토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두번째는 우리나라 언론들의 정치, 사회, 국제분 야에 좀더 책임있는 기사를 실어야 한다는 것이 다 내가 한겨레에 대해 불만족스럽게 느끼게 된 것은 지나치게 편향된 기사들의 영향이 컸다 독 자들이 올리는 근거없는 억측은 차지하고서라도 사설이나 사회기사, 또는 국제기사에서 편집부가 선호하는 정치세력이나 인물을 긍정적으로 묘사 하고, 부시대통령과 같은 인물에 대해서는 편집부 가 그를 선호하지 않는 다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부정적인 뉘앙스를 풍기는 기사를 기재하는 것은 상당히 탐탁치 않은 보도행위이다. SOFA개정에 관한 보도는 특히 문제가 섬각했다고 생각한다. 효순, 미선양의 죽음은 정말 비극적이고 애도해야 할 상황이 었으나, 재판권까지 한국이 가져야 한다 고 주장했던 것은 상식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중 국에서 마약관련 범죄로 한국인이 사형을 당하는 것은 반대하면서 외국병사가 우리나라의 법에 따 라 처벌되는 것은 괜찮다고 주장하는 것은 모순이 아니고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만약 소말리아 에 파견되었던 상록수부대의 병사가 그 지역의 이 슬람법에 의해 처벌을 받는 경우가 생긴다면 한겨 레는 어떤 주장을 내놓겠는가? 문제는 이런 보도 행태가 거의 모든 신문에 만연하고 있다는 것이 다. 외국 명문대학에 진학하는 학생들은 무조건 한 국학생들보다 우수한 것처럼 보도하는 조선일보 의 사대주의나, 국제관계등에 대해 음모론 일색인 오마이뉴스, 그리고 노무현정권에 대해 비열한 정 도로 심한 기사를 내보내고 있는 동아일보등이 그 대표적인 경우에 속한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미국에서도 한때 말썽 을 일으켰던 언론윤리 문제가 한국에서도 공론화 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각 언론사가 긴장관계 를 유지하면서 서로를 견제하고 기사의 정확성을 검증하는 것은 아주 고무적인 현상이 아닐 수 없 다. 그 예가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등의 왜곡된 외신인용을 MBC 미디어 비평이나 오마이 뉴스등이 지속적으로 감시하고 적발해내는 것이 다. 뿐만 아니라 최근 취재원이 조작되거나 빈약 한 보도를 하는 행태도 동아일보의 굿모닝게이트 보도등을 통해 감시대상에 오르게 된 것도 언론이 자체적으로 취재의 정확도를 검증하는 계기를 마 련했다는 점에서 희망을 준다. 외국에서 생활하다 보면, 국내에서 보이지 않았 던 젓들이 보이곤 한다. 아무튼 한국의 위와 같은 언론의 보도행태, 토론문화가 개선되어 보다 나은 사회로 전진했으면 하는 바램이 크다 한국, 우리 나라에 대한애정이 그만큼크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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