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악 캠퍼스에는 슬픈 역사가 있어

잘 헤매는 사람이라도 자주 다니다 보면 지리에 익숙해지는 법.학교는 넓은데 길은 모르겠다고 걱정하는 새내기들이 안심해도 되는 이유가 있다.하지만 습관만으로 장소가 우리에게 의미로 다가올 수는 없다.익숙해진 공간은 사소한 풍경으로 전락하고 만다.곧 보게 되겠지만, 한때의 명소들은 30년 넘는 관악캠퍼스 역사에서 조금씩 잊혀가고 있다.

잘 헤매는 사람이라도 자주 다니다 보면 지리에 익숙해지는 법. 학교는 넓은데 길은 모르겠다고 걱정하는 새내기들이 안심해도 되는 이유가 있다. 하지만 습관만으로 장소가 우리에게 의미로 다가올 수는 없다. 익숙해진 공간은 사소한 풍경으로 전락하고 만다. 곧 보게 되겠지만, 한때의 명소들은 30년 넘는 관악캠퍼스 역사에서 조금씩 잊혀가고 있다. 누군가는 습관이나 익숙함과는 다른 방식으로 장소를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아크로폴리스아크로폴리스(아크로)는 중앙도서관과 행정관 사이에 있는 광장으로 학생운동과 축제의 중심지다. 특히 1980년대에는 집회 및 열사 추모제 등이 열리던 민주화 운동의 성지였다. 1980년 5월에 신군부의 비상계엄해제를 요구하며 열린 집회가 대표적이다. 당시에는 아크로에서 반정부 시위가 열리는 동안, 본부나 학생회관에서 학생이 항의성 자결을 감행하는 일도 벌어졌다.그런 아크로에도 위기가 찾아왔다. 특히 2000년대에 들어 ‘아크로 집회가 학업에 방해된다’는 학생들의 부정적 여론이 강해졌다. 2001년 열린 제45대 총학생회 선거 간담회에서는 이를 의식해 이에 대한 후보들의 의견을 묻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2006년 제49대 총학생회 선거에서 당선된 황라열 씨의 공약의 하나는 ‘도서관 앞 집회를 금지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일반 학생의 참여공간이라는 아크로의 성격은 약해졌다. 총학생회 선거철마다 후보의 연설 공간으로 쓰이고 있지만 몇몇 선본원을 제외하면 여기서 직접 연설을 듣는 유권자는 드물다.그럼에도 아크로는 학생 사회에서 상징성이 여전히 크다. 2003년에는 이라크 전쟁 및 파병반대 시위가, 2008년에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협상 요구 시위가 열려 아크로를 가득 메우는 학내 집회가 부활하기도 했다. 지난해 12월에는 법인화 반대 집회가 열리는 등 아크로는 저항 공간으로서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페다고지본래는 ‘교육학’이나 ‘교수법’을 의미하는 말로, 사범대 11동 앞에 위치한 공터다. 줄여서 ‘페다’라고도 한다. 노래패 공연이나 집회가 열리는 등 한때 활발한 자치활동을 했던 공간이었다. 2000년대 중반 전후부터 이용이 줄어들었다. 페다고지는 2009년 겨울에 시작된 교육정보관 신축공사로 훼손돼 사실상 폐쇄됐다.아고라사회대 앞에 위치한 자치공간이나 이 역시 과거에 비해 사용 빈도가 낮다. 본부는 지난해 9월, 아시아연구소 건설 공사와 사용 빈도의 미미함을 이유로 아고라에 철판을 세워 이를 일방적으로 폐쇄했다. 아고라가 선거유세와 장터 등의 행사 때마다 활용돼왔지만 과거에 비해 사용이 적은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사회대 학생회에서는 이러한 본부의 처사를 자치활동 탄압이라고 비판했다. 그런만큼 아고라는 자치공간으로서의 상징성이 강한 곳이다. 사회대에서는 아고라폐쇄반대 100인선언을 발표하는 등 학생들의 의견을 결집하는 운동을 벌여 대응했다. 약 2주간 폐쇄됐던 아고라는 학생과 학생처 간의 몇 차례 면담을 거쳐 다시 열리게 됐다. 당시 면담에서는 ‘본부가 폐쇄 범위를 공사에 필요한 최소한도로 축소하고, 2년 후 아고라 전체를 리모델링한다’는 내용이 합의됐다.이러한 반대 운동의 배경에는 아고라 문제를 페다고지 폐쇄 등 자치공간 축소의 연장이라고 생각한 일부 사회대생의 불안감이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해방터인문대 2동과 5동 사이에 위치한 공터이자 자치공간. 봄학기가 시작하기 전 신입생 환영회가 열릴 때면 반가를 부르는 등 단합의 장으로 이용된다. 대자보가 붙는 알림판이 있으며 축제 때마다 장터가 열린다. 해방터의 명물인 김밥 할머니는 ‘할매김밥’(할김)으로 유명하다.붉은 광장공대 간이식당 뒤편과 공대 건물들 사이에 있는 공터이자 휴식공간. 바닥이 붉은 벽돌로 돼 있어 붙은 이름으로 모스크바에 있는 ‘붉은 광장’과 이름이 같다.자하연인문대와 문화관 사이에 위치한 연못으로, 조선 후기 문인 신위의 호 자하(紫霞)에서 이름을 땄다. 자하연 주변 경관은 낙엽 색깔이나 물이 얼고 녹는 모습으로 캠퍼스 내 계절감의 변화를 잘 반영한다.버들골사범대 버스정류장 근처에 위치한 너른 잔디밭. 본래는 이병철 전 삼성회장의 사유지로 골프장으로 쓰였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유신반대운동 등 서울대생의 반정부 시위가 격화되자 버들골 부근에 서울대를 이전할 구상을 품게 됐다. 결국 서울대는 1975년 대학로에서 관악캠퍼스로 이전된다.아방궁인문대 1동과 2동 사이에 위치한 쉼터로, 벤치가 많다. 친목 도모를 위한 점심 모임이 자주 열린다.공대폭포제2광학천문대(45동) 옆에 위치한 폭포. 강우량이 많을 때면 특히 장관을 이룬다. 지난해 여름 폭우로 폭포 유량이 급증해 ‘서울대 나이아가라’라는 별칭이 붙으면서 화제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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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4월학생혁명기념탑 ②박종철추모비와 흉상 ③김세진·이재호 추모비 ④황정하 추모비 ⑤조성만 추모비

민주화의 길민주화운동을 기념하고 열사들을 기리는 교내 상징물들을 연결한 길로 2009년에 조성됐다.4월학생혁명기념탑두레문예관 앞 4·19공원에 있는 4월학생혁명기념탑은 민주화의 길에서 가장 대표적인 기념물이다. 1960년 4·19혁명 당시 서울대생은 경무대(지금의 청와대) 앞에서 경찰의 발포로 3명이 사망하는 등 총 7명이 총격으로 숨졌다.박종철 추모비와 흉상기초교육원과 중앙도서관 사이에는 박종철 열사의 추모비와 흉상이 있다. 박종철(언어 84)은 경찰에 연행돼 동료의 소재를 대라는 요구에 저항하다가 1987년 1월 사망했다. 경찰은 사망 원인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고 발표하며 책임을 부인했다. 이러한 해명은 많은 이들에게 터무니없는 변명이라는 조롱을 샀다. 이후 박종철의 사인이 물고문이었으며 경찰이 이 사실을 조직적으로 은폐했음이 밝혀지자 시민들의 분노가 고조됐다. 박종철의 죽음은 전두환 정부 퇴진과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는 6월항쟁의 기폭제가 됐다.김세진·이재호 추모비박종철 추모비와 흉상에서 멀지 않은, 인문대 2동과 중앙도서관 사이에서는 김세진·이재호 열사의 추모비를 찾아볼 수 있다. 김세진(미생물 83)과 이재호(정치 83)는 광주학살에 책임이 있는 전두환 정부가 미국과 결탁해 국민들을 탄압하고 있다고 인식했으며, 이에 저항하는 반전·반핵운동을 이끌기도 했다. 두 사람은 1986년 신림사거리에서 전방입소반대 시위 도중 전투경찰의 강경 진압 과정에서 분신해 사망했다. 전방입소란 당시 전두환 정부에서 민주화 시위를 억압하기 위해 학생운동 세력을 군에 강제로 입대시킨 일을 말한다.황정하 추모비1980년대 대학에는 ‘학생보다 경찰이 많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학생들의 활동을 감찰하는 경찰들이 여럿 상주했다. 심지어 도서관에도 경찰이 일상적으로 잠입해 학생들을 감시했다. 학내에서도 밖에서도 집회를 비밀리에 계획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황정하(도시공학 80)는 이런 가운데 중앙도서관 6층에서 전두환 대통령의 퇴진과 레이건 미대통령의 방한 저지를 요구하는 기습 시위를 벌였다. 황정하는 이를 제지하기 위해 달려드는 경찰들을 피하려다 추락사했다. 황정하 열사의 추모비는 공대 연못가에 있다.조성만 추모비6월항쟁을 계기로 한국 사회에는 비로소 민주주의가 찾아오는 듯했다. 하지만 1987년 대선에서 야권은 후보를 단일화하지 못하고 분열됐으며 쿠데타로 권력을 잡았던 노태우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진정한 민주화를 희망하던 학생운동 세력은 절망했다.중앙도서관과 자연대 21동 사이에 있는 ‘조국통일열사 조성만 추모비’는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에 저항한 조성만(화학 84) 열사를 기억하자는 의미에서 건립됐다. 조성만은 1988년 광주학살 진상규명과 노태우 대통령 처단, 올림픽 남북 공동 개최를 주장하며 명동성당에서 할복 자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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