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악 캠퍼스에는 슬픈 역사가 있어
평범함을 노래하는 김창완의 특별한 인생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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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함을 노래하는 김창완의 특별한 인생 이야기

환갑을 앞둔 나이지만 김창완 씨에게 인생은 아직도 즐길 것이 많은 놀이터와 같다.“술 시켜도 될까요?” 말 한마디에 정신을 차려보니, 브라운관에서 보던 연예인은 간데없고, ‘옆집 아저씨’처럼 친근한 웃음을 짓는 김창완 씨가 마주하고 있었다.인터뷰 내내 그는 재치 있는 말투와 소탈한 웃음과 함께 가슴에 닿는 충고를 건넸다.짧은 시간이었지만 그에게 인생의 진한 내음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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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갑을 앞둔 나이지만 김창완 씨에게 인생은 아직도 즐길 것이 많은 놀이터와 같다.

“술 시켜도 될까요?” 말 한마디에 정신을 차려보니, 브라운관에서 보던 연예인은 간데없고, ‘옆집 아저씨’처럼 친근한 웃음을 짓는 김창완 씨가 마주하고 있었다. 인터뷰 내내 그는 재치 있는 말투와 소탈한 웃음과 함께 가슴에 닿는 충고를 건넸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에게 인생의 진한 내음이 느껴졌다. 록 밴드 가수, 작곡가, 연기자, 영화배우, 작가, MC… 2011년 현재 데뷔 35주년을 맞은 그를 단 한마디로 정의하는 것은 무리가 있어 보인다. 불안을 사랑하기에, 항상 변화를 시도하는 것이 자신의 숙명이라는 그가 말하는 음악과 청춘을 들어봤다. 무심코 시작된 ‘개구쟁이’들의 시도, 록 음악의 새로운 획을 긋다 “어린 시절 자랐던 김포 벌판이 내 무대였어요.” 유년시절에 대한 질문에 김창완 씨는 이렇게 운을 뗐다. 1954년 경기도 김포시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집안 환경은 어려웠지만 행복한 시절을 보냈다. 매일 아침 놀아줄 친구와 마음껏 뛰놀 수 있는 햇살과 들판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늘 환경에 잘 적응하고 성실했기에 서울대학교 잠사학과(현 천연섬유학과)에 진학할 수 있었다. 학과 공부보다는 작곡과 밴드 활동에 관심이 많았던 김창완 씨는 동생 창훈·창익 씨와 ‘무이(無異)’라는 팀으로 제 1회 대학가요제에 출전해 예선 1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그가 졸업생이란 이유로 본선 진출이 좌절됐고 동생들이 학업에 전념하기로 하면서 대신 기념 음반을 만들기로 했다. 이것이 산울림의 1집 ‘아니 벌써’다. “취미로 만든 곡들이 의외의 좋은 반응을 얻게 되면서 음악 활동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게 됐다”는 그는 준비 중이던 은행 입사 시험을 포기하고, 본격적인 산울림 활동을 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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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울림 특유의 서정적인 음악과 김창완밴드의 실험적인 음악은 행복한 결합을 꿈꾸고 있다. ⓒ KBS ‘탑 밴드’

산울림의 등장은 당시 주류 음악 시장에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그들이 발표한 ‘아니 벌써’, ‘개구쟁이’, ‘꼬마야’,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 등의 곡들은 동요 같은 노랫말, 서정적인 사운드로 당시 서구 음악에 익숙해져있던 세대에게 색다른 미감을 느끼게 했다. 김창완 씨는 당시의 인기에 대해 “전문적인 음악교육을 받지 못한 탓에, 가공을 거치지 않은 순수한 형태로 대중에게 접근했고, 이것이 좋은 반응을 얻은게 아니었을까”라며 웃었다. 그 후 30여년 동안 산울림은 약 20장의 정규 음반을 통해 수많은 히트곡을 남기며 한국 록 밴드의 전설이 됐다. 그러나 2008년 멤버였던 막내 창익 씨가 갑작스런 사고로 세상을 떠나게 되면서, 산울림의 음반 활동은 위기를 맞았다. “더 이상 산울림의 이름으로 음악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그는 ‘김창완밴드’를 결성해 산울림으로부터 달아나려고 시도했다. 일부러 더 강렬하고 낯설게 음악을 만들었다. 그러다 올해가 돼서야 산울림의 음악으로 다시 돌아왔다. “동생의 죽음과 함께 산울림의 음악이 딱 끊어졌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산울림의 음악이 지금의 나와 함께 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죠.” 그는 옛 산울림 특유의 서정적인 음악과 현재 김창완밴드의 실험적인 음악 간의 행복한 결합을 꿈꾸고 있다.“불안을 사랑합니다.” 김창완 씨는 1985년 주제곡을 맡은 어린이날 특집 2부작 드라마 감독의 출연 권유를 받으면서 연기를 처음 접하게 됐다. 연기를 따로 배우진 않았지만 오랫동안 드라마 음악을 하면서 작품을 보는 눈이 길러졌고, 꾸준한 방송활동을 통해 얻은 노하우는 연기에 큰 도움이 됐다. 그는 , , 등 유수의 드라마에서 때로는 감초 역할을, 때로는 카리스마 있는 역할을 맡으면서 시청자들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다. 변화무쌍한 역할 수행과 연기력의 비결에 대해 그는 “어떤 역할에도 안주하지 않아 특정 역할에 대한 사람들의 선입견 자체가 없기 때문”이라며 “소탈한 커피집 주인에서 속물적인 의사로, 그러다가 또 친근한 직장 상사로 변신을 하니 사람들이 어떤 역할도 잘해낸다고 착각하는 거죠”라고 말했다. 한 곳에 머무르지 않는 성향은 그의 인생에서도 잘 드러난다. 작곡·작사·연주를 모두 소화하는 가수에서 현대극과 사극을 넘나드는 연기자, 영화배우로 폭을 넓혔다. 또한 음반 표지를 직접 그린 화가의 면모도 보였을 뿐 아니라, 산문집 ‘이제야 보이네’의 작가, 라디오 DJ, MC로도 활동해왔다. 경계 없이 영역을 확장해가는 것에 대해 그는 “불안을 사랑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늘 안정된 현실에 머무르지 않아요.”라고 답했다. 현재도 음반 활동과 함께 드라마 촬영과 라디오 DJ를 병행하며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다. 본인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에 김창완 씨는 “정체성이라는 건 내가 신경 써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라며 “나는 늘 남들에게 ‘누구’라고 인식되려는 순간 그 곳에서 벗어나려고 했어요”라고 말했다. 끊임 없는 실험정신과 자유로운 소통이 젊음의 비결 “학교를 다니고 학원을 다니고/ 대학을 나오고 직장엘 다녀도/ 아무것도 모르겠네 정말 모르겠네/ 한다고 하는데도 날이 가면 갈수록 점점 더/ … 언제 내가 어른이 돼버린 걸까/ 차라리 내가 사라져버리면 어떨까 지금/ 사라져라 사라져라.” 최근 발매된 김창완밴드 3집 ‘단 잇(Darn it)’의 가사다. 강렬한 리듬에 세상을 호통 치는 듯한 가사에 많은 청춘들은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김창완 씨는 “특별히 어떤 의도를 갖고 사회에 메시지를 전달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사회비판보다는 나 자신을 반성하는 거에요. 나의 무력함을 반성하고 다시 일어서기 위해 나약해지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거죠.” 이처럼 그는 스스로 무언가 가르침과 교훈을 주려는 기성세대가 되는 것을 거부한다. “청춘은 어른들을 기웃거릴 필요가 없어요. 스스로에게서 배워야 할 게 너무 많기 때문이에요.”라고 말한 그는 고민되고 힘든 상황이 와도 늘 남에게 의존하지 말고 스스로 헤쳐 나가야한다고 말했다. 그는 무거운 책임감과 압박감에 시달리는 청춘들에 대해서도 마음 놓고 어깨의 짐을 내려놓아보라고 조언한다. “대학을 졸업하고, 진로에 대해 고민하고, 때로는 고통스러워하면서 청춘은 성장합니다. 그 과정을 거치지 않은 사람은 세상에 어느 누구도 없어요. 난 청춘의 힘을 믿습니다.” 적지 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는 요즘도 홍익대학교 인근에서 한참 어린 크라잉넛·장기하와얼굴들 등 후배 밴드들과 어깨동무를 한 채 종종 술을 마신다. 또한 최근에는 알리, 크라잉넛, 이적 등의 후배들이 모여 헌정 앨범 ‘리본(Reborn) 산울림’을 제작하기도 했다. 연예계 대선배가 되었지만, 김창완 씨는 세대를 가리지 않고 젊은 후배들과 소통하고 있다. “술을 많이 사줘서 그런 것 아닐까요”하고 농담을 먼저 건넨 그는 “소통은 너와 나의 문제가 아니라 내 안의 문제라고 생각해요”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먼저 마음을 열고 접근하고, 남을 인정해야 남도 내게 다가올 수 있어요”라고 소통의 비결을 밝혔다. 최근 그는 신인뮤지션 지원 프로그램 ‘튠업’의 단장을 맡았다. 신인 뮤지션을 이끌고 대중 음악가들의 맞춤형 자원봉사 활동을 목표로 하고 있다. 튠업은 강릉 재래시장, 의정부교도소, 소록도, 대안학교에서 공연을 진행하고 있다. “뮤지션들이 시장에서 어부를, 복지기관에서 장애인을 만나면 얼마나 신선한 충격을 받겠어요. 후배들은 이 경험을 통해 대중으로부터 우러나는 ‘생음악’을 맛볼 수 있게 되겠죠.” 그는 음악가들에게는 새로운 음악 경험을, 관객에게는 무료 공연을 맛보게 함으로써 일석이조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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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날, 농업생명과학대학 강의실에서 김창완 씨가 서울대학생을 대상으로 강연을 진행했다. 젊음의 비결을 주제로 한 강연은 중간중간 그의 통기타 연주와 함께 훈훈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청춘, 스스로 아름다운 존재임을 자각해야 1977년 ‘산울림’의 등장은 하나의 사건이었다. 구어체 노랫말과 파격적 멜로디, 화려한 연주실력으로 무장한 3형제 밴드는 팝에만 열광하던 당대 젊은이들의 입맛을 하루아침에 바꿔놨다. 등장만큼이나 산울림의 행보 또한 거침없었다. 유행과 상업주의에 휘둘리지 않고, 그들이 하고 싶은 음악을 하며 대중들과 소통했다. , 는 충격적이고 상식에서 벗어난 그만의 발상이 가사에 잘 드러난 대표적인 곡들이다. 그는 “글이야 ‘아’ 다르고 ‘어’ 다르지만, 음악은 ‘아’ 다르고 ‘아’ 다릅니다”라며 음악에 대한 자신의 독특한 지론을 소개했다. 가장 직접적이면서도 말랑말랑하기 때문에 정해진 틀이 없다는 뜻이다. 때문에 그는 뮤지션으로서 이렇게 가사에서, 리듬에서 항상 새로움을 시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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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들여지지 않는 것이 예술가의 의무 아닐까요.” 김창완 씨의 세대와 장르를 가리지 않는 ‘무한도전’은 여전히 진행중이다.

데뷔 후 35년간 그는 가수로, 연기자로, MC로, 라디오DJ로 왕성한 활동을 해 왔다. 어떻게 많은 분야에서 한꺼번에 성공을 거둘 수 있었냐는 질문에 그는 “내가 무슨 성공을 했다고 그래요”하고 손사래를 저었다. 그는 “실패와 좌절을 드러내지 않는 탓에 상대적으로 그렇게 보이는 것”이라며 겸손한 태도를 보였다. 젊은 시절 그는 “내 인생을 내 스스로 도구화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돈과 명예, 심지어 수명과도 자신의 삶을 맞바꾸려 하지 않았다. “무언가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실패와 좌절도 두렵지 않습니다. 그것들도 내가 살아가는 삶의 과정이기 때문이죠”라고 자부하며 그는 소탈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청춘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냐는 질문에 그는 ‘장미 이야기’를 꺼냈다. “장미가 아름다운 건, 그 모습과 향기가 좋기 때문이지, 그것이 어떤 용도로 유용하게 쓰여지기 때문이 아니에요.” 그는 청춘도 다를 바 없다고 말한다. “청춘 역시 훌륭한 어른이 되기 위한 과정이기 때문에 소중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스스로 얼마나 아름다운 존재인지 알았으면 하는 게 내 바람입니다.” 늘 현실에 안주하지 않기 때문에 내일의 삶이 기다려진다는 김창완 씨. 희끗한 머리카락과 주름살에도 불구하고, 해맑게 이야기하는 그의 모습은 인생이라는 놀이터에서 맘껏 뛰놀고 있는 ‘개구쟁이’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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