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와 벼를 구별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피와 벼를 구별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8월 군산의 태양은 매서웠고, 비닐하우스 안은 무더웠다.땅에 바짝 엎드려있는 고구마줄기는 사람 키를 훌쩍 넘긴 잡초들에 묻혀있었고, 넘실대는 푸른 잡초들의 뿌리는 호미질에도 좀처럼 뽑히지 않았다.내가 옥수숫대를 넘어뜨리는 건지 옥수숫대가 나를 넘어뜨리는 건지 모를 옥수수 따기, 울외 따기, 대나무 베기, 들깨 심기, 삽으로 길 넓히기 등.

피와 벼를 구별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8월 군산의 태양은 매서웠고, 비닐하우스 안은 무더웠다. 땅에 바짝 엎드려있는 고구마줄기는 사람 키를 훌쩍 넘긴 잡초들에 묻혀있었고, 넘실대는 푸른 잡초들의 뿌리는 호미질에도 좀처럼 뽑히지 않았다. 내가 옥수숫대를 넘어뜨리는 건지 옥수숫대가 나를 넘어뜨리는 건지 모를 옥수수 따기, 울외 따기, 대나무 베기, 들깨 심기, 삽으로 길 넓히기 등. 그래도 비닐하우스에서 나올 때 불어오는 바람은 시원했고, 잡초들 사이에는 처음 보는 벌레들과 개구리가 살고 있었고, 신발 벗고 들어간 논에는 우렁이가 숨 쉬고 있었다. 항상 그렇듯, 정작 할 때는 힘들었던 일들이 기억에 남는가보다. 그것도 파스텔 톤의 기억으로. 그러나 일손 돕기 자체가 농활의 모든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것을 통해 느낄 수 있는 농촌의 모습, 농민들의 삶, 새로운 경험은 소중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넘어선 고민 또한 있어야 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번 사회대 농활도 농민학생연대활동으로서의 농활에 초점을 둔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연대란 무엇이며, 무엇을 어떻게 연대할 것일까? 하는 문제가 떠올랐다.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농활은 과거 80년대의 농민학생연대활동과는 분명 다른 성격을 띠고 있다. 맹목적으로 그 때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자칫, 변화된 학생사회와 우리 사회의 모습을 외면하는 것밖에 되지 않을 수 있다. “무엇이 올바른 연대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정해진 답이 있지는 않다고 본다. 농촌에서 일하고 농민들과 대화하며 각자가 무엇을 느끼고자 하고, 실제로 느끼는가가 더 본질적인 문제라고 생각한다. 농활을 위해 바쁜 일정을 조정해가며 농촌으로 향하는 것 자체가 이미 농촌과의 교류를 위한 시작이다. 농활을 통해 나름대로 얻은 씨앗을 마음에 품고, 농활 후에도 그것에 대해 고민하고 생각을 가꾸어 나가는 것도 농민과 농촌과 계속해서 연대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농작물을 ‘식물’보다는 ‘음식물’로 접하는 경우가 많다. 마치 공산품처럼 가공된 형태로 농작물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 농활을 통해 우리가 매일 식탁에서 보는 대부분의 음식들이, 사실은 땅에 뿌리박고 있는 것이었다는 것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농촌이 가깝게 다가오는 느낌이었다. 농촌은 매일 만나는 공간인 동시에, 멀게 느껴지는 공간이다. 농민과 학생의 삶의 배경이 다르고, 삶의 방식이 다르며, 현상에 대한 시각도 다르기 때문이다. 농민 분들과 대화를 나누며 이러한 차이점들을 느낄 수 있었다. 서로의 차이를 이해하고 그것을 어떻게 상호적으로 조화할지는, 어렵지만 분명 풀어내야 할 과제이다. 농활에서는 하루에 8시간 정도 일손을 돕는다. 저녁에는 그 날의 활동과 문제점 등을 평가하고, 농촌과 관련된 사안에 대해 교양을 하거나 대화를 나눴다. 이번 농활에서는 농업 선진화 정책, 쌀값 안정화, 농민 생존권 보장, 식량주권을 중심으로 그러한 논의들이 이뤄졌다. 이러한 기조들은 단순히 농활에 참여한 학생들 간의 논의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후 농민 분들의 의견을 들어 봄으로써 더 큰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한다. 밭일을 잠시 쉴 때, 여농반, 마을잔치 등에서의 농민 분들과의 대화를 통해 한미 FTA, 농업의 기업화와 이에 대한 농민들의 경쟁력, 유기농업, 친환경농법, 자녀 교육 문제에 대해 농민 분들과 의견을 교류할 수 있었다. 농촌 문제에 대한 피상적인 정보만을 접하던 나에게, 현실적인 사안들과 결부된 농민 분들의 의견은 새롭게 다가왔다. 전교생이 스무 명이 안 되는 초등학교, 친환경 농법으로 무상급식을 추진하려는 정책, 중소기업의 농업 진출과 이에 대한 농민들의 경쟁력 하락, 그에 대한 대안으로써의 인터넷 거래. 물론 대화 과정이나 내용적 측면에서 아쉬움도 있었지만, 앞으로 있을 농활을 위한 건설적인 반성으로 이어 나갔다. 피와 벼를 구별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피가 볏과의 풀이다보니 처음 논에 들어가 본 입장에서는 다 똑같아 보인다. 물론 피는 잎에 하얀 줄이 있고 뿌리가 불그스름하다지만,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논에 들어가서 허리를 굽히고 피와 벼를 구별하여 피만 뽑아내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다. 도와드리려다 행여 벼만 쑥쑥 뽑아놓고 온 건 아닌지 죄송스럽기도 하다. 그런데 피와 벼를 구별하는 쉬운 방법이 있었다. 잠시 뒤로 물러나서 보면, 줄 맞추어 심어진 벼들 사이에 늘어져있는 피를 쉽게 볼 수 있는 것이다. 대학 첫 방학에서 농활이 내게 주는 의미도 이런 것이 아닐까. 그 동안 너무나 가까이만 보고, 대학생활과 나의 삶에서 피와 벼를 혼동하지는 않았는지, 혹시 벼를 뽑고 있지는 않았는지…. 6박 7일간의 농활에서의 김매기는 마무리되었지만, 앞으로 대학생활에 있어서 어떤 자세로 ‘김매기’를 해야 할지 조금이나마 깨달을 수 있었던 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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