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26일로써 쿠바는 혁명 50주년을 맞이하게 되었다. 정확히 50년 전 바로 이 날, 쿠바 혁명의 장엄한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로부터 6년 후인 1959년 1월 피델 카스트로, 체 게바라(본명 : 에르네스토 게바라 데 라 세르나) 등을 위시한 혁명군들은 당시 대통령이었던 바티스타를 몰아내고 당당히 쿠바의 수도 아바나에 입성함으로써 혁명은 성공으로 끝맺게 된다. 특히 체 게바라는 ‘우리 세기에서 가장 성숙한 인간’, ‘시대정신을 가장 완벽하게 구현한 인간’ 혹은 ‘이상을 꿈꾸는 인간의 대표’로 추앙받으며 이후 전세계인의 마음속에 전설로 남게된다. 이러한 그의 일생은 그동안 수많은 다큐멘터리, 서적 등을 통하여 전세계에 소개되었고, 우리나라에서는 2000년 3월 프랑스 작가 장 코르미에가 쓴 『체 게바라 평전』을 실천문학사에서 번역하여 출간함으로써 급속히 알려지게 된다. 이 책은 평전은 기껏해야 3000부가 고작인 우리 출판 현실에서, 한 달만에 가뿐히 2만부를 넘길만큼 큰 반향을 불러오기도 하였다. 혁명 50주년을 기념하여 이제는 전설이 된 쿠바혁명을 되집어보고, 1989년에서 1991년사이 급속하게 진행된, 동구권과 소련의 사회주의정권의 붕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체제를 유지·지속하고 있는 쿠바에 대해 다시금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본다. 정체성이 없는 암흑의 대륙에서 일어난 가장 근대적이고도 역사적인 혁명. 쿠바 혁명은 중남미 현대사에 있어 대내외적으로 두 가지의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대외적으로 쿠바 혁명은 그동안 서구세계가 중남미에 대하여 가지고 있던, 근대성이 부재한 비(非)역사적 진로를 걷고 있는 대륙이라는 이미지를 불식시켰다. 쿠바 혁명이 있기 전까지 서구, 특히 미국은 중남미를 단지 이국적 풍물의 대상 정도로 취급하였다. 자신들만의 주도적이고도 창조적인 역사 전개를 위해서 지속적으로 투쟁해나간 중남미인들의 자기 모색의 과정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다만 정체성이 없는 하나의 대륙으로 인식하였던 것이다. 언젠가 카스트로가 한 인터뷰에서 “우리는 아직 세례조차 받지 못한 대륙입니다”라고 고백하고 있듯이 중남미는 서구인들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이름(이베로 아메리카, 라틴 아메리카, 이스파노 아메리카 등)이 붙여져야만 하는, 고정된 자기 이름조차 가지지 못한 채 타자에 종속된 대륙이었다. 따라서 이 대륙에서 발생한 쿠바 혁명은 서구인들에게는 하나의 충격이며,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이에 따라 서구는 기존에 가지고 있던 시각에서 벗어나 새롭게 중남미를 바라보기 시작했는데, 미국이 쿠바 혁명 이후 중남미의 상당수 지식인을 초청해 미국 내에 자리를 마련해주면서 자신의 자본주의 체제 내로 중남미 지식인을 흡수하겠다는 정책을 펴기 시작한 것이 그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다.한다. 이러한 시각 변화는 단지 서구 지식인이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서구 대중들에게까지 광범위하게 형성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중남미의 사상과 문화가 서구로 본격적으로 유입되기 시작한다. 서구에서 1960년대 일기 시작한 중남미 소설에 대한 관심은 이러한 현상의 또다른 예이다. 쿠바혁명, 중남미 무장투쟁혁명의 가능성을 증명하다. 대내적으로 쿠바 혁명은 중남미 정치변혁사, 특히 중남미 좌파운동사에서 과거와 질적으로 차별되는 중요한 점을 내포하고 있다. 카스트로가 아바나에 입성하기 전까지 중남미 좌파는 사회변혁에 있어서 개량주의적, 점진주의적 관점을 견지하면서, 무력을 통한 혁명적인 승리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비관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그들은 서구 선진국의 사회 및 계급구조에 기초한 이론을 바탕으로 노조를 중심으로 한 도시노동자 계급에 기반해 선거를 통해서 집권하는 전략을 가지고 있었으며, 상대적으로 도시를 벗어난 농촌지역의 사회변혁 혁명 역량을 도외시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쿠바 혁명은 주변지역인 시에라마에스트라 산악지대를 거점으로 한 무장투쟁이 혁명으로 승리할 수 있음을 보여준 중요한 사례가 되었다.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가 중남미 역사에서 무장투쟁을 전개한 첫 번째 인물들은 아니었다. 중남미에서의 무장투쟁은 19세기에서부터 유래한다. 이러한 무장투쟁의 전통은 쿠바의 마르티, 멕시코의 비야, 사파타, 엘살바도르의 파라분도 마르티, 티카라과의 산디노 등 민족주의자, 자유주의자, 때로는 마르크스주의자에 의해서 이어져왔다. 그러나 무장투쟁이 당과 국가의 정치체제로 변환된 것은 무장투쟁이 개시된 이래 쿠바 혁명이 처음이었다.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 정권이 선거에서 패배하고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이 몰락하는 1990년대 초반까지, 거의 모든 중남미지역에는 무장투쟁 게릴라 그룹이 계속해서 창설되었고 쿠바 혁명은 그들에게있어 중요한 하나의 전범이 되었다. 쿠바 혁명의 성공으로 이제 중남미 좌파는 평화적인 노선, 특히 공산당의 노선으로 어떻게 권력을 쟁취할 것인가 하는 ‘전술적 문제’를 ‘전략적 교훈’으로 전환하게 된 것이었다. 쿠바 혁명이 중남미 현대사에서 대중을 포함한 지식인으로 하여금 의식의 전환을 가져오게 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음은 라틴 아메리카의 대표적인 저항작가인 바르가스 요사의 한 글에서 잘 나타난다. “(쿠바 혁명으로) 우리 나라들(중남미 국가들)에서 혁명이 가능하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되었다. 그 당시까지만해도 혁명은 우리의 사고에서 낭만적이고 먼 얘기였다. 우리는 혁명을 우리와 같은 나라에서는 결코 현실화될 수 없는 아카데믹한 개념으로 취급하고 있었다.” 혁명 후 50년, 쿠바는 어떤 길을 걸어왔는가? 쿠바 혁명 전 집권하고 있던 바티스타는 군대와 속임수, 그리고 암살을 통하여 권력을 유지하던 인물로 악명이 높았다. 더욱이 1933년이후 직·간접적으로 쿠바를 좌지우지해오던 바티스타는, 1952년 대통령 선거에 당선될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생각되자 쿠데타를 일으켜 독재체제를 구축하였다. 그에 대항하여 피델 카스트로는 체 게바라 등과 함께 쿠데타를 일으키고 1959년 1월 바티스타 정권을 타도하는 데 성공하였다. 총리로 취임한 카스트로는 그 해 5월 농지개혁법을 발표하여 대지주의 토지와 미국계 기업의 대농원을 모조리 몰수하였다. 그리고 1959년에는 석유법, 1960년에는 대기업 국유화법으로 미국계 사탕·석유회사를 국유화하는 등 일련의 개혁을 단행하여 미국과 대립하다 1961년 1월에는 국교를 단절하기에 이른다. 같은 해 4월 미국 기업인들의 지원을 받은 망명 쿠바인들이 쿠바로 진격하는 피그만 사건이 발생하였으나 그 시도는 실패로 돌아가게 되고 미국과 쿠바의 관계는 더욱 멀어지게 된다. 1962년 10월, 소련은 중거리 미사일을 쿠바로 반입하려 하였고 그에 반발한 미국은 쿠바의 해상을 봉쇄조치하였는데 이로인한 위기사태가 핵위기로까지 발전하기도 하였다. 1964년에 개최된 미주기구(OAS:Organization of American States)의 외상회의에서는 대쿠바 경제봉쇄강화조치가 결정되어 한때 쿠바는 멕시코를 제외한 모든 라틴아메리카 국가들과의 국교가 단절되어버리기도 한다. 이에 따라 1960년대 중반부터 쿠바는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과의 긴밀한 관계구축에 힘쓰게 된다. 당초 쿠바는 사회주의 국가임을 천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 국가의 중심축이라할 수 있는 중·소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는 자주독립이라는 입장을 표명하였으나, 대쿠바 경제봉쇄강화조치에 대한 대응으로 1972년 동유럽공산권경제상호원조회의(COMECON:Council of Mutual Economic Aid)에 가입한 후 점차 친소적 성향을 띠게 되었다. 1970년대에 들어와 칠레에 좌경정권이 등장하자 칠레와 복교하게 되었고 그 후, 1973년까지 아르헨티나, 자메이카, 페루 등의 국가와 국교를 회복하기도 하였다. 미국과는 1973년 2월 항공기 공중납치 방지협정을 체결함으로써 관계 진전을 시도하게된다. 이는 1994년에 이민 협의 체결로까지 발전하나, 1996년 쿠바의 미국 민간기 격추사건으로 다시 관계가 냉각되게 된다. 1999년과 2000년, 미국은 대(對)쿠바 경제제재를 일부 완화하기도 하였다. 한편 미국의 경제제재가 풀리지않은 상황에서 연평균 40억달러에 달하는 지원을 해오던 소련이 90년대 초반 무너짐으로써, 쿠바는 경제적으로 더욱 어려운 상황에 봉착하였고 이를 타개하고자 관광 부흥 정책을 실시하였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관광객을 상대로한 미성년자들의 매춘이 성행할 정도로 그 부작용이 심각한 실정이다. 사회주의가 낳은 이란성 쌍둥이?!, 쿠바와 북한 사회주의국가로서 쿠바와 북한은 다수의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두가지를 들 수 있는데 우선, 두 국가 모두 사회주의 이행과정에서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 국가들의 개입과 압력에 의해 제약을 받았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두 국가의 정권은 기존 사회주의국가의 군사적 보장을 추구하게 되었으며, 또한 자본주의권과의 경제관계의 단절로 인하여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경제 공백을 메꾸기 위하여 기존 사회주의 국가와의 교역과 원조에 의존하는 사회주의경제를 발전시키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두 국가 모두 90년대를 전후하여 일어난 동구권과 소련의 붕괴로 심각한 군사적·경제적 타격을 입게 되었다. 다음으로 두 국가 모두 대중조직이 미발달한 상태에서 소수정예의 전위조직에 의한 주도되는 혁명과정을 거쳤기때문에 소수엘리트와 일인 지도자 중심의 상하 수직주의적 권력구조를 공고히 쌓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는 피델카스트로에게 현재까지 44년 간이나 쿠바를 독재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아 주었으며 김일성에게는 대를 이어 북한을 지배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주었던 것이다. 하지만 쿠바와 북한이 이처럼 동등한 모습만을 지니는 것은 아니다. 정치적 변화에 있어서의 속도와 유연성 차이를 대표적인 경우로 들 수 있다. 쿠바는 북한에 비해서 더 빠른 속도와 유연성으로 정치적 변화를 진행시킬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쿠바 권력구조에는 분권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으며 경제영역에서 쁘띠 부르조아지의 공간이 축소 혹은 확대의 부침을 겪으면서도 그 체제가 지속되어 왔기 때문이다. 반면에 북한은 부르조아지의 경제 영역이 1958년이후로 완전히 사라졌고, 일인중심의 초중앙집권적 권력구조가 전사회를 지배하고 있으며 분단으로 인한 제약과 경쟁적 자의식이 지속되고 있기 때문에 정치적 개혁의 범위와 속도는 매우 제한적일 수 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혁명의 숭고한 불길은 계속되고 있는가? 1961년 말 피델 카스트로는 자신이 마르크스-레닌주의자라고 선언하였다. 이것은 쿠바가 미국진영으로부터 소련진영으로 소속을 옮긴 것을 천명하는 의미가 있었다. 이상적인 사회를 위한 혁명의 열정은 공식적인 정치이데올로기의 교리로 대체되었다. 자본주의도 사회주의도 아닌 이상적인 사회를 꿈꾸며 ‘푸른혁명’을 부르짖던 체 게바라의 설 땅은 자꾸만 좁아지게 된 것이었다. 결국 1965년 체 게바라는 피델 카스트로와 결별하고 쿠바를 떠나 아프리카의 콩고로, 남미의 볼리비아로 그의 혁명거점을 차례로 옮겼다. 자신의 지위와 부귀를 훌훌 던져버리고 스스로 영원한 혁명가의 길을 걷기로 선택한 것이다. 이에 비해 피델 카스트로는 현실과 타협하는 신중한 정치인으로 성공적으로 변신했고, 쿠바혁명 후 40여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쿠바의 통치자로 군림하고 있다. 현재 쿠바의 모습에서 50년 전의 숭고한 혁명의 기운을 느낄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활활 타오르던 50년 전의 그 존엄하고도 거룩한 불길을 이제는 마음 속의 전설로 간직해야만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