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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가처치가의 상징적 영향력은 막대하다. 메가처치는 이미 롤모델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
오랫동안 한국사회에서 종교문제는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금단의 영역이있다. 특히나 세력이 큰 기독교에 대해 비판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다. d요즘 들어서야 각종 공중파 방송과 언론에서 기독교 사회의 문제를 지적하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사랑의 교회 신축 문제로 초대형교회(메가처치)에 대한 논란이 점화됐다. 메가처치는 단순히 물질적 ‘규모’가 커서 문제인 것이 아니라 한국 기독교 사회의 내부적 문제를 한꺼번에 보여주는 거대한 전시장 같은 존재다. 이러한 메가처치의 문제를 묻기 위해 <메가처치 논박>의 저자 신광은 목사를 만났다. 신광은 목사는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학과 신학을 전공한 후 동 대학원에서 박사 과정을 수료했고 지금은 열음터 교회에서 목회활동을 하고 있다. 2009년에는 그동안 그가 진보적 기독교 신문 뉴스앤조이에 연재했던 글을 모아 <메가처치 논박>이라는 책을 출간하기도 했다.메가처치가 지칭하는 교회는 무엇인가? 단순히 ‘크기’가 큰 교회를 지칭하는가? 통상적으로는 신도수가 3000명 정도를 넘어서면 메가처치라고 부른다. 그러한 큰 교회가 한두 개에 그쳤다면 메가처치란 말을 따로 쓰지 않았을 것이다. 메가처치가 하나의 사회적 현상이 돼버린 것을 얘기하기 위해 메가처치 현상이라는 말을 썼다. 메가처치 현상이 팽배해지면서 모든 교회는 양적 성장을 지향하게 됐다. 메가처치를 지향하는 모든 교회는 크기가 작을 뿐이지 메가처치나 다름없다. 한국에 기독교가 들어오자마자 처음부터 메가처치가 생긴 것은 아니다. 어떻게 요즘과 같은 메가처치들이 발생하게 됐나. 한국적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개별교회의 힘이 강해지게 한 ‘개교회주의’다. 60년대 이후로 교단이 워낙 많이 분열돼서 교단의 힘이 약해지고 개별교회에 대한 지원도 약해졌다. 그만큼 교단의 힘이 약해지다보니 개별교회의 힘이 독자적으로 강해졌다. 개교회주의가 강해지는 동시에 한국교회는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빠르게 성장했고 수적으로 팽창했다. 교회의 수가 늘고 개별교회의 힘이 강해져 통합력이 약해지자 경쟁이 심화됐다. 교회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경쟁하지 않으면 안 되고 그러다보면 성장해야한다. 이렇게 성장을 지향하다보니 거대한 교회가 생겨났다. 또 중요한 것은 80년대다. 그 이전에도 메가처치라고 할만한 교회가 없던 것은 아니다. 그런데 그때는 목회자들이 큰 교회를 보면서 ‘대단하다’, ‘특별하다’라고 생각하는 데에 그쳤다. 80년대 이후로 여러 건강한 교회들이 크게 성장했다. 그러다보니 교회 지도자 사이에서 ‘건강한 교회라면 어떤 교회라도 크게 성장할 수 있다’는 담론이 형성됐다. ‘성장하지 못한 교회는 건강하지 못한 교회’라는 역의 논리도 세워졌다. 이전에는 부산물처럼 성장이 따라왔다면 이제는 성장 그 자체가 목표가 됐다. 교회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람을 끌어들이는 형태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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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가처치 문제를 지적하면 목회에 성공하지 못한 사람의 시기어린 푸념정도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
메가처치의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폐해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가장 큰 문제는 교회가 본연의 사명을 혼돈하게 됐다는 점이다. 교회 본연의 사명은 그리스도의 구원을 증거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구원은 사람을 살리는 일이다. ‘죽어서 천당가느냐’하는 문제가 전부가 아니다. 절망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살려주고, 자살하려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빵과 옷을 주는 등 실제로 사람들을 살리는 일을 하는 것이 그 본연이다. 하지만 메가처치는 그러한 사명을 사람을 끌어 모으는 것으로 변질시켰다. 결국 사람을 모으기 위해 쓰는 수단과 방법은 모두 정당화된다. 예배당을 크게 짓는 것도 죽은 영혼을 살리는 일이고 그것은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키는 위함이니 정당화된다. 결국 실제로 사람을 살려야하는 복음이 비즈니스가 됐다. 메가처치가 들어서면 주변의 작은 교회들이 고사할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나는 사실 이 문제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왜냐하면 교회가 이미 서로 교인들을 빼앗아 경쟁하는 구도 안에 들어온 것이 이러한 문제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메가처치가 생기지 않는다고 이런런 현상이 없어지느냐? 아니다. 문제의 핵심은 이미 교회 공동체가 찢어져 경쟁 구도에 들어섰다는 점이다. 현재 한국에서 각 개별 교회는 서로 아예 다른 교회다. 다를 뿐만 아니라 경쟁한다. 나름대로 카르텔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기본적으로는 적대관계다. 오죽하면 교회 매매사이트에서 중요한 상품조건이 ‘주변에 교회 없음’이겠는가. 이런 상황에서 ‘메가처치가 들어서면 주변 교회가 다 고사당한다’는 말은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진 상태에서 마지막 단추가 잘못 끼워졌다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렇다면 어떤 해결책이 있다고 보는가? 물론 내 나름대로 생각하는 대안이 있고 그에 따라서 열음터교회를 목회하려고 하고는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메가처치에 대한 문제의식 자체가 자리 잡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대안은 무엇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시기상조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일은 메가처치를 문제의식으로 삼는 것이다 . 한국 교회 내에서 ‘메가처치가 문제다, 한국교회를 병들게 하고 있다’라는 문제의식이 자리 잡으면 그것을 가지고 논의를 시작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다양한 대안이 나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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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 완공된 메가처치 사진 or 진보적 기독교 쪽 포럼이나 회의사진 or 메가처치논박 책사진 |
최근 사랑의 교회 신축 문제로 말이 많다. 사랑의 교회의 메가처치로의 변화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사랑의 교회는 옥한흠 목사 시절 제자육성에 힘쓰는 등 건강한 교회의 표본이었다. 그 사랑의 교회가 옥한흠 목사의 후임목사로 오정현 목사가 들어오면서 규모가 더욱 커지고 이번에 새 교회건물 신축을 하려한다. 건강한 교회로 평가받던 교회가 메가처치로 성장하자 많은 목회자들이 ‘건강한 교회면 크게 성장한다’는 담론을 다시금 공고히하게 됐다. 옥한흠 목사님은 개인적으로 매우 존경하는 분이고 신학적으로나 도덕적으로 굉장히 탁월하신 분이다. 그러나 그분이 메가처치 문제에 대해서는 나이브하셨다. 옥 목사님이 목회하실 때 교회 내에서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그러나 교회가 메가처치로 한번 커버리면 그 커져버린 교회는 목사 개인의 의지대로가 아니라 스스로 굴러간다. 즉 한 개인이 컨트롤할 수 없는 것이다. 그분도 ‘교회를 너무 키워버린 것이 아닌가’하는 인터뷰를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오정현 목사의 메가처치 체제로 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똑같은 배에 옥 목사님이 맨 뒤에 서있었다면 오 목사는 맨 앞에 서 있는 것이다. 메가처치 현상에 대해서 구조적으로 예리하고 심각한 문제의식을 갖지 않는 한 개인적으로 아무리 탁월하더라도 현 상황을 역전시거나 도움이 될만한 영향력을 만들기는 어렵다. 기독교 사회 내에서 메가처치에 대한 비판적 토양은 갖춰졌는가? 우선 기본적인 정서 자체는 상당히 공감하고 있다. ‘교회가 너무 커졌다. 이거 문제 아닌가’하는 생각들은 한다. 일반 사회인들이 갖는 문제의식 못지않게 기독교 사회 내에서도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 그런데 그것이 막연하고 비과학적인 느낌에 그칠 뿐이다. 교리적으로나 사회과학적으로 혹은 역사적으로 등 구체적 근거를 가지고 무엇이 문제인지 따져 봐야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있다. 이처럼 정서적으로는 공감을 하면서도 한국교회는 반대로 독특하게 비판에 대한 적대감을 갖고 있다. 비판하는 행위 자체를 거의 사탄의 훼방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인터넷에 메가처치 관련으로 글을 쓴 적이 있는데 그 때 댓글 중에 이런 얘기가 있었다. ‘목사님 비판하고 지옥에 가시겠습니까? 비판하지 않고 구원받으시겠습니까?’ 문제를 공론화시키면서 객관적으로 따져보려고 할 때 굉장한 저항이 느껴진다. 기독교 사회에 속해 있는 입장에서 외부적 비판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외부로부터의 비판은 하나의 음성이라고 생각한다. 기독교 내부에서도 많은 목소리를 내고 있지만 아무래도 상대적으로 목소리가 작다. 한국교회가 본모습을 되찾길 바라는 하나님의 마음이 교인들에게 잘 전달되지 않으니 일반인을 통해서라도 말씀하시는 것이라 본다. 그러나 그분들이 아무래도 비(非)신자적 관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비판이 윤리적인 부분에 집중되고 피상적인 면이 있다. 몇몇 분들을 제외하고는 신학적인 비판에 대해서 설득력이 떨어진다. 신학적 적절성이 떨어지는 비판으로는 담임목사 위주의 폐쇄적인 왕국 형태의, 그리고 그 안에서 모든 형태의 비판을 막아버리는 시스템을 건드리기가 매우 힘들다. 제일 좋은 방법은 교회 자체적으로 그러한 문제를 공론화시키고 바꿔나가는 것인데 그 일이 안 되고 있다. 그렇다면 결국 함께 기독교 내외부적으로 얘기할 수밖에 없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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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교회처럼 교단 차원의 공동체를 강화하는 것이 교회 간 과열된 경쟁을 없앨 수 있는 대안이라는 말도 있다. 이에 대해 동의하는가? 아니면 또 어떤 대안이 있겠는가? 가톨릭교회는 모든 교회가 로마 가톨릭 교회로 묶어져 있기 때문에 성장경쟁이 없다. 개신교회가 성장경쟁을 막으려면 ‘가톨릭 체제로 돌아가야 하는가’하는 말이 나올 수 있다. 그것을 한 가지 가능성이라고는 본다. 그리고 개신교인으로서 가톨릭교회가 공교회성을 유지하면서 천박한 경쟁이 없는 점이 부럽다. 하지만 또 생각을 거듭하다보면 개신교인으로서 가톨릭적인 교황 체제가 성서의 가르침인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개신교도 교단차원의 연합기구를 만들고 강화하는 것은 의미가 있지만 그런 연합기구가 개신교식 교황체제가 되지 말란 법도 없다. 때문에 보다 성서적이고 보다 온전한 형태의 교회 연합은 풀뿌리 에큐메니컬 운동이라고 본다. 각 교회가 서로 옆 교회를 방문하기도 하고 옆 교회 사역자의 어려운 처지도 돌아보고 하면서 서로 협력하는 것, 그리고 환경운동 같은 주변 이슈별로 연합하는 일들이 필요하다. 또 더 나아가서 메가처치에 대한 진지한 논의를 검토해서 교회성장을 더 이상 하지 않기로 선언하는 것도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물론 그렇게 선언한다고 해서 성장을 멈출지는 모르지만 상징적인 사건이 필요한 시점이기도 하다. 풀뿌리 에큐메니컬 운동은 현실적으로 너무 어렵지 않은가? 현실적으로 어려운 점이야 무엇이든지 다 어렵지 않는가. 어쩔 수 없다. 메가처치가 갑자기 교회본연의 모습으로 회귀한다는 일도 어렵고, 갑자기 메가처치에 대한 문제의식이 공공연하게 자리 잡는 것도 어렵다. 다만 나는 실천하고 있다. 이런 생각이 전해지다 보면 다른 분들도 공감을 하면서 실천에 옮기는 것이 가능하지 않겠나. 현실적으로 어려운 점이 분명 존재하기 때문에 현실적인 방법과 이상적인 방법을 같이 해보면 어떨까하는 제안을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