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상의 일부를 약으로 처방하는 동종요법사 아도르노. 그에게서는 현실에서 필연적으로 맞닥뜨리게 되는 객관적인 이율배반을 곪아터지도록 끝까지 숙성시키는 것 이외에는 달리 극복할 길이 없어 보인다. 그런 이율배반을 인식하는 것이 아도르노의 관건이었다. 진보의 반진보적인 측면을 지적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비판이라고 믿었던 아도르노의 양날을 지닌 비판의 칼을 피해갈 계제는 없는 것 같다. 그에게는 고통의 인식만 있지, 도대체 화해의 모색이란 있는지 의심스럽다. 헤겔의 변증법과는 정반대로 긍정적인 것이 산출될 수 없는 그의 변증법적 사유의 운동 속에서 긴장은 견딜 수 없을 지경에 이른다. 아도르노처럼 철두철미 변증법적인 이론가에게서는 부조리하고 자기파열적인 사유가 그 고통스러운 작업을 철회하여 짐짓 주관적인 고통을 좀더 견딜만한 것으로 만들기보다는 그의 냉혹한 이론적 입장의 속박들에 얽매여 고통받기를 택한다. 오히려 주체가 가장 주관적인 것으로 경험하는 고통은 주체에게 짐지워진 객관성으로서 그 고통을 말하려는 욕구가 모든 진리의 조건이 된다. “고통을 말하려는 욕구가 모든 진리의 조건이다. 왜냐하면 고통은 주체에게 짐지워진 객관성인바, 주체가 자신의 가장 주관적인 것으로 경험하는 것, 즉 주체의 표현은 객관적으로 매개되어 있기 때문이다(Adorno, Negative Dialektik, S. 29).” 아도르노가 말하는 고통이란, 자아가 내면의 파열에 의해 분열됨으로써 겪는 경험이다. 아도르노는 호르크하이머와의 공저 『계몽의 변증법』에서 ‘시민적 개인의 원형’인 오디세우스의 모험과 방랑을 분석함으로써 ‘주체성의 원역사’를 추적한다. 주체의 형성은 해방적이면서도 억압적인, 말하자면 야누스의 얼굴을 지닌 사건이다. 이는 인간에게서 공포를 몰아내고 인간을 주인으로 세운다는 목표 아래 예로부터 추구되어온 계몽의 이중성에서 비롯된다. 즉 진보적 사유라는 가장 포괄적인 의미에서 계몽은 신화와 자연의 지배로부터 자아를 해방시키는 한편, 그런 자율성의 추구라는 이름으로 자아 내면의 자연을 억압하는 가운데 주체는 자연과의 결별에 따라 풀려난 바로 그 자발성을 질식시키고 만다는 것이다. 이처럼 자율성의 추구 자체가 자신이 정립한 바로 그 자유를 전복시키는 아이러니가 벌어진다. 그런 개인화의 고된 노동의 결말은 자아 내부로부터의 붕괴이다. 아도르노에 따르면 계몽이라는 진보적인 사유가 본래부터 폭력적인 것일진대, 그런 사유에 대한 대안은 자체에 맞서 사유하고, 개념이 전개되면서 동시에 거부되고, 가정되는 순간 극복되고, 자체의 추론이 부정하는 것들을 환기시킬 때라야 희미하게 조명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해방된 사유는 아연실색할 아이러니이자 엄청난 부조리일 게다. 개념들에게 비개념적인 것을 열어 보이고, 그러면서도 비개념적인 것을 개념들과 등가적인 것으로 만들지 않는 사유야말로 인식의 유토피아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주체는 자유와 자율성 추구에 의해 참혹하게 훼손당한 자신의 감각성과 자발성을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까? 다시 말해서, 합리적이 된 저항으로써 돗대에 자신의 몸을 결박한 채 사이렌의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신화적 속박의 힘을 무력화하는 오디세우스는 어떻게 자발성을 회복하며, 그 노랫소리의 아름다움은 알지 못한 채 밀랍으로 귀를 봉한 상태에서 노를 젓는 부하들은 어떻게 감각성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인가? 이처럼 예술향유와 노동이 갈라진 이래로 감각작용은 내용과 관계없이 상품화된 충격가치의 문제로 넘어간다. 오늘날 자기 보존이라는 자체의 목적을 위해 가차없이 육체적 쾌락을 사물화하고 관리하는 사회적 질서에서는 육체와 그 쾌락을 아무런 의심없이 긍정적인 범주로 상정하는 것은 위험한 환상이다. 그 점을 의식하고 아도르노는 인간의 모든 의식 활동들에 수반되지만 그 활동들에 의해 소진되지 않는 환원불가능한 차원, 즉 어떤 인식의 육체적 계기를 복구하고자 한다. 그러한 수수께끼와도 같은 기획이 바로 미적인 것의 영역에서 시도된다. 미적인 것은 사유로 번역되기를 거부하면서 사유를 위한 패러다임으로서 제시될 수 있다. 파시즘과 대중사회에 의해 그 내역이 부단히 얼룩져 왔음에도 불구하고 아도르노에게서 미적 기획은 포기해서는 안될 것으로 보인다. 이제 아도르노에 있어서 예술이 지닌 함의를 밝히려는 시점에서 미학자로서의 아도르노의 사유의 본령에 비로소 접근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감각과 정신의 진지전이라 할 수 있는 미적 기획은 예술을 둘러싸고 벌어져 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특히 아도르노는 예술가가 다루는 소재를 역사적·사회적으로 매개된 변증법적 역학의 장에서 고찰하는데, 이로써 그 소재는 형성물의 합리적 형식 안에서 지배적 합리성과 전투를 벌인다. 그러한 전투의 상흔이 예술작품에게서 부정합과 불협화로 남는다. 이는 예술작품의 이질적인 두 가지 차원, 즉 모방적·감각적·표현적 차원과 합리적·구성적·조직적 차원이 서로서로 매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양자는 항상 서로 갈라지며 비동일적이기 때문이다. 이때 예술작품의 모방적 측면은 구성적인 형식들과 상호작용하면서 그 형식들에 대한 함축적 비판을 제기한다. 아울러 예술은 마치 설득력과 우연성이 뒤섞인 꿈의 이미지처럼 일종의 병렬적 논리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는데, 차이를 통해 진술하는 비유적인 방식인 알레고리로서 예술은 서로 다른 의미연관들과의 친화성을 시사하면서도 각각의 의미 단위들의 상대적 자율성을 보존하고 있다. 이와 같은 예술 자체의 내적 화해불가능성은 예술작품의 객관적 논리의 문제가 되며, 예술가라는 한 주체의 손아귀로부터 예술작품을 떼어내어 자율적인 것으로 해방시킨다. 이로써 예술작품은 사물화된 경험적 세계와 부딪히며 경험적으로 유폐된 합리성을 해방시킴으로써 오히려 이성의 폭력을 환기시키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아마도 예술작품은 합리성을 극복한다기보다는 스스로 비판하게 만드는 과정의 산물일 것이다. 언제나 그러하듯이 예술이 자율성을 획득함으로써 얻는 용납할 수 없는 특권에 대한 성찰을 아도르노가 빠뜨릴 리 없다. 오히려 예술의 자율성은 자신과 공범관계에 있는 바로 그 사회질서를 재생산하는 사물화의 한 형식일 따름이기도 하다. 예술은 단지 자신을 생산한 그 조건에 대해 함축적 비판이나 제기하며 자신의 무가치와 무기능을 내세워 역설적으로 유효성을 갖기를 바라지만, 그 유효성은 예술이 그런 조건과는 거리가 먼 특권적 상태에 있음이 환기되면서 곧 무효된다. 반대로 아도르노에 따르면, 예술은 자신이 반대하는 것과 얼마나 깊이 타협하고 있는지 말없이 인정할 때에만 진정한 것이 될 수 있다. 게다가 계급사회에서 예술이 갖고 있는 원죄와도 같은 성격, 계급적 사치나 특권으로서의 예술은 풀 길 없는 모순의 형식과 항상 새롭게 대결하고 이것을 자신의 내용으로 받아들임으로써만 진정성을 획득할 수 있다. 아직도 예술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생과 사의 중간에서 부단히 떠돌면서 자신의 가망없음을 구현해야 할런지도 모른다. 마침내 예술의 딜레마는 그 극단으로 치달아 그 수치스러운 특권과 무용함이 한계에 다다른 지점에서 오로지 부정적 비판으로 돌변하는 반전을 통해서만 겨우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것 같다. 그러한 패배직전의 승리가 베케트와 쇤베르크에게서 거둬진다. 아도르노의 계몽의 변증법에 따르면, 어떤 진보적인 사유도 계몽의 이중적 속박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음은 자명하다. 아도르노는 『계몽의 변증법』에서 계몽이 애초부터 저 퇴보의 싹을 함유하고 있으며, 따라서 계몽은 자기파괴의 길을 갈 수밖에 없음을 논증하고자 한다. 이는 ‘계몽은 이미 신화였으며, 계몽은 신화로 돌아간다’는 두 개의 명제로 요약된다. 이처럼 도저히 그 돌파구를 찾을 수 없는 비관적인 진단 앞에서 어떤 대안을 제시한다는 것은 초라하기 짝이 없는 희망으로 보이기까지 하다. 얼핏 보아 정치적 허무주의로 보이는 아도르노의 실천에 대한 병적인 거부반응에는 까다로운 단서조항들이 첨가된다. 자체에 내재하는 지배의 계기에서 볼 때 파시즘과 후기자본주의의 메카니즘을 동일시하는 아도르노의 일면적인 정치적 통찰과, 그것과는 정반대의 정교하고 풍요로운 미학 사상이 사실상 밀접하게 뒤얽혀 있는 바에야, 그의 절망은 정치적 무관심의 이론적 근거가 될 수 없다. 오히려 그런 이론의 특권적 구실에 대한 성찰을 놓치지 않는 것이 아도르노의 미덕이다. 그의 대중문화 비판을 한 회고적인 상류 부르주아 자식인의 문화적 엘리트주의에서 비롯된 귀족적 불평이라고 치부할 수 없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아도르노가 좋은 사회를 간절히 바라고 있음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좋은 사회가 부재함으로 인한 불행을 그렇게 고통스럽게 경험할 수 있었겠는가? 다만 행복에 대한 약속은, 긍정적인 것으로 나아갈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체념하거나 굴복하지 않는 부정의 사유의 힘을 통해 부단히 깨뜨려져야 하고, 그럼으로써 동시에 끊임없이 유예되어야 한다. 한 역사적 맥락에서 탄생한 사유가 오늘날에도 유효함을 말하고자 한다면, 그 사유의 시의성이 어디에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사유의 시의성은 정보를 제공하는 새로운 사건과의 경주에서 자기를 입증하는 게 아니다(Adorno, Dissonanz, S. 10).” 끊임없는 자기비판의 과정이야말로 부정의 사유가 지닌 힘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