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핵 위기, 1994 vs 2003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0년 전인 지난 1993년, 소설가 김진명은 남한의 핵보유를 소재로 위와 같은 제목의 3권 분량의 소설을 발표한다.전세계 8개국만이 보유한 인류 최고이자 최악의 무기인 핵을 남한이 보유하게 된다는 흥미로운 가정을 전제로 하여, 이 때 벌어질 수 있는 남북 간의 관계 변화와 주변 열강들과의 첨예한 대립과 갈등을 그림으로써, 이 소설은 세간의 폭발적인 관심을 끌게 되었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0년 전인 지난 1993년, 소설가 김진명은 남한의 핵보유를 소재로 위와 같은 제목의 3권 분량의 소설을 발표한다. 전세계 8개국만이 보유한 인류 최고이자 최악의 무기인 핵을 남한이 보유하게 된다는 흥미로운 가정을 전제로 하여, 이 때 벌어질 수 있는 남북 간의 관계 변화와 주변 열강들과의 첨예한 대립과 갈등을 그림으로써, 이 소설은 세간의 폭발적인 관심을 끌게 되었다. 이 후 단숨에 베스트셀러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곧이어 영화로 제작되기에 이른다. 현재 한국은 중국, 러시아, 일본 그리고 태평양 너머에 있는 세계 최강대국 미국 이 네 열강 속에 둘러싸인 채, 이들의 눈치를 살피는 입장에 처해있다. 이러한 상황 하에 있는 우리들이기에 비록 허구적 이야기이나, 서구열강, 특히 아직까지 감정이 완전히 해소되었다고 보기 힘든 일본에게 자주적이고도 당당한 태도를 취하는 미래 한국의 모습을 보여주는 이 소설은 더욱 큰 반향을 일으킬 수 있었고, 이 점이 바로 이 소설이 큰 인기를 끌 수 있게 된 가장 큰 원동력으로 작용하게 된다. 2003년 북핵 위기가 다시 불거지기 시작했다. 작년 10월 북한이 핵 개발 계획을 시인한 이후 고조되어 오던 한반도 핵위기는 올 4월 베이징 3자회담에서 북한이 핵보유를 시인함으로써 최고조에 달하게 된다. 한반도는 이미 지난 1994년 6월 핵위기를 경험한 기억이 있다. 과거와 동일한 과정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1994년 1차 핵위기와 현재에 벌어지는 2차 핵위기의 상황을 비교하여 살펴보고, 앞으로의 전망에 대해 살펴 보도록 하자. 1994년, 다시 찾아온 전쟁의 기운 한반도는 지난 1993년 3월부터 시작된 영변 핵위기로 인하여, 이후 1994년 10·21 제네바핵합의가 체결되던 10월까지 무려 5차례에 걸친 크고 작은 위기를 맞게 된다. 특히 그 가운데서도 1994년 6월에 발생한 위기는 최악의 위기로서 당시 한반도는 전운으로 가득차게 된다. 최정점에 이른 때는 1994년 6월 16일이었다. 이 날 한국에서는 럭 주한미사령관과 레이니 주한미대사가 주한미대사관 관저에서 비밀 회동을 가졌다. 두 사람은 현 사태의 대응방안으로, 비상체제를 가동하여 한국에 거주하고 있는 미국인의 소개작전을 실시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에 의견의 합일을 보았다. 이 후 레이니는 미 본토로부터의 공식명령도 기다리지 않고 바로 당시 한국에 와 있던 딸과 세 손자와 손녀들에게 사흘 내로 미국으로 돌아가라고 말한 것이다. 한반도는 점점 더 헤어나올 수 없는 전쟁의 소용돌이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사태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던 워싱턴 시각 16일 아침 10시 경, 백악관에서는 대통령, 부통령, 국무·국방장관, 합참의장, 유엔대사, CIA국장, 안보보좌관 등 최고위 당국자는 모두 모여 회의를 열었다. 회의 초반부에 빌 클린턴 미대통령은 유엔안보리의 대북한 제재 추진을 최종적으로 승인하였고, 클린턴으로부터 최종승인이 떨어지게되자 바로 합참의장은 한반도 주변지역의 미군증강계획에 대하여 브리핑하기 시작했다. 당시 그는 대통령에게 추가적으로 필요한 병력을 제대로 배치하기 위해서는 제한적으로나마 예비군을 소집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병력 증강안과 더불어 전투기와 또 다른 항모전단, 그리고 1만 명을 웃도는 추가병력 배치에 관한 내용을 담은 전쟁계획안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그런데 당시 이미 북한은 미군의 추가배치가 있을 경우, 이를 군사적 공격으로 간주하고 선제공격을 할 것임을 밝힌 상황이었다. 카터의 극적인 중재로 전쟁 위기는 넘겨 당시 남한정부 또한 전군의 경계태세를 강화하고, 임전에 있어서 ‘여유’의 수준을 넘어 ‘승리’를 자신하는 모습까지 보였다. 이는 1994년 6월 4일 한겨레 신문에 실린 당시 김영삼 대통령의 발언에서 잘 알 수 있다. 김대통령은 “24시간 감시체제를 통해 한-미 양국은 북한의 움직임을 100%장악하고 있다. … 한-미 양국은 만일의 사태에도 대처할 수 있는 충분한 무력을 갖추고 있다”고 말한다. 그 후 6월 8일, 김영삼정권은 출범이후 첫 국가안보회의를 열고 예비군 동원태세, 국지전 대비태세, 심지어 전면전까지 상정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에 대해 북한의 ‘조국평화통일위원회’에서는 “제재는 곧 전쟁이며 전쟁에서는 자비가 없다. … 동족에 대한 제재 판을 벌여놓고도 자기만은 무사하리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라고 맞대응하고, 또한 참모총장 최광을 중국에 급히 파견하여 중국과의 ‘혈맹관계’를 과시하며 핵확산금지조약 탈퇴불사를 선언함으로써 전쟁위기는 더욱 커지게 된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던 것이다. ?바로 이 때, 이 긴박한 순간에 당시 평양을 방문 중이었던 카터 전대통령에게서 백악관으로 북한과의 중재가 이루어졌다는 내용의 전화가 온 것이다. 단 수 분이 지체되었더라도 한반도는 전장으로 변해버렸을 다급한 상황이었다. 극적으로 한반도는 포화의 그늘에서 비켜갈 수 있었다. 2003년 北, 핵을 무기로 벼랑끝 전술 구사 아슬아슬하게 지난 1994년 한반도는 전쟁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지난 해부터 서서히 그 때의 악몽이 되살아나고 있다. 지난 2002년 10월 북한이 핵개발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시인한 후 올 4월 베이징 3자회담에서 북한이 핵을 보유하고 있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함으로써 한반도는 또다시 전쟁 공포에 휩싸이게 된 것이다. 이러한 공포는 악화된 경제 상황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단지 북한이 핵보유를 선언하였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정도의 파장을 몰고 올 정도이니 만일 미국에 의한 북한 폭격이 개시라도 된다면 그야말로 한국 경제는 초토화상태에 들어가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북핵 문제가 경제적으로도 남한 정부를 압박하는 것이다. 우리 정부는 이러한 북한의 핵보유 선언 이후에도 북한 핵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계속해서 주장해 왔다. 이라크전에 파병해 달라는 미국 정부의 요청에 국내·외의 강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우리 정부가 호응한 것도 결국 북한 핵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는데 미국이 합의를 이끌어내기 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우리 정부의 이러한 평화적 해결 노력(?)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대북 인식은 별반 달라진 것이 없다. 한편, 북한은 핵보유 발표를 통해 대미 협상을 이끌어내려 하고 있다. 북한은 남한과 미국의 관계, 주변 정세로 보건대 미국이 군사적 공격을 자신들에게 가해오기가 상당히 힘들 것이라고 판단하여 이른바 ‘벼랑끝 전술’을 구사하기까지 된 것이다. 미국이 그토록 우려해오던 북한의 핵보유가 기정 사실이 되었으므로 이를 바탕으로 북한은 미국과의 포괄적 협상을 통해 체제 안정을 도모하면서 경제적 이익을 극대화할려고 한 것이다. 결국 북·중·미 3자회담은 3일간의 일정임에도 불구하고 이틀만에 회담이 중단되어 버리는 사태에 빠지게 되었고 한반도는 지난 1994년에 이은 2차 핵위기에 봉착하게 된 것이다. 북의 핵보유 ‘說’이 아닌 사실이 되다 1994년에 이은 2번째 한반도 핵위기. 하지만 이 두 위기 사이에는 분명히 차이점이 존재한다. 1994년 북핵위기 당시 클린턴 행정부 국방장관이었던 윌리엄 페리 스탠포드대 안보협력센터 선임연구원과 당시 북핵전담 대사였던 로버트 갈루치 조지타운대 외교대학원장은 모두 1994년의 위기보다 현재의 위기가 더 위협적이고, 심각하다고 지적했다. 10년전과 달리 현재 북한은 핵보유를 시인한데다 폐연료봉의 플루 토늄추출을 시작했다고 주장하고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미 북한은 1∼2기의 핵을 보유하고 있다고 국제적으로 인정되고 있을 수준이다. 더구나 빌 클린턴 당시 미대통령은 대화와 압박을 병용했지만 부시대통령은 대화에 대해 부정적이며, 북한의 경우 김정일위원장은 김일성 전 주석에 비해 예측가능성이 더 떨어진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핵위기를 대하는 한국 정부의 태도도 94년도와는 차이가 있다. 94년도 당시에는 북한과의 일전마저 불사할 정도로(한 육군 장성은 이 시기에 전면전을 통한 북한과의 무력통일을 해야한다는 발언을 하기도 하였다.) 호전적인 태도였이었는데 반해 현재 정부는 평화적 태도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영향으로 지난 94년도때와는 달리 물건 사재기와 같은 사회적 혼란 상황도 발생하지 않고 있다. 공멸이냐, 공존이냐 현재의 상황으로 보건대, 남한을 대상으로 하여 북한이 핵공격을 감행할 것이라 생각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문제는 바로 핵으로 인해 고조되고 있는 한반도 내 전쟁 위기의 증폭이다. 지난 1994년 위기시 미국이 자체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미국 측이 선제공격을 감행하더라도 최소 5만 명 정도의 미군과 수십 만명의 한국군의 희생이 뒤따르게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 최근 미국이 서울 이북지역 주한 미군을 이남지역으로 옮기려는 것도 이러한 막대한 미군의 희생을 좀더 줄여보려는 계산에서 나온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확실한 것은 핵에 의해서든 재래식 무기에 의해서든 간에 한반도 내에서 전쟁이 터지게 된다면 결국 남·북한 모두 공멸의 길로 빠지게 된다는 점이다. 북한과 미국도 이 점을 잘 알고 있지만, 서로 다른 정치적 고려에 따라 긴장 분위기를 늦추지 않고 있다. 그러나 현재 벌어지고 있는 위기는 미국과 북한과의 타협이 없이는 해소되기 힘들 듯하다. 미국은 북한을 ‘악의 축’으로 몰아 북한에게 예방전 형태의 선제 공격마저 불사하겠다는 위협을?철회하고, 북한 역시 한 발 물러서서 남측을 대화 당사자로 인정하고, 핵문제의 평화적 해결에 힘을 쏟아야 할 것이다. 현실은 소설처럼 호락호락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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