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교과서의 숨겨진 이면을 묻다

2005, 2001년에 이은 일본 교과서 왜곡 파동 동아시아 역사교과서, 긴역사만큼 끊임없이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2005년, 홍역처럼 일본 ‘새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하 새역모)’에서 만든 후소샤 출판사의 일본사 교과서 문제가 한국을 휩쓸고 지나갔다.4 년에 한 번씩 진행되는 일본의 교과서 검정 과정은 2001년에 이어 2005년의 한국에도 파장을 낳았다.

2005, 2001년에 이은 일본 교과서 왜곡 파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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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역사교과서, 긴역사만큼 끊임없이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2005년, 홍역처럼 일본 ‘새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하 새역모)’에서 만든 후소샤 출판사의 일본사 교과서 문제가 한국을 휩쓸고 지나갔다. 4 년에 한 번씩 진행되는 일본의 교과서 검정 과정은 2001년에 이어 2005년의 한국에도 파장을 낳았다. 일본교과서바로잡기운동본부를 비롯한 시민단체 및 학계에서는 새역모의 교과서를 격렬히 비판했다. 후소샤 교과서를 비판하는 논의는 대부분 한국의 근대사를 서술하는 부분에 집중된다. 아시아 평화와 역사교육연대 및 세 단체는 4월 11일 심포지엄을 열어, 후소샤 교과서가 식민지 지배의 실상을 알리는 분량이 약간 축소했을 뿐만 아니라 실상을 호도했다고 지적했다. 우선 2001년에 비해 황민화 정책의 일환인 창씨개명 등을 ‘강제’로 실시했다는 서술이 부족하다고 비판했다. 또한 일본의 군국주의적 경향 및 ‘종군위안부’의 사실 자체를 부정한 점 역시 지적했다. 실제로 후소샤 교과서는, 교과서 검정 제도를 시행하고 있는 일본 내에서 채택률이 0.039%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후소샤 교과서의 영향력은 우습게보기 어렵다. 한국교육개발원 선임연구위원 이찬희 씨는 “2001년 문제가 된 후쇼사 교과서 때문에 97년도에서 2005년에 이르는 십년의 이것은 큰 차이가 나버렸다”고 지적하며, 후소샤 교과서의 영향력을 설명하기도 했다. 베트남 전쟁의 양민학살, 알고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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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 진실은 저 너머에

일본 교과서의 구성 내용을 비판하는 화살은 한국 교과서에 대한 비판으로도 이어지고 있다. 일본이 자국의 역사를 서술하며 가해의 역사를 최대한 지우려고 한 점을 비판하면서도, 정작 한국이 타국에 가했던 가해의 역사는 그다지 다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로 베트남 문제가 있다. 제 6차 교육과정에 따른 국사교과서에는 베트남 전쟁에 대해 “공산주의의 침략을 받고 있던 베트남을 지원하기 위해서 국군을 파병하였다(1965)”고 서술할 뿐이다. 한국군에 의한 대량 양민 학살과 관련된 논의들은 서술에서 제외되었다. 세계평화운동단체인 ‘미국친우봉사협회’는 남베트남 농촌마을의 주민을 대상으로 인터뷰를 하며 한국군부대들이 자행했다는 많은대량학살 사례를 밝혔다. 한국군들의 대량 양민 학살은 대부분 부녀자와 어린 아이였다. 노암 촘스키는 한국군이 양민을 학살한 것은, 베트콩의 공격으로부터 피하기 위한 인질이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한국 민족이 다른 민족을 학살한 경우는 이 외에도 1931년 ‘만보산 사건’이 있다. 국사교과서 내에서 만보산 사건은 찾아보기도 어렵다. 하지만 한국과 일본은 같은 가해자의 입장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이찬희 씨는 베트남 전쟁과 관련된 논점에 대해 “위험한 사고”라고 지적하며, 한국이 베트남전에 파병을 했던 것은 미국의 용병일 뿐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우리도 일종의 피해국이기 때문에, 일본의 침략과 같은 선상에서 봐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한국보다 진일보한 일본의 역사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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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육개발원 선임연구위원 이찬희씨

일본 교과서의 내용상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국사학계 일선에 있는 사람들은 일본 역사교과서의 선진적인 역사의식을 인정하는 추세다. 대표적인 예로 종군위안부 문제가 있겠다. 실제로 위안부 문제를 먼저 의제화 시켰던 곳은 1993년 일본의 무라야마 관광장관에 의해서였다. 1993년 전까지 위안부 문제는 역사 속에 묻혀있기만 했다. 이찬희 씨는 종군위안부에 대해 “한국이 예전에는 위안부 문제를 창피했기 때문에, 덮어놓기만 했다”며 “(사실을 덮어놓았던 것은)엄연한 객관적 사실”이라고 지적했다. 일본 교과서의 검정 제도 역시 한국 교과서의 국정제에 비해 진일보한 측면이 있다. 한국 국사 교과서는 국가가 직접 교과서 편찬과 발행을 담당하는 제도인 국정 제도를 아직 유지하고 있다. 국사교과서의 국정화는 1972년 10월 유신 때부터 시작됐다. 강원대학교 역사교육과의 류승렬 교수는 자신의 논문을 통해 국정 국사교과서는 “유신헌법과 더불어 유신 독재를 위한 이데올로기적 장치였다”고 비판했다. 국정 국사교과서를 사용하기 시작한 1974년은 일제강점기 이후 처음이었다. 국정제의 한계는 국사교과서가 질적으로 가치가 떨어진다는 점이다. 1974년, 국정 국가교과서는 이전의 교과서보다도 내용이나 체재 면에서 크게 후퇴했다. 또한 새로운 학설을 검증 없이 기재함으로써 하나의 ‘통설’을 만들어냈다. 와 같은 대안교과서 집필을 하고 있는 윤종배(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설중학교 교사)씨는 현재 국정교과서가 “사상적인 스펙트럼을 담아내지 못한다”고 말하며 색깔 있는 교과서가 나오지 못한다는 점을 비판했다. 국정교과서는 또한 경쟁 할 대상이 없는 만큼 교과서 제작 과정도 ‘비판받지 않을 만한’ 내용을 중심으로 졸속으로 이루어졌다. 검인정제도는 충분한 대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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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란이 된 후소샤 교과서와 한국의 국정 국사교과서. 역사교과서, 어디로 나아가야 할 것인가

국가는 드디어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국정교과서를 탈피하고 검인정제도를 도입하고 있다. 2004년부터 제 7차 교육과정에 의해 한국 근현대사 교재는 검인정제도가 적용되어, 현재 6 종의 근현대사 교과서가 출간되고 있다. 제 8차 교육과정부터는 국사, 근현대사 교과서 모두 검인정제도가 도입될 것으로 계획되어 있다. 윤종배씨는 “현재 (서울대 사대부중에서는) 학부모, 교사로 이루어진 학교운영위원회를 통해 교과서를 선택한다”며 “검정제도는 수요자들이 교과서를 선택할 최소한의 권리를 보장해준다”고 검정 제도의 의의를 설명했다. 하지만 검정 제도 역시 한계가 있기는 마찬가지다. 한국 근현대사 교재 6종이 모두 대동소이한 모습을 띠고 있는 것이 그 점을 증명한다. 류승렬씨는 자신의 논문을 통해 “어떤 경우라도 국가의 개입을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검정제는 국정제가 낳는 제반 문제들을 해소할 근본 대안이 될 수 없다”며 검정제도를 비판하며 자유발행제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윤종배씨 역시 “검정제도에도 지침이 따르는 만큼, 출판사들은 되도록 논란을 피해가려고만 노력한다”며 한계를 지적했다. 또한 “수업을 하는 주체인 교사의 역량을 인정해야 한다”며 자유발행제에 대해 긍정적인 의견을 표했다. 교과서와 학생의 소통이 필요하다 교과서의 서술 방식 역시 기존의 획일화된 방식에서 벗어나 좀더 학생들에게 친숙한 방식으로 바뀌는 것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있다. 는 “학생들과 어떻게 ‘소통’해야 할 것인가?”라는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쓰여졌다. 윤종배 씨는 현재 국사교과서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생동감이 없다는 점을 지적하며 “과거의 이야기를 학생의 시각으로 해석하여 사고를 확장하는 창의성을 발휘하게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실제 교육과정에서 이러한 방식을 도입하고 있다는 윤종배씨는 “학생들에게 길을 열어주었을 때 생각지도 못했던 상상력이 드러난다”며 대안교육의 의의를 설명했다. 논란이 됐던 후쇼사 교과서 역시 형식 면에서는 한국 국사 교과서보다 진일보 해 있다. ‘나’로부터 시작되는 역사 서술, 역사 신문 만들기, 역사에 대한 롤플레이 등을 교과서에 배치해 놓았다. 이찬희씨는 일본 역사 교과서들이 “내용중심에서 탐구형으로 바뀌고 있으며, 만화, 삽화, 지도, 퍼즐을 싣기도 했다”며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보편적 인권 개념의 접근이 요구될 때 타국의 학생들이 한국의 역사를 어떻게 인식하는 지도 중요하지만, 우선시 되어야 할 것은 한국의 학생들이 한국의 역사를 어떻게 인식하느냐이다. 역사가 “객관적일 수 없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인정하여 다양한 역사관을 존중하고 있는 일본 역사교과서 제도는 획일화된 역사관을 고집하는 한국보다 진일보한 역사의식을 보여준다. 학생과 소통하려는 교과서의 노력 역시 마찬가지다. 물론 침략의 역사를 미화하며 병행되는 형식상의 변화는 “세련된 우익교과서”뿐일 수도 있다. 한국 측에서의 비판 역시 지속적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대신 한국 역시 ‘가해의 역사’에서 얼마나 자유로운지를 동시에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보편적 인권은 ‘피해자’라는 핑계로 가려질 수 있는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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