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코너]

정말 ‘진보’를 일구는 참목소리라면이주원(법학부 04) 어떠한 단체가 구성원들의 각 개성을 하나로 묶어 무엇을 ‘표방’해 내는 것은 무척 힘든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너무나 다양할 수 밖에 없는 정치적, 사상적 지형들을 몇 가지로 개념화 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뿐더러, 어느 정도 일관된 스펙트럼이 구성원들 사이에 존재하더라도 과연 그 스펙트럼이 한 단어로 ‘정의’내려 질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정말 ‘진보’를 일구는 참목소리라면이주원(법학부 04)

어떠한 단체가 구성원들의 각 개성을 하나로 묶어 무엇을 ‘표방’해 내는 것은 무척 힘든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너무나 다양할 수 밖에 없는 정치적, 사상적 지형들을 몇 가지로 개념화 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뿐더러, 어느 정도 일관된 스펙트럼이 구성원들 사이에 존재하더라도 과연 그 스펙트럼이 한 단어로 ‘정의’내려 질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것이 거대한 공론장을 지휘하는 언론사라면, 그것도 구성원이 매년 바뀔 수 밖에 없는 학내 언론이라면, ‘진보’를 표방하는 과정에서 그들이 수도 없이 겪었을 격한 논의와 수년간 축적되었을 고민의 과정들이 감히 상상하기도 어려운 듯 벅차게 다가오곤 했다. 이러한 언론사의 성격을 ‘표방’하는 과정이 그만큼 고되어야 하는 이유는 곧바로 그 결과가 독자들에게 미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진보를 일구는 참목소리’라는 구호 아래 쓰여진 서울대저널의 기사들은 바로 ‘진보’의 색깔이 입혀져 ‘진보’적인 어떤 것으로 읽히게 된다. 즉 독자들은 서울대저널의 기사를 보며 사안사안에 대한 ‘진보적 주장과 대안’을 기억하게 되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기사를 쓸 때에 내가 쓰는 문장 하나하나가 전체 서울대저널의 맥락과 함께 어떻게 읽힐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는 과정이 매번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살펴볼 때 예를 들어 지난 4월호의 ‘해방60년, 한일의 진정한 해방을 위하여’는 읽히기에 따라 ‘진보’를 지나치게 왜곡해 버릴 수 있는 기사가 아니었나 싶다. 비록 일본의 군국주의, 역사적인 미완점들을 지적하는 데에 주력하고 있지만, 기자가 얘기하고자 하는 ‘과거사 청산’의 지향은 어디에 있는가는 명확히 알기 어렵다. 일반 독자로서 글을 접하기엔 다분히 민족주의적인 시각에서 과거사 청산과 친일진상규명 등을 촉구하는 기사가 아닌지 의심스러웠고, 이러한 방향의 대내외적 과거사 청산을 말하는 기사가 서울대저널에 버젓이 실린 점에서 당황스러움이 앞섰다. 독도수호대 김점구 사무국장의 말을 인용하며 국민의 행동을 촉구하는 부분에선 국민을 선동하여 독도수호캠페인이라도 벌이자는 것인지 싶었고, 계속해서 얘기하는 ‘우리’안엔 누가 포함되어 있는지 묻고도 싶었다. 주제넘은 얘기일 지는 모르지만 애독자로서 생각해 볼 때 ‘진보’를 일구는 참목소리의 일관됨을 유지하기가 힘들다면, 굳이 ‘진보’라는 타이틀을 유지해야 하는지, 어쩌면 ‘진보’라는 타이틀이 기사의 다양성과 공론화의 가능성을 지나치게 제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어쨌든 숙고된 심의의 과정 끝에 ‘진보’에의 표방이 불가피한 것이었더라면, 기사들을 완벽히 그 타이틀 안에 충실히 가둬두는 과정은 언론으로서의 당연한 의무가 아닐까 한다. 왜냐면, 정말로 헷갈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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