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의 영역

한글자 한글자 글을 써내려가는 일은 무서운 일이다.글은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는 무기로도, 아픈 곳을 쓰담쓰담 해주는 약으로도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내가 쓰는 이 글이 에 실려 삼천부나 찍힌다는 생각을 하면, 마음이 저절로 무거워진다.내가 보지 못하는 독자들을 별 헤듯 세어보면 은하수처럼 넓은 세상이 어느새 눈에 들어온다.내가 쓰고 싶은 것을 찾노라면 세상이 한없이 넓어 보인다.

한글자 한글자 글을 써내려가는 일은 무서운 일이다. 글은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는 무기로도, 아픈 곳을 쓰담쓰담 해주는 약으로도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쓰는 이 글이 에 실려 삼천부나 찍힌다는 생각을 하면, 마음이 저절로 무거워진다. 내가 보지 못하는 독자들을 별 헤듯 세어보면 은하수처럼 넓은 세상이 어느새 눈에 들어온다. 내가 쓰고 싶은 것을 찾노라면 세상이 한없이 넓어 보인다. 이것도 쓰고 싶고 저것도 쓰고 싶고 세상에는 좋은 일도 많고 그만큼이나 아픈 사연도 많다. 내가 무엇을 택해서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얼굴도 알지 못할 누군가가 나에게 또는 소재가 된 그 사연의 주인공들에게 공감할 것을 생각하면 또다시 숙연해진다. 그러다보면 내가 무엇을 택하는지 고르느냐에 더욱 신중함을 기하게 되고, 어찌 보면 이도 하나의 권력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기자가 보는 것을 독자도 보게 된다. 기자가 외면하는 것을 독자는 볼 수 없다. 나는 어떤 것은 보여주고 어떤 것은 보여주지 않을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런 생각도 잠시 내가 가진 힘이라는 것이 너무나도 미약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내가 애써서 쓴 기사를 누군가 읽어주기는 할까. 이런 자괴감이 앞서기 시작하고, 마감에 쫓겨 서두른 기사가 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순식간에 풀이 죽는다. 내가 원했던 그것은 어느새 하나의 아스라이 사라져가는 이상(理想)이 되어버리고 허겁지겁 사실과 객관성만 주워 담으려는 얄팍한 기자정신만 남기 때문이다. 내가 독자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그 ‘세상’은 어느새 사라지고 아무도 공감할 수 없는 수치들만 남아서 외치고 있는 모양을 보면, 나의 부족한 능력에 비명을 지르고 싶어진다. 한글자 한글자 기사를 써내려가는 마음은 한없이 무겁다. 내가 애써서 내보이고자 했던 그 현실이 독자에게 얼마나 다가갈지 가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이 말을 옮기면 사람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내가 이 사진을 실으면 사람들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움직일까. 내가 이 수치를 제시하면 사람들이 심각성에 대해 조금이라도 공감할 수 있을까. 이런 저런 고민들에 휩싸이면 더 이상 기사를 쓸 수 없는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 시간은 나를 재촉하는데, 내가 써내려가는 기사는 나아가지 못하고 멈춰서있다. 그리고 타협하게 된다. 이제는 내가 나에게 공감하는 영역을 확장하려 노력한다. 내가 무슨 말을 쓰더라도 사람들은 공감공감열매를 먹은 것처럼 알아줄 거라는 생각으로 자기위안을 삼는다. 하지만 짧은 경험에 비추어 보건데 나의 말은 그렇게 큰 힘은 가지고 있지 못한 것 같다. 내 기사를 처음 읽어주는 부장님과 편집장님의 지적을 보고 있으면, 내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질 정도다. 내 의도는 오간데 없고 산으로 간 기사만 남아있다. 언제부터일까 나는 공감의 영역을 고민하게 됐다. 그리고 사실 지금도 그 고민은 여전하다. 내가 이렇게 글을 쓴다고 누군가 공감해줄 사람이 있을까. 잘 모르겠다. 나는 능숙한 기자가 아니니까. 그렇게 겨울이 지나면 무덤우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이름자 적힌 저널우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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