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중반 서울대에는 ‘학생언론의 르네상스’라는 말이 나돌았다. 여기에는 그럴 만 한 이유가 있다. 87년 6월 항쟁 이후, 학생사회에는 담론으로 넘쳐났다. 6월 항쟁이후 학생운동은 ‘NL(자주계열)’과 ‘PD(민중계열)’로 나뉘어 대학사회 담론을 주도했다. 이 양대 진영의 논쟁과 함께 90년대 들어서면서는 새로운 대안이 되고자 ‘21세기 진보학생연합’이 탄생, 대학담론에 기름을 부었다. 치열한 고민은 조직 내부에만 머물지 않았다. 각 진영은 담론의 주도권을 위해서라도 매체를 필요로 했고, 서울대는 각종 인쇄물과 대자보들로 하루도 쉴 틈이 없었다. 또 다른 한편에서는 이 담론을 정리해주기에 바빴다. 90년 ‘교지관악’이 탄생했고, 연이어 ‘학회평론’ ‘자주관악’ 등의 매체가 탄생했다. 이들은 학보 ‘대학신문’과 함께 서울대 담론을 주도해갔다. 이 시기의 매체를 두고 ‘언론’이라고 부르기에는 다소 부족한 감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는 일단 대부분의 내용들이 학생정치조직의 담론을 소화하는데 역점을 두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실제로 이 시기의 매체들을 들여다보면 학생회론, 통일론, 노동운동 등의 담론 중심의 텍스트가 주를 이룬다. 『서울대저널』의 전신의 전신 – 「자주관악」 photo51999년 6월호 『우리세대』(통권20호)를 들여다보면, 92년 탄생한 정치신문 「자주관악」이 『서울대저널』의 시작이었다고 소개한다. 아쉽게도 당시의 신문 형태로서「자주관악」은 남아있지 않다. 신문형태로 출발한 것은, 『서울대저널』이 ‘21세기 진보학생연합(21세기)’의 기관지에서 출발했고 당시 총학생회와는 거리가 있던 조직 상황을 미루어 볼 때, 정치신문 형태는 발행비용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 정치신문으로 시작한 「자주관악」은 이듬해 21세기가 총학생회 선거에 승리하면서, 93년 3월 월간지 형태로 바뀌어 발행된다. 월간 「자주관악」은 총학생회 선전위원회가 발행의 중심이었고, 총학생회의 주력사업과 연관된 내용들로 대부분의 지면이 구성됐다. 이 같은 면에서 「자주관악」 역시 언론이라고 부르기에는 다소 미흡했던 것이 사실이다. 95년 5월 「자주관악」은 『우리세대』라는 이름으로 재호를 변경하면서 조금씩 달라진 모습을 보인다. 여전히 총학생회 기관지로서 발행이 유지되기는 하나 학생식당, 과외, 녹두거리, 도서관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며 그 관심의 폭을 넓힌다. 96년 7월 『우리세대』 편집장의 칼럼을 들여다보자.
| 편집실에서는 커버스토리를 만들어내는 작업이 항상 고역이다. 언제나 처럼 노동과 통일 이야기로 지면을 채울 수도 있다. 또 그런 주제로 커버스토리를 구성하면 2-3일이면 모든 작업이 끝날 것이다. 그러나 그런 매너리즘에 빠지는 것이 학생운동의 역할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중략)…. 조금 더 창조적인 것들을 고민하게 된다. (97년 통권 9호 『우리세대』‘편집실에서’) |
『우리세대』가 총학생회 기관지 형태로서의 발행은 97년 독립언론으로 재탄생 될 때까지 유지됐다. 아마도 이때까지를 『서울대저널』의 태동기로 보면 될 것 같다. 『서울대저널』의 전신 – 『우리세대』photo6앞서 설명했듯, 『우리세대』는 95년 5월 창간됐다. 다행히도 창간호는 현재 『서울대저널』편집실에 남아 있다. 당시의 지면을 살펴보면, ‘서울대를 움직이는 30인’ ‘과학이야기’ ‘동성애의 왜곡된 인식’ 등 당시에는 기대하기 힘들었던 내용들로 채워졌다. 총학생회 기관지 형태임을 감안하면 상당히 진전된 형태의 학생언론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편집진 내부의 이 같은 문제의식은 2년 후 자치언론으로 독립하는데 적잖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1997년 『우리세대』는 자치언론으로서 큰 변화를 맞이한다. 먼저 총학생회로부터 완전 독립한다. 여기서 말하는 독립이란 인사권, 편집권, 재정권을 모두 포함하는 것으로 제호를 뺀 모두가 예전과는 다른 형태로 발행되기 시작함을 의미했다. 또한 편집위원들도 대폭 바뀌어 편집위원 3인을 제외하고는 모두 새로운 얼굴들로 채워졌다. 편집위원의 평균학년이 4학년에서 3학년으로 낮아졌다는 점도 이채롭다. 이는 『우리세대』가 총학생회의 일시적 프로젝트 조직에서, 매년 새 편집위원을 받으며 인수인계하는 일반적인 대학 동아리와 같은 독립 조직으로 바뀌었음을 의미한다. 97년 첫 공채기자를 선발했다는 점도 이를 잘 뒷받침해 준다. 총학생회로부터의 독립은 다양한 형태의 변화를 가능케 했다. 먼저, 광고 수입을 통한 재정독립은 사업 추진의 유연성을 가져왔다. 특히 당시의 『우리세대』는 다른 매체에 비해 해외취재부문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미국을 비롯한 제3세계 국가의 현지 취재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일들이었다. 또한 언론사로서의 다양한 변화가 이뤄졌다. ‘우리세대편집위원회’ 이름으로 냈던 기사들을 ‘기자 크레딧’으로 바꿔 기사에 대한 책임의식을 제고했으며 편집실을 현재의 장소로 이동해 공간 측면에서도 총학생회와 분리됐다. 또한 구성원들의 직함을 ‘편집위원’에서 ‘기자’로 바꿔 언론 형태로서 그 변화에 박차를 가했다. 그렇다면, 『우리세대』라는 제호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당시의 『우리세대』 칼럼을 들여다보자. 93년 문민정부가 들어선 이후 세대론이 등장했다. 그렇다. 우리는 바로 우리세대이다. 과거와는 다른 지금, 현재형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90년대 운동은 이제 자유로움을 찾아가야 한다. 과거로부터 자유를 우리는 얻어야 한다. 과거 속으로 우리는 돌아 갈 수 없다. 돌이킬 수 없는 것에 대해 미련을 가지는 것은 우리의 힘을 낭비하는 것 뿐이다. (97년 9월 통권 17호)이처럼 당시의 대학사회에서는 6월 항쟁 민주화 이후의 세대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를 두고 고민에 휩싸여 있었다. 대학 밖의 사회에서는 이미 ‘신새대’ ‘X세대’ ‘서태지세대’ 등 다양한 수식어를 붙이기에 바빴으나, 민주화 과정에서 피를 흘린 선배들 앞에서 그러한 수식어가 대학사회에서는 통할 리가 만무했던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매체를 만들고자 했던 당시의 편집위원들에게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학생자치언론으로서의 진행97년과 98년의 독립언론으로서의 과도기를 거친 『우리세대』는 99년 드디어 공채출신 첫 편집장을 배출한다. 동시에 인터넷이 대중화되기 시작하면서 기자 크레딧에 이메일 주소를 함께 기입했다. 이 같은 변화는 기자 개인에게 있어 기사의 책임 의식을 높여 신뢰도를 높이는데 많은 기여를 했다. 한편, 편집실 내부에서는 ‘한겨레21’ 등 비교 가능한 외부 매체를 정기구독하고 일간지 만평을 매달 선정, 비평해 가며 편집과 기사방향에 대한 틀을 잡아 나갔다. 인터넷 대중화의 영향은 기자 이메일 기입 뿐 만 아니라 홈페이지 런칭에도 힘을 보탰다. 그전 까지만 해도 나우누리 통신 아이디만 사용했던 『우리세대』는 1999년 2학기 드디어 자체 홈페이지를 개설했다. 서울대 전산원 서버(http://www.plaza1.snu.ac.kr/~woori)에서 출발한 홈페이지는 이후 2001년 2학기 『서울대저널』로 제호가 바뀌면서 동시에 홈페이지도 개편, ‘http://www.snujn.com’으로 변경됐고 지금까지 공식 홈페이지 주소로 사용해오고 있다. 학생자치언론으로서, 변화의 욕구는 지면 편집에서도 이어졌다. 이전까지 기획사에서만 의존하던 편집이 99년 2학기에는 최초로 편집실 내부의 자체편집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여러 가지 문제점을 남기고 이듬해 다시 외부 편집으로 방향을 틀었다. 일단 자체 편집은 값비싼 기자재를 요구했고, 능력 있는 편집 기술자를 필요로 했으나 편집실 내부에서 그와 같은 역량 투입은 사실 상 힘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자체 편집 시도는 일방적으로 기술자에게 맡기기만 했던 예전의 외부 편집 형태와는 다르게, 지면 편집에 기자들이 적극적으로 임하게 하는 요인이 됐다. 외부 언론사와의 접촉도 늘어났다. 1997년 8월에는 해외 대학 탐방을 통해 미국의 「Reflection」과 「Yiese」와 자매결연 맺었다. 또한 2000년 서울대총학생회선거에서는 「대학신문」「교지관악」 등과 더불어 매체연합을 결성해 활동했고, 이는 이듬해 2001년 총학생회선거에서 ‘서울대선거신문’을 두 차례 발행하게 만드는 계기가 됐다. 『우리세대』에서 『서울대저널』로의 변화photo7총학생회 기관지에서 독립했던 사실만큼이나 2001년 2학기에도 편집실에서는 큰 변화를 맞이한다. 『서울대저널』로 제호가 변경된 것이다. 그렇다면 왜 제호가 변경된 것일까? 당시의 ‘편집실에서’를 들여다보자. 제호를 변경하는 작업은 기실 외부충격으로 인한 것 같지는 않다. 그것도 ‘서울대’라는 미묘하고도 쳠예한 단어를 결합시켜야 할 만한 외부적 당위가 우리에게 있었을까? 단언컨대 그렇지 않다. 우리 기자들과 함께 결언을 한 것은 일종의 ‘자생적 의기투합’이라 부르고 싶다… 우리 모두가 ‘서울대’라는 정체감을 그곳에만 찾아야만 하는 이유는 그것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필연적인 이유가 있다…. ‘저널’이라는 단어를 제호에 채택했음은 우리에게 부족했던 일종의 기자근성에 관한 강박이었음을 방증한다. (2001년 9월 통권 47호) 『서울대저널』로서의 제호변경은 크게 세 가지 면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첫째, 서울대라는 단어를 통해 넘기 힘든 모순에 뛰어들었다는 점이다. 서울대라는 단어를 과연 어떻게 바라보고 풀어가야 하는가를 기자들 모두 용기를 갖고 뛰어든 셈이다. 둘째, 『서울대저널』이란 제호를 통해 매체의 성격을 서울대로 규정한 것이다. 서울대학 내의 이슈에 관해 전 보다 민감하게 반응하겠다는 편집실의 의지를 보여준 것이다. 한편으로는 취재대상을 ‘대학사회’에서 ‘서울대’로, 독자를 ‘대학생’에서 ‘서울대학생’으로 규정한 셈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저널이라는 단어를 통해 언론사로서의 입지를 강화했다는 점이다. 이는 ‘선 의제설정, 후 취재확인’의 기존 학생언론에서 ‘선 취재확인, 후 의제설정’의 형태로 『서울대저널』의 편집방향을 공고히 하는 계기가 됐다. 한편, 학생자치언론으로서의 노력은 다양한 결과물을 낳았다. 『서울대저널』은 2001년 두학기 연속으로 대학기자상을 수상했고, 2004년 ‘서울대학생자치언론위원회’를 세우는 데 많은 공헌을 했다. 또한 『서울대저널』은 매년 서울대총학생회선거 간담회를 주관하는 학내 대표 언론사로 그 역할을 다하고 있으며, 서울대학생들의 여론수렴을 통해 각종 사회 이슈들에 관해 서울대학생들의 견해를 학외 알리는데 힘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