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마리나이의 여름
홋카이도 북쪽에는 슈마리나이라는 조그마한 시골 마을이 있다. 삿포로에서 차로 세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에 인구 100명을 조금 넘고 가끔 곰도 나온다고 한다. 이곳으로 향하는 찻길 옆에는 메밀밭이 드넓게 펼쳐져 있는데 기자가 찾아간 8월초에는 때마침 메밀꽃들이 만발하여 허생원 심금을 울리는 듯 서정적인 인상을 주었다. 가까운 곳에는 근사한 노천 온천도 있고 여름철 휴가를 보내기에 딱 좋은 평화로운 시골이다. 물론 여느 시골처럼 밤에는 수많은 모기와 나방 및 각종 벌레들이 진주만 공습하듯 밀려오는 거 빼고. 홋카이도에서 지낸 기간은 8월 6일부터 11일. 위에서 소개한 낭만적인 풍경과 낮 최고 기온이 20도 정도에 불과한 사실만으로 비싼 돈 주고 피서 갔다왔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곳에서의 생활은 매일 삽으로 흙을 파내고 파낸 흙을 수레로 나르는 육체 노동이었다. 강제 징용된 노동자들의 유골을 발굴했고,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과 재일 한국인 사회의 슬픈 역사를 배우고 왔다. 에서 말이다. 한일 워크샵에서 동아시아 워크샵으로슈마리나이에는 우류(雨龍)댐이라는 일본내 9번째로 큰 댐이 있다. 1938년에서 1943년 전시체제 기간에 수력발전을 목적으로 건설되었다. 당시에는 동양최대의 댐이었다고 하며 인력이 최대로 동원되었을 때는 7천명에 달하였다고 하니 그 규모를 짐작할 만 하다. 이 때 동원된 인부들은 일본 하류계급의 노동자(타코베야 노동자)와 조선인 노동자들이 절대 다수를 차지했다. 이들은 ‘건더기 없는 된장국, 콩과 옥수수가 섞인 밥 한 그릇’을 제공받고 철도공사장이나 댐공사장에서 하루 14시간이상의 노동을 강요당했다. 구타와 잦은 폭행, 위험한 사고와 질병들로 인해 그들은 무수히 희생되었으며 이 희생자들에게는 보상과 사과는커녕 사후에 편히 쉴 수 있는 조그마한 땅 뙈기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악명 높았던 이 공사가 끝나고 40년이 넘는 세월이 흐른 뒤 1976년 일본의 민중사학자들과 종교인들(‘소라치의 민중사를 이야기하는 모임’)에 의해 희생자들에 대한 조사가 시작되어 1980년부터 1983년까지 16구의 유골이 잡초가 무성한 땅 밑에서 발굴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1997년 한국의 인류학자들과 뜻 있는 청년들이 합류해 한일 공동으로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유골 발굴 작업을 시작하게 된다. 이것이 1997년 여름에 이루어졌던 첫 한일 공동 워크샵이며 그 때부터 매년 양국간의 젊은이들이 한국 또는 일본에서 모임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 워크샵은 97년의 유골발굴을 시작으로 매년 양국간의 아픈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재일 동포 문제, 위안부 문제, 주한미군과 주일미군 문제 등 인권과 평화를 주제로 많은 젊은이들이 한자리에 모여 서로를 이해하는 장을 마련하여 주었다. 올해부터는 문제의식의 폭을 동아시아로 확장한다는 뜻으로 에서 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희생자 유골발굴을 중심으로 재일 조선인들의 삶, 홋카이도 선주민 아이누 족의 문화, 역사 교육, 야우스베츠 미군 기지 문제 등을 주제로 삼아 140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 8월 4일부터 12일까지 개최되었다. 기자는 불가피한 사정으로 6일부터 11일까지밖에 참여하지 못했음을 미리 밝힌다. 삿포로에서의 이틀 이번 워크샵은 4일부터 7일까지 앞서 말했던 역사 교육, 재일 조선인, 아이누 등의 분과별 모임을 가진 후 8일부터 12일까지 참가자 전원이 유골발굴 작업에 참여하는 일정이었다. 따라서 6일 오후부터 합류한 기자는 당초 신청했던 재일 조선인 분과의 일부분에만 참여하여 전체의 자세한 내용은 다루기 힘들다. 다만, 6일 저녁의 역사 교과서 왜곡 문제 토론회와 7일에 있었던 민족학교 학생 및 교사와의 교류회에 대해서만 소개하고자 한다. 6일 저녁에 있었던 역사 교과서 관련 토론회는 일본인들에 대해 가지고 있던 인식에 상당한 충격을 주었다. 교과서 채택이 끝난 지금에 와서 덧붙이는 말이 필요할 지 모르겠지만 1%도 안 되는 왜곡 교과서 채택 결과를 이미 그 때 감지했다. 역사 교육 토론회에서는 왜곡 교과서에 대해 강한 비판을 했으며 일본내 언론사들도 열기 띤 취재를 하였다. 국내 언론들의 평소 보도를 접하면 일본인들의 대부분이 우경화 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지만 일본 내 우익 세력은 소수다. 다만 조직화가 잘 되어 있어 언론 플레이와 이벤트에 능할 뿐이다. 사실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큰 관심 없이 ‘역사 왜곡은 나쁘다’정도의 기본적인 인식은 가지고 있으며 오히려 일본내 진보 세력의 움직임도 활발히 전개되고 있다. 일본측 참가자 오노 마꼬또씨는 “과거 역사를 제대로 알고 후세에 알려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실제로 기자는 8월 15일 동경 시내에서 야스쿠니 신사 참배와 교과서 왜곡에 항의하는 ‘평화 유족회’등 300여명의 시위행렬이 시내를 돌며 집회를 여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 그리고 7일에는 일본내의 민족학교 교사와 학생들과 함께 야외에서 불고기를 구워먹으며 대화를 나누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일본 내에서 한국인임을 떳떳이 드러내며 정체성 있는 교육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일본 사회 내에서의 많은 차별들을 감수해야 한다. 남한 쪽은 이들에 대해 전혀 지원하지 않는다. 이들은 모두 북한을 지지하는 총련계의 학교이며 총련의 지원 아래 민족 정체성을 견지하는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학교 건물에는 ‘김일성 대원수님 만세’등의 간판이 걸려있고 어려서부터 북한에서처럼 주체 사상 등의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현실과 거리감 있는 운영 때문일까. 학생들의 연령대가 낮아질수록 지원자수가 줄어들고 있는 데다 재정상의 어려움도 겹쳐 운영에 어려움이 크다고 한다. 비록 교육 내용 전체에 동의할 수는 없지만 뜻 있는 민족 교육이 힘겨워하는 모습을 보며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다. 이 민족학교 학생들 중에는 유골발굴 작업까지 함께 참가한 대학생들도 있었으며 한국어와 일어 둘 다 구사할 수 있어 통역 일까지 맡아주었다. 이들에 대한 이야기는 따로 하기로 한다. 슈마리나이에서의 나흘 7일 밤 모든 참가자들은 슈마리나이로 이동했다. 8일부터 전원이 발굴 작업에 참여해야했기 때문이다. 이후 11일까지 모든 참가자들은 정말 열심히 ‘삽질’을 하며 흙을 퍼냈고 발굴에 수반되는 모든 작업을 성실히 해냈다. 어떤 날은 작업이 끝난 저녁에 근처의 노천온천에서 피로를 풀기도 했고, 밤에는 역사 교육에 대한 강연이나 다큐멘터리 영화 상영도 이루어졌었다. 텐트에서 자야하는 야영 생활이었으므로 집처럼 편안하지는 않았지만 참가자들을 몇 개의 작업반으로 나누어 식사와 청소까지 분담하는 공동체 생활은 무척이나 매혹적이었다. 무엇보다도 일본인, 재일 동포들과 대화만이 아닌 일상을 함께 하면서 서로를 이해하는 과정은 어떠한 접근보다도 더 자연스럽고 효과적이지 않았나 생각된다. 유골은 9일부터 발견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시신이 묻힌 부분 위의 흙의 색깔은 보통의 흙보다 더 진하다. 일반 참가자들이 삽으로 땅을 파다가 토양의 색이 다르다 싶으면 인류학과 고고학을 연구하는 전문가들이 조그마한 끌과 각종 도구로 조심스레 파들어 가면서 유골을 발굴하는 것이다. 6개의 팀이 팀별로 구덩이 하나씩을 파들어 가다 2 팀이 작업하던 구덩이에서 50센티쯤 파들어간 층에서 9일과 10일에 발견 징후가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조심스런 작업 결과 여러 곳에서 유골들이 흩어진 상태로 발굴되었다. 발굴된 유골은 최소 3구. ‘최소’라는 단서를 붙인 이유는 서로 조합이 맞지 않는 뼈들이 나왔기 때문이다. 파손된 채로 발굴된 두개골, 그와 맞지 않는 하악골, 또 몇 개의 다른 이빨들이 섞여 나온 것이다. 따라서 모두 각기 다른 사람의 뼈이며 동시에 집단 매장된 것으로 추정된다. 온전히 발굴된 것은 1구, 그나마 웅크린 채로 목곽에 담겨져 있었다. 유골이 발견되면 모든 참가자들은 작업을 멈추고 잠시 간단한 제례를 지냈다. 일본식으로, 한국식으로, 선주민 아이누족의 풍습으로. 발굴된 유골이 어느 나라 사람인 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금까지 위패조사로 밝혀진 희생자 204명중 한국인은 36명이었다. 창씨개명을 짐작하면 한국인의 비율이 높아질 수도 있지만 일본의 민중도 과거 저질러졌던 만행에 희생되었음을 알 수 있다. (표참조) 8월 15일 MBC 아침 뉴스에서는 마치 강제 징용된 조선인 노동자들만의 유해를 한일 청년들이 발굴하는 것처럼 보도되었지만 그것은 워크샵의 의의를 다소 국한시키는 보도이다. 조선대학생 정 모양은 “일본인 노동자들도 과거 희생되었으며 (일본인 참가자들이) 선조들의 과오를 함께 기억하려는 의지를 보였다”고 말했다. 발굴 작업은 11일 낮에서야 종료되었다. 유골을 수습하고, 지름4미터 높이 1.5미터 가량의희생자 위령 가묘도 잔디까지 입혀 완성했다. 그리고 저녁에는 추도식이 거행되었는데 아쉽게도 다음날 도쿄로 이동하는 관계로 식이 진행되는 것을 다 보지 못하고 삿포로로 이동해야 했다. 참가자들의 말에 따르면 11일 밤에는 뒷풀이, 12일에는 정리작업과 폐회식이 있었다고 한다. 지면상 모두 실을 수는 없지만 함께 참가했던 일본 청년 및 교포 청년들과의 공동 생활도 유골발굴 작업 못지 않은 귀중한 체험이었다. 서로를 이해하는 기회가 되어 ‘과거를 마음에 새기고 현재를 몸으로 느끼며 미래를 함께 열어가자는’ 워크샵의 취지를 받쳐주었다. 소라치 민중사 강좌 회장인 도노히라 선생과 한양대 정병호 교수는 “정치 현실에 좌우되지 않는 청년들의 교류가 세상을 바꾼다”고 말했다. 정녕 ‘가해자의 무관심과 피해자의 분노의 벽’을 넘어 건강한 미래를 함께 건설할 수 있는 친구가 되어야함을 느낀 5박6일의 시간이었다. 워크샵에서 만난 조선대학교 학생들 한국어와 일본어를 모두 구사할 수 있다는 이유로 행사 기간 내내 통역 일을 떠맡아야 했었던 교포 청년 중에는 조선대를 다니는 학생이 많았다. 전세계 어디에도 외국인이 자국의 교포를 위해 대학을 세우는 일은 없다. 더구나 북일 수교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볼 때 눈길이 가지 않을 수 없다. 현재 일본에서는 총련 산하에 140 여개의 민족학교가 있다고 한다. 초중고교가 한 학교에 모두 있는 경우도 있으니 초중고교가 각각 몇 개나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대학교는 딱 하나 동경에 위치해 있다. 이름하여 ‘조선대학교’, 1956년에 창립되었다고 하니 적지 않은 역사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물론 북한의 지원으로 세워진 학교인 만큼 전적으로 북한식으로 교육하고 있다. 정치경제학, 경영학, 외국어, 교육학, 체육학, 이공학, 문학등 7개의 학부가 있으며 전교생 약 1300여명이 모두 기숙사에서 생활한다. 학생들은 교포 3,4세가 대부분이라 일본어가 훨씬 익숙하지만 수업은 전과정이 한국어로 진행하기에 의사소통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다만 아쉬운 점은 이들을 자유로이 만날 수 없다. 이들은 총련계로 분류되기 때문에 북한주민으로 간주되어 이들을 만나기 위해서는 사전에 남북교류협력에관한법률 제9조제3항에 따라 정부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기자는 이들과의 접촉을 예상하지 못했으므로 사후 승인을 받아야 하는데 알고 보니 접촉 후 7일내에 신고해야 한단다. 그런데 이들을 만나고 6일 후에 귀국한데다 이들과 이데올로기적인 만남을 가진 것도 아니고 기자만 신고해야 하는 것인지 워크샵에 참가한 이들 모두 신고해야 하는 것인지 고민의 도미노 게임을 벌이다 이미 신고 기한은 지나가 버렸다. 혹시나 국보법 위반으로 구속되거든 독자들이 좀 나서서 구명 운동 해주시길 부탁한다. 전 착실한 대한민국 국민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