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도시 사업을 위해 문화공간이 사라졌다?

동대문운동장은 일부 사람들의 기억 속에만 존재한다.운동장에서는 크고 작은 스포츠행사가 열렸고, 운동장 내 풍물시장에는 만물과 사람들이 뒤섞여 시끌벅적한 분위기가 조성되곤 했다.하지만 현재 그 자리엔 거대한 복합문화시설인 동대문 디자인플라자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동대문운동장을 기억하는 체육•문화계 인사들과 노점 상인들은 과거를 떠올리며 인터뷰 내내 안타까운 심정을 드러냈다.

동대문운동장은 일부 사람들의 기억 속에만 존재한다. 운동장에서는 크고 작은 스포츠행사가 열렸고, 운동장 내 풍물시장에는 만물과 사람들이 뒤섞여 시끌벅적한 분위기가 조성되곤 했다. 하지만 현재 그 자리엔 거대한 복합문화시설인 동대문 디자인플라자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동대문운동장을 기억하는 체육•문화계 인사들과 노점 상인들은 과거를 떠올리며 인터뷰 내내 안타까운 심정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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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스포츠의 산실인 동대문운동장은 완벽히 자취를 감춘 채, 거대한 디자인플라자가 점차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80여년의 역사문화 공간이 불과 5일만에 와르르… 서울시는 2007년 초 ‘동대문 디자인플라자 & 파크’ 사업을 발표했다. 그 목표는 낙후된 동대문운동장을 허물고 그 자리에 각종 디자인 전시, 연구, 교육 기능을 갖춘 복합 문화단지를 조성해 세계 디자인 수도의 위상에 걸맞는 랜드마크를 조성하는 것이었다. 서울시는 이를 통해 “서울이 세계 5대 패션도시로 성장하게 될 것”이라고 선전했다. 또한 동대문 디자인플라자 건설 이후 우리나라 디자인 산업 경쟁력은 선진국의 80%수준에서 90% 수준으로, 국내 디자인 산업 매출액은 7조원에서 15조원으로 성장할 것으로 내다봤다. 한편 동대문운동장 일대의 관련 당사자들은 일방적인 사업 통보에 당혹감을 표했다. 동대문운동장은 1926년에 지어진 근대문화유산으로 한국 스포츠의 산실이자 역사적 기록물이다. 동시에 운동장 내에서 만물을 팔던 풍물시장의 상인들과 운동장 주변에서 운동용품을 판매하던 노점상에게는 삶의 터전이었다. 이들은 우선 충분한 합의과정이 이뤄지지 않은 점을 지적했다. 서울시는 한국야구위원회, 대한야구협회와의 상호양해각서만을 근거로 철거를 결정했다. 체육계와 문화단체, 노점상인 등 이해관계 당사자와 시민들의 의견 수렴과정은 전혀 거치지 않았다. 대선을 엿새 앞둔 2007년 12월 13일 오전, 서울시는 기습적으로 동대문운동장 철거를 강행했다. 새벽 5시 이뤄졌던 1차 철거시도는 밤샘농성을 벌였던 노점상들에 의해 저지됐지만, 용역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점심시간에 중장비를 동원한 2차 철거에 들어갔다. 결국 동대문운동장 외곽 관중석 일부가 허물어졌다. 당시 동대문운동장 내에서 신발을 판매했던 A 씨는 “직접적으로 관련 있는 풍물시장의 노점상단체와 문화체육단체들 중심으로 철거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냈지만, 중장비를 동원한 기습 철거를 막을 수는 없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결국 노점상단체와 문화체육단체는 대책위원회를 마련하고 기자회견을 통해 일방적이고 독단적인 행태를 보인 서울시를 규탄했다. 이들 중 일부는 해머와 절단기를 이용해 펜스를 뜯어내고 공사현장에 진입하기도 했다. 이주를 ‘결정당한’ 노점상인들 그러나 서울시는 이에 굴하지 않고 18일 공식적으로 철거 계획을 강행했다. 서울시는 “역사성과 장소성을 감안해 축구장의 조명탑 2기는 현지 보존하고 7개의 대체구장과 기념박물관을 짓겠다”고 밝혔다. 동대문운동장 주변 노점상들의 당장 시급한 생계대책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문화연대 활동가 지현 씨는 “용역과 중장비를 앞세우는데, 힘없는 노점상들이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느냐”며 “스포츠용품을 팔던 노점상들은 다른 구장 주변으로 옮기거나 장사를 그만두기도 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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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장 내 풍물시장에서 장사를 했던 임영희 씨는 “하루아침에 생계 터를 잃었지만 용역과 중장비에 떠밀려 외진 곳으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탄했다.

운동장 내 풍물시장 상인들의 상황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2007년 8월, 서울시는 주요 언론을 통해 “2008년 3월까지 풍물시장을 동대문구 신설동 옛 숭인여중 부지로 이주하는 것에 풍물시장 대표들과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이후 서울시는 “동대문운동장 철거가 발표된 뒤 불거졌던 노점상들과의 갈등이 해결됐다”며 사업 추진에 무리가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정작 상인들의 입장은 달랐다. 신설동 풍물시장에서 잡화를 판매하는 B 씨는 “대표들이 이전에 합의했다지만 전체 의견수렴이나 찬반 투표가 이뤄지지 않아 상인들의 의사가 불확실한 상태였다”고 말했다. 당시 신설동 부지는 상권이 발달돼 있지 않았고 오랜 세월동안 일궈온 삶의 터전을 떠난다는 것은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또한 당시 동대문운동장 풍물시장 내에는 2003년 청계천 복원사업 때 이주한 천여 명의 노점상이 입주해 있었다. 이들은 서울시의 철거 강행에 휘말려 내쫓기듯 이주를 결정했다. 청계천 황학동 도깨비시장에서 동대문운동장으로, 그리고 신설동 풍물시장으로 자리를 5년 사이에 두 번이나 옮겨야했던 것이다. 30여 년 동안 가방류 잡화를 판매해온 임영희 씨는 “하루하루 생계를 유지해야하는 처지에서 상인들은 길게 투쟁할 여력이 없었다”며 “이주 결정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고 한탄했다. 서울시는 신설동 풍물시장을 새로 개장하면서 지상 2층의 건물 부지에 100억 원의 예산을 투입해 국내외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세계적인 명소로 개발하겠다는 목표를 내걸었다. 그러나 졸속으로 추진된 풍물시장은 2011년 사람들이 찾지 않는 애물단지로 전락했다. 서울시 경영진흥원에 따르면 시설 유지, 보수, 홍보 활동 명목으로 예산이 50억 가량 추가 투입됐다. 하지만 현재 하루 점포당 방문객 수는 5.98명에 불과하다. 임 씨는 “이곳으로 이전한 이후 매출이 3분의 1 수준으로 크게 줄었다”며 “이주를 했지만 애초에 자본금이 부족해 점포를 개시하지도 못하고 망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탄했다. 폐장시간이 한참 남았는데도 일찍 점포 문을 닫는 상인들도 많았다. B 씨는 “지리적 접근성이 떨어져 이곳을 찾는 고객들의 발걸음이 끊겼다”며 “언론보도나 겉치레 홍보가 아닌 실질적인 대비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스포츠사와 역사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곳을…” 2007년 8월 28일, 50여 년의 역사를 지닌 동대문야구장은 전국대학야구대회 결승전을 끝으로 문을 닫았다. 1926년 준공된 동대문축구장 역시 얼마 후 폐장했다. 이에 체육계는 ‘동대문운동장 보존을 위한 스포츠인 100인 선언’을 통해 강력히 반발했다. 그들은 기자회견을 통해 “동대문운동장은 건립 이후 야구, 축구, 육상, 수영 등 모든 경기가 열린 한국스포츠의 산실”이라며 “국내외에서 활약한 대부분의 스포츠 영웅들 중 이곳을 거치지 않은 선수가 거의 없을 정도로 한국 스포츠사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곳”이라고 강조했다. 서울대 야구부 이광환 감독 역시 이곳을 거친 산 증인이다. 이 감독은 중, 고등학교 시절부터 대학교, 실업팀에 있기까지 오랜 세월동안 동대문운동장에서 선수와 코치생활을 해왔다. 철거 당시 비상대책위원회의 회원으로 활동했던 이 감독은 “나와 선후배들의 땀이 배어있는 동대문운동장이 철거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며 “지금도 동대문운동장 근처를 지날 때마다 속이 터진다”고 안타까워했다. 체육시민연대 이병수 전 사무차장은 당시 성명서를 통해 “동대문운동장 철거는 한국 스포츠의 역사를 말살시키는 행위”라며 “시민과 스포츠인들이 제시하는 대안을 반영해 보수, 개량의 절차를 걸치면 스포츠 역사와 편의성을 동시에 갖출 수 있다”고 강조했다. 서울시는 동대문운동장이 ‘일제의 잔재’이기 때문에 언젠가 청산해야할 시설이라는 논리를 내세우기도 했다. 실제로 동대문운동장은 1926년 일본 왕자의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일제에 의해 경성운동장이라는 명칭으로 건립됐다. 하지만 문화체육단체들은 “동대문운동장과 같은 시설물들을 보존하는 것은 기념이 목적이 아니고 역사 기록의 일환”이라고 반박했다. 문화연대의 지현 씨는 “동대문운동장은 근대 스포츠 경기 뿐 아니라 중요한 국가적 행사가 열렸던 문화유산”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동대문운동장은 식민지 조선인들의 울분을 달래주던 곳이었고 해방 후에도 각종 집회와 많은 사건들이 일어난 역사적 현장이다. 2007년 8월, 노후화된 동대문운동장의 철거를 위해 서울시는 대체구장과 기념박물관을 지어주는 조건으로 한국야구위원회(KBO), 대한야구협회와의 상호양해각서 체결을 맺었다. 서울시는 이를 강조하며 철거를 위한 필요충분조건을 갖췄다는 입장을 보였다. 하지만, 당시 문화연대는 성명서를 통해 “서울시는 동대문운동장이 시민들의 것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전제한 후 공간의 공공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문화적 감수성과 역사성을 무시한 서울시의 신개발주의 정책을 비판했다. 동대문운동장이 커다란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지닌 것인만큼 문화단체와 시민들과의 사전 합의가 이뤄져야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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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고 작은 스포츠 경기를 치러온 운동장과 만물과 사람들이 뒤섞여 시끌벅적했던 풍물시장은 작은 기념관 진열대 한 편에서 애처롭게 박제돼 있을 뿐이었다.

사람들의 기억속에서도 철거당한 동대문운동장 운동장 부지 위에 공사가 진행 중인 동대문디자인플라자는 2013년 4월 개장을 목표로 하고 있다. 동대문디자인플라자는 지하 3층에서 지상 4층 규모의 디자인 중심 미래형 공원으로 전시 컨벤션홀, 디자인박물관, 전시관, 체험관, 정보교육센터 등으로 쓰일 예정이다. 디자인플라자홍보관에서는 이곳이 지닐 경제적,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강조하며 디자인수도 서울의 상징이 될 것이라 자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올해 무상급식 투표 무산에 책임을 지고 사임하면서 ‘동대문디자인플라자 & 파크 사업’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한강 르네상스, 디자인 거리를 비롯한 디자인 서울 프로젝트에 대해 서울시장 예비 후보들이 하나같이 전면 재검토하겠다고 발표했기 때문이다. 문화연대 지현 씨는 “디자인플라자가 전임 시장의 과오로 인식되면서 사업 자체가 존립 위기를 맞았다”며 “삶의 총체적 양식인 문화를 지나치게 경제적으로 인식한 서울시의 개발 논리가 한계를 드러낸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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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사임하면서 동대문디자인플라자 사업을 비롯한 디자인서울프로젝트는 존립 위기를 맞았다.

공사현장 옆 디자인플라자홍보관에 놀러온 학생들은 기념촬영을 하며 서울시의 디자인 프로젝트에 큰 관심을 보였다. 과거 운동장의 기억을 회상하며 한숨과 안타까움으로 가득했던 이해당사자들과의 모습과는 대조적이었다. 지현 씨는 “가장 큰 문제는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지닌 문화유산들이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점차 잊혀져간다는 것이다”며 “과거를 허물어 그 위에 현재를 만들고, 미래의 기반을 다진다는 것이 과연 의미있는 일인가 의문이 든다”고 덧붙였다. 현재 동대문운동장의 흔적들은 박물관의 한 구석으로 완벽히 자취를 감췄다. 그 자리에는 응원과 환호 대신 거대한 조형물과 공사 소음만이 남아있다. 동대문운동장역은 동대문역사문화공원 역이라는 이름으로 개명됐다. 근현대문화를 보존하자는 시민사회단체의 목소리와 생존권을 걸고 맞선 노점상들의 목소리 역시 동대문운동장과 함께 우리의 기억 속에서 점차 희미해져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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