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휴가, 실종된 기억

01_ 관람자들1980년 5월 17일, 한 경상도 출신 사내는 서울역으로 가기 위해 최루탄과 경찰들을 피해 다녔다.천신만고 끝에 서울역에 도착한 사내는 전두환의 화형식 장면을 말미에서 지켜보고 있었다.서울역의 대오가 흩어진 다음날, 등교하기 위해 집을 나섰던 사내는 휴교령과 함께 경찰이 점거한 교정을 지켜 볼 수밖에 없었다.한편 그 당시 고등학생이던 한 소녀는 강원도에서 수업을 받고 있었다.

01_ 관람자들

1980년 5월 17일, 한 경상도 출신 사내는 서울역으로 가기 위해 최루탄과 경찰들을 피해 다녔다. 천신만고 끝에 서울역에 도착한 사내는 전두환의 화형식 장면을 말미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서울역의 대오가 흩어진 다음날, 등교하기 위해 집을 나섰던 사내는 휴교령과 함께 경찰이 점거한 교정을 지켜 볼 수밖에 없었다. 한편 그 당시 고등학생이던 한 소녀는 강원도에서 수업을 받고 있었다. 북한과 가깝고 산으로 둘러싸인 도시에서 행해지는 반공교육은 거의 세뇌 수준이었다. 그러나 그곳은 최루탄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평온한’ 도시였다. 2007년 5월 17일, 대학생 하나가 처음으로 광주에 내려갔다. 그곳에서 광주에 대해서 처음으로 분노를 느꼈다. 하지만 그 분노는 계엄군의 잔인함이 아니라, 이 사건을 잊어가는 시대에 대한 분노였다. 한편 고등학생인 한 소녀는 입시 공부를 하다 가끔 박노자의 책을 펼쳐보곤 했다. 그러다 친구들과 를 보고 그곳에서 눈물을 흘리다 못해 어지러움을 느꼈다.그리고 2007년 8월, 이 가족은 함께 영화관을 찾았다. 영화를 보는 내내, 영화관은 훌쩍거리는 소리로 가득했고, 많은 사람들의 눈에서 눈물과 함께 두려움과 분노가 흘러나왔다. 영화는 ‘임을 위한 행진곡’으로 마무리되고 조명이 켜졌다. 그리고 재빨리 흩어지는 사람들의 입에서는 “뭐먹지? 배고파”라는 말들이 흘러나왔다. 영화가 끝나고 이 가족은 맥주를 마시며 ‘특이하게’ 영화를 안주로 삼았다. 07년의 사내와 80년의 사내는 영화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았다. 하나는 영화를 보고 나오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죄의식의 소비’를 보았다는 불만이었다. 영화가 목적한 ‘기억의 복원’이 영화관 안에서는 이루어졌지만, 영화관 밖의 삶과 연결되었는지는 모르겠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영화에는 ‘왜’가 없었고 영화가 계엄군들에게 ‘잔인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왜 계엄군이 광주에서 학살을 벌였는지 알려주지 않으면, 최종 책임자 전두환이 사라진다. 영화는 과도하게 정치 구호를 빼버리는 바람에 그들이 ‘민주주의’를 요구했고, 그것 때문에 더욱 학살당했다는 역사적 배경을 짚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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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과도하게 정치 구호를 빼버리는 바람에 그들이 ‘민주주의’를 요구했고, 그것 때문에 더욱 학살당했다는 역사적 배경을 짚지 못했다.” 사진은 영화 <화려한 휴가>의 한 장면.

반면 80년의 소녀는 영화의 ‘잔인함’에 놀랐다. 말로만 들었던 광주의 비극이 이토록 잔혹한 것일 줄은 몰랐다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국군이 국민을 죽이는 장면에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물론 아직 범죄자들이 살아있는 이 시대에 이 영화가 나올 수 있다는 것에 놀랐다. 07년의 소녀는 인생에서 가장 슬픈 영화였다고 토로했다. 자신은 더 나아가 전두환에게 기존보다 강한 반감을 가졌고, 그때에 대해 더 알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물론 그녀가 보기에 또래들에게 광주는 더 이상 기억의 대상이 아니었다. 오직 배우들만이 눈에 밟힐 뿐이었다.02_ 기억의 실종아직 5?18은 ‘기억하기 위한 투쟁’이 한창 진행되고 있다. 어떤 이들은 폭동으로 기억하고, 어떤 이들은 항쟁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어느새 광주의 기억은 교과서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만약 이 영화가 아니었다면, 가족대화에 광주가 등장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는 다수 대중을 노린 ‘상업영화’가 ‘광주’라는 소재를 다루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의 감독이 천명한 최소한의 목적인 ‘기억의 복원’은 이 점에서 성공한 듯도 하다.하지만 기억을 소재로 한 영화는, 그 시대를 살아가던 기억의 ‘장인들’과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 완전한 소설이 아니라 ‘기억의 복원’을 천명한 영화라면, 기억을 재조립할 때 신중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영화는 자본의 의도에 부합하는 탈(脫)정치적-탈(脫)지식인적 편향적 조립을 ‘객관성’으로 포장했다. 이런 한계 때문에 를 ‘강추’할 수 없다. 문제는 지금의 현실이 대중영화가 아니면 기억을 소개조차 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많은 영화비판자들은 이 점을 건너뛴다. 이런 구조적 한계를 짚지 않으면 “별로지만 보자”는 모순적인 평가를 내릴 수밖에 없다.더 나아가 영화가 천명한 ‘기억의 복원’마저 영화관 밖에서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기억의 복원은 단순히 영화를 많이 보고 ‘알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진정한 복원은 영화가 다룬 기억이 끊임없이 공동체 속에서 이야기되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일부는 영화관을 참회의 공간으로 여기며 자신들의 부채의식을 영화 속 ‘계엄군’을 통해 덜어냈고, 10대 후반의 고등학생 소녀들은 광주를 대화의 주제로 삼지 않았다. 합천에는 ‘일해공원’이 버젓이 살아있고, 사람들은 무감각하다. 오로지 몇몇 사람만이 끊임없이 영화의 부족함과 왜곡됨에 대해 작은 목소리를 내고 있다. 영화가 원한 ‘기억의 복원’은 이런 것이었을까?‘자유롭고 개명된’ 시대에 살고 있는 청소년들은 교과서를 통해, 억압된 시대를 살던 중장년층은 경험과 이야기를 통해 광주에 대한 기억을 누구든지 어렴풋이 가지고 있다. 영화는 그 기억을 한층 두텁게 만들어주지만, 그 기억과 ‘지금’을 단 한치도 연결시키지 못한다. 젊은 세대들의 입맛에 맞게 재단된 탈정치와 멜로라인은 영화 속 광주를 지금과 상관없는 시대의 흔적으로 가둔다. 전두환은 여전히 논의되지 않는다. 영화자본은 관객동원에 성공하며 목적을 달성했다. 이제 광주는 어디에서 논의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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