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하나, 새내기 상영 씨와 정든내기 귤애 씨의 이야기
새내기 상영 씨는 한 선배와의 관계 때문에 골치가 아프다. 선배가 자신보다 나이는 어린데, 학번은 높기 때문이다. 빠른 87년생인 상영 씨는 사실 4수 끝에 올해 대학에 들어왔다. 물론 당연히 자신보다 나이가 어린 선배가 있을 줄은 알았다. 하지만 학번이 무슨 권력인가? 말끝마다 ‘야, 야’를 붙이고, 자신에게는 존대할 것을 강요하는 빠른 88년생 06학번 귤애 씨는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린다. 한 살 더 많다고 오빠 대접을 받겠다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의 존중은 필요하지 않을까? 서로 예의를 갖추며 친해지면 될 것 같은데 학번으로 유세하는 그녀의 모습은 정말……. 정든내기 귤애 씨는 한 후배만 생각하면 불편하다. 자신보다 무려 두 학번이나 낮은 08학번이기에 기쁘게 반기려고 했는데,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 새내기로 들어온 것이다. 그래서 처음엔 대화를 통해 호칭 관계를 정리하려 했다. 하지만 주변 친구들은 그럴 필요가 없다며 선배의 자리를 굳게 지키라고 조언했다. 그래서 좀 의도적으로 선배인양 굴었더니 상대 표정이 금세 굳는다. 거기에 자극받은 그녀, 좀 더 권위적으로 굴기로 마음먹었다. 처음에는 그러면 상대가 곧 기가 죽을 줄 알았더니 영 더 관계가 불편해지기만 했다. 하지만 추호도 그녀가 먼저 고개를 숙일 생각은 없다. 도대체 뭐가 잘못된 걸까? 이야기 둘, 말할 수 없었던 보림 씨 이야기 보림 씨는 한 교수 때문에 누구에게 말도 못하고 혼자 속병을 앓고 있다. 아무도 그녀를 이해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건은 학기 초부터 시작됐다. 교수는 체계적으로 수업을 진행했고, 매 수업 시간마다 보림 씨의 마음은 ‘무언가 배웠다’는 뿌듯함으로 가득 찼다. 게다가 교수가 간간이 덧붙이는 유머는 수백 명이 듣느라 경직되기 쉬운 강의의 분위기를 풀어주는 화룡점정이었다. 하지만 어느 날 교수가 던진 농담은 그녀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이런 얘기 하면 여학생들이 싫어하겠지’라며 말을 시작한 그는 ‘수업 시간과 여자의 치마 길이는 짧을 수록 좋다’라 말했고, 강의실은 이내 웃음바다가 됐다. 하지만 이 ‘폭언’에 그녀 뿐만 아니라 주변 몇몇 사람의 얼굴이 흐려지는 것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이후 그 교수가 하는 말마다 예전과는 다르게 다가왔고, 결국 그녀는 수강을 취소하고 말았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수업 시간에 따지고 싶었지만, 즐겁게 웃는 수백 명은 그녀를 ‘군중 속의 고독’으로 이끌었다. 이야기 셋, 복학 서류를 내다 기분이 상한 상휸 씨 이야기 상휸 씨는 이제 막 1년간의 배낭여행을 마치고 돌아왔다. 그는 복학 서류를 들고 학교 행정실을 찾아갔다. 복학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직원을 찾아간 그는 서류를 내고 행정실을 나서며 상당한 굴욕감을 느꼈다. 처음 보는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보자마자 반말을 하고, 쌀쌀맞게 구는 통에 기분이 상한 것이다. 좋지 않은 기분을 애써 달래며 찾아간 과/반방에는 오랜만에 보는 반가운 친구가 있었다. 그에게 방금 있었던 얘기를 털어놓은 상휸 씨는 다시 한 번 화가 났다. 그 직원이 그렇게 구는 것이 한두 번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 순간, 그의 머리에는 새내기 시절부터 행정실을 찾아갔을 때 직원 중 일부가 학생이라고 얕보는 통에 기분이 상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친한 사이도 아니고, 무시 받을 행동을 한 것도 아닌데 왜 저리 불퉁거리는지. 사실 몇몇 친구들은 직원들은 결국 자신들이 없으면 월급도 못 받는 거 아니냐면서 서툰 우월의식을 내비치곤 한다. 그럴 때마다 마음 속으로 눈살을 찌푸리던 그였지만, 오늘 당한 일은 아무래도 오랫동안 잊히지 않을 것 같다. 같은 공간 내에서 공생하며 지내는 만큼 다툼 없이 지내면 좋을 텐데, 왜 이렇게 분란의 씨앗이 뿌려지는 걸까. 서로 지킬 것만 지키면 될 텐데, 나이가 어리다고, 아니면 학생이라고 무시하는 걸까? 오늘도 답을 쉽게 내릴 수 없는, 혼자 해결할 수 없는 문제로 고민하다 상휸 씨는 잠이 든다. 이야기 넷, 비정규직 진현 씨의 이야기 진현 씨는 학교에서 일을 한지 갓 세 달 된 신입 직원이다. 오랜 구직 기간을 거쳐 된 취직이라 열의를 갖고 시작한 일이었지만, 똑같은 일을 해도 훨씬 적은 임금을 받기에 동료 직원들 사이에서 소외감과 위축감마저 느낀다. 계약직, ‘비정규직’이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기는 하지만 막상 현실로 다가오니 생각보다 견디기가 쉽지 않다. 정규직 직원들과 가까워지려고 노력은 하지만 뭔가 마음의 벽이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물론 표면적으론 한 팀인 사이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듯 보이지만, 속으로는 그들이 잘해주더라도 항상 뭔가 조금은 거북하고, 왜 똑같은 일을 하면서 이런 처지에 있어야 하는지 질투도 나 세상이 원망스럽다. 열심히 일하다보면 언젠가는 자신도 정규직으로 전환되거나 더 좋은 자리가 날 것이라고 생각도 해보지만, 자꾸 정규직 직원들이 자신 위에 있는 존재들 같아 속이 상한다. 심지어 자신의 비정규직 처지를 동정하는 정규직 직원의 이야기가 때때로 들려 자존심까지 상한다. “정말 나는 ‘88만원 세대’에 불과한 걸까?” 이야기 다섯, 드디어 강사가 된 연아 씨 이야기 오랜 대학원 시절을 마친 연아 씨는 곧바로 시간강사 자리를 구할 수 있었다. 사실 박사과정 중에도 강사 자리는 종종 나지만, 과의 특성상 선배가 워낙 많아 그녀에게까지 자리가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박사 취득 후 곧바로 시간강사 자리를 내주겠다는 지도교수의 약속 덕분에 그녀에겐 인고의 대가로 강사 자리가 주어졌다. 부푼 꿈을 안고 학교에 나가 첫 날 첫 강의를 마친 후 연아 씨는 인사차 황 교수의 연구실로 갔다. 따뜻하게 맞아준 황 교수는 이내 곧 대학원 시절 때처럼 무리한 요구를 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황 교수의 비서 노릇을 하자고 대학원에 들어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머지않아 온갖 잡무와 격무에 시달려 자기 공부를 할 시간을 내기 힘들었던 그녀는 깨달을 수 있었다. 한국의 현실에서 아직도 상당수 대학원생은 교수의 ‘봉’이라는 것을. 가끔 가다 만나는 옛날 친구들은 지도교수로부터 금품을 요구받고, 인격 모독을 당하기도 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줬다. 물론 황 교수가 그녀에게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늘 마음 한켠에 불안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이제 그녀는 그 인고의 시간을 거쳐 비로소 강사의 자리에까지 올랐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황 교수와 동등해졌다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녀가 교수로 임용되기까지는 황 교수의 ‘지원’이 필요한 탓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