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시간이었습니다. 교수님께서는 한 장의 사진을 보여주셨습니다. 한 청년이 진흙탕에 주저앉아 울부짖고 있고 있는 사진이었습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 사진은 저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사진은 영화 의 한 장면이었습니다. 직접 그 상황을 영상으로 보면서, 그 청년의 억울한 심정이 제 가슴에 전해왔습니다. 차마 청년의 서러움을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기사로 이 사건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야겠다는 각오가 생겼습니다. 상계동 취재는 107호 기획회의 전부터 시작했습니다. 그만큼 저는 이 사건에 대해 매력을 느꼈고, 기사를 정말 ‘잘’ 쓰고 싶었습니다. 일단 영화 을 연출한 김동원 감독과의 인터뷰를 가졌습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학생의 신분으로 철거민 분들과 연락이 닿을 방법이 없다며 감독님께 그 분들과의 만남을 주선해달라고 부탁드렸습니다. 그러나 상계동 주민 분들은 아픈 기억을 되새기는 게 부담스럽다며 모두 인터뷰를 거부하셨습니다. 취재는 난항에 부딪쳤습니다. 가까스로 철거민 한 분과의 인터뷰가 성사됐습니다. 처음에는 이 분 역시 인터뷰를 거절하셨습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계속해서 부탁을 드렸고, 결국에는 마지못해 허락을 하셨습니다. 시흥에서 미나리 농사를 짓고 있던 아주머니였습니다. 인터뷰가 있던 날, 직접 시흥으로 찾아갔습니다. 버스정류장에서 내리자 멀리서 한 아주머니가 저에게 손을 흔들었습니다. 아주머니를 따라 갔습니다. 아주머니는 컨테이너 박스에서 살고 계셨습니다. 갈라진 손으로 종이컵에 믹스커피 한 잔을 타주셨습니다. 마음이 찡했습니다. 제가 그토록 상계동 기사에 집착했던 이유는 그분들의 입장을 ‘공감’했기 때문입니다. 상계동 강제철거는 한 마디로 가난하지만 성실하게 일하며 살아가던 그분들이 ‘국가이미지’에 타격을 입힐 수 있다며 국가가 빈민들의 희생을 요구한 사건입니다. 사건의 실상을 듣게 되면서 저는 상계동 주민들이 왜 돌을 들 수밖에 없었는지, 목숨을 잃어가며 지키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는지 조금씩 알 것 같았습니다. ‘공감’은 ‘이해’를 가져옵니다. 사람간의 관계에서 다툼이 생기고 갈등이 일어나는 것은 결국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공감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기사에서 언급했듯이 제2의 상계동 사건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어쩌면 영원히 멈추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제가 경험했던 ‘공감’의 힘을 믿어보려 합니다. ‘공감’할 수 있다면 멈출 수 있습니다. 상계동 강제철거사건이 역사 속에서 매우 ‘예외적인 사건’으로 인식될 그 날을 기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