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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와 교토에서 부르는 평화와 인권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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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와 교토에서 부르는 평화와 인권의 노래

지금에 와서 솔직하게 말하자면, 처음에는 평화 인권 캠프에 대해 많은 기대를 가지지 않았다.선배가 반 커뮤니티에 올린 캠프 소개글을 보고 참가하겠다는 연락을 할 때도 ‘평화 인권 캠프’에 간다는 생각보다는 처음 가게 될 일본에 대한 호기심이 앞섰던 게 사실이다.

지금에 와서 솔직하게 말하자면, 처음에는 평화 인권 캠프에 대해 많은 기대를 가지지 않았다. 선배가 반 커뮤니티에 올린 캠프 소개글을 보고 참가하겠다는 연락을 할 때도 ‘평화 인권 캠프’에 간다는 생각보다는 처음 가게 될 일본에 대한 호기심이 앞섰던 게 사실이다. 시간이 흘러 준비 스터디를 할 때는 캠프의 주제인 ‘일본의 평화주의와 재일조선인’이 평화와 인권이라는 말 아래서 자연스럽게 어울릴 수 있을 지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아, 캠프의 성격이 무엇인지 거리를 두고 판단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기대와 호기심과 걱정과 의문을 동시에 안은 채, 4박 5일 간의 캠프는 시작되었다.한국, 일본, 재일조선인 학생들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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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날, 개회식에서서울대 대표인 남자영(왼쪽, 사회 02) 씨와 실행위원장이자 일본 측 대표인 우에하라 다이키(오른쪽, 리츠메이칸대학교 법학부 4학년) 씨

동아시아 대학생 평화?인권 캠프는 한일 대학생들이 직접 주최하는 행사로 “현장에서 배우는 평화와 인권”이라는 테마 아래 현장에서 활동하는 전문가의 강의, 필드워크, 학생들 간 토론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 2002년 8월 제주에서 처음 개최되어 이후 매년 여름과 겨울 열렸으며, 이번 2006년 겨울 캠프는 2월 8일에서 12일까지 오사카 간사이에서 열렸다. 4박 5일 간의 이번 캠프에서 참가자들은 재일조선인과 민족교육, 일본 평화헌법과 천황제 등에 대해 전문가들의 강의를 듣고 민족학교 및 코리안 타운과 카시하라 신궁 등을 필드워크 한 후 서로의 생각을 나누는 토론의 시간을 가졌다. 첫째 날 받아든 캠프 자료집에서는 캠프의 목적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동아시아 냉전 구조 하의 국가폭력의 현장이라는 점에서 현재까지 공통점을 지녀 온 역사의 요지에서 (캠프가)개최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런 현장에서 한국, 일본, 재일조선인 학생들이 같은 강의를 듣고, 같은 현장을 걷고, 의견을 나누어 같은 시간을 공유하면서 역사와 현장을 동시에 체험하는 것, 이와 함께 평화와 인권에 대해 함께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드는 것이 본 캠프의 목적이다.’ ‘다른’사람들이 모여 ‘같은’경험을 공유한다는 것. 그리고 그 의미. 일본에 도착한 이후에도 약간 어벙한 상태가 지속되던 기자는 그제야 이번 캠프가 어쩌면 생각했던 것 이상의 경험과 의미를 남길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재일조선인 민족교육의 현장을 가다 캠프에 가기 전 한 주간지에서 연세대에 1년 간 교환학생으로 와 있었던 재일동포 학생들에 대한 기사를 읽었다. 캠프의 주제와도 연관되어 있던 그 기사를 흥미롭게 읽었지만, 한국에서 태어나 20년간 ‘한국인(더 자세히 말하자면 남한인)’으로 사회화되어 스스로의 민족적 정체성 등에 크게 고민하거나 구애받지 않고 살아온 기자에게 재일동포의 이야기는 먼 이야기였다. 특히, 그 기사에도 소개된 ‘조선적(1947년 독립국가 부재 때의 국적표시. 국제적으로는 무국적을 의미)’의 ‘재일조선인’은 어쩌면 단어 자체로 두렵고도 낯선 말이었다. 캠프 일정 가운데 ‘재일조선인’과 관련된 내용은 첫째 날 재일조선인 민족교육에 관한 강의, 둘째 날 교토조선제2초급학교 필드워크, 넷째 날 코리안타운 필드워크가 있었다. 캠프를 하면서 강의보다 필드워크에서 얻고 느끼게 되는 것이 훨씬 크다고 생각하게 되었는데, 조선학교 방문은 캠프 일정 중 가장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일본에는 초급학교에서 대학교까지 포함하여 112개의 조선학교가 있다. 조선학교는 원칙적으로 ‘조선인(남한, 북한이 아닌)’학생들을 받고 있으며 교원도 거의 대부분 조선인으로 구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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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조선제2초급학교에 대한 첫인상은 기자가 5학년 때까지 다녔던 고향의 초등학교와 매우 닮아있다는 느낌이었다. 역시 재일조선인인 교장 선생님의 안내를 받으며 수업을 참관하고, 학생들이 손님들을 위해 ‘준비한’ 악기 연주와 무용 공연을 차례로 봤다. 약간은 인위적이고 철저히 ‘준비된’모습만을 보여준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우리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노력한 어린이들의 깜찍한 모습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다. 본 것을 최대한 많이 남겨야겠다는 욕심에 열심히 카메라 셔터를 누르기는 했지만, 호기심과 욕심이 뒤섞인 표정으로 신기한 것을 대하듯 자기들의 모습을 찍는 내 모습이 시간이 흐른 뒤에 저들의 기억에는 어떤 인상으로 남을까 하는 걱정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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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정부의 재정적 지원 부재와 차별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조선학교의 현실에 대한 교장선생님의 설명을 들으면서 많은 부분 공감을 했다. 하지만 동시에 교실 벽면에 걸려있는 김정일의 사진을 보면서 복잡한 감정이 들었다. 조선학교에서 이상하게 생각한 것들 중에 또 하나는 남자 선생님들이 말끔한 양복 차림인데 반해 여자 선생님들은 모두 치마와 저고리를 입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나중에 ‘여자 선생님들이 치마 저고리를 입는 것을 차별로 생각하지 않고 민족성의 상징 정도로 생각해달라’는 교장선생님의 말을 들으면서도, 여성에게 강요된 ‘민족적 상징’의 단면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지우기 힘들었다. 조선학교에서 기자는 조금 늦게 나왔는데, 조선학교 선생님에게 질문을 하느라 역시 늦게 나온 일본인 카도 유키(APU 아시아태평양학부 4학년)씨와 잠시 동행하게 되었다. 어떤 걸 질문했는지 궁금한 마음에 물어보았는데, 조금 놀라운 대답이 돌아왔다. “아, 조선학교에서 장애를 가진 학생을 볼 수 없었던 게 이상해서 물어봤어. 장애학생을 위한 학교나 반이 따로 없는지, 있다면 어디에 있는지 그런 걸 물어봤지. 재일조선인은 일본 내에서 마이너적인 위치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그 안에서 분명 장애를 가진 조선인 학생들은 또 하나의 마이너라고 생각되거든. 이중적인 마이너라고 말하면 되려나? 선생님 대답이, 근처에 장애아동을 위한 특수학급이 있는 다른 민족학교가 있다고는 하더라.””일본은 이상한 나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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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날에는 ‘일본의 평화주의’, ‘천황제’, ‘헌법9조 개정’ 에 대한 강의를 연달아 들었다. 이어지는 강의에 지친 참가자들이 잠깐씩 졸기도 했지만(물론 기자도), 모두들 잠을 쫓으며 집중하려는 모습이었따. 개인적으로는 쿠라타 아키라 리츠메이칸대학 법학부 교수님의 ‘헌법9조 개정’에 대한 강의가 매우 인상깊었다. 일본의 평화헌법9조가 현재 가지는 의미, 어구 하나가 바뀜으로써 바뀌게 될 전체적인 내용의 변화는 법에 대해 무지한 사람에게 논리적이고 명쾌하게 이해되었다. 학자로서 ‘강연을 통한 평화운동’을 하고 있다는 교수님은 “평화의 문제는 평화적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교토시를 ‘무방비지구’로 만드는 서명운동을 벌여 큰 호응을 얻었고 비록 시의회에서 조례로 통과되지는 못했지만 ‘평화를 생각하는 우리가 다수이고 반대입장의 그들이 소수’라는 것을 확인하기 위한 노력이었다는 점에서 그 서명과정을 중요하게 본다고도 말했다. 넷째 날은 카시하라 신궁 방문이 있었다. 카시하라 신궁은 ‘관서 지방의 야스쿠니 신사’라고 생각하면 될 정도로 관서 지방 우익 단체들의 중심지라고 한다. 방문 날짜인 2월 11일은 일본의 건국기념일로, ‘일본제국의 영광’이 부활되길 바라는 우익들에게는 축제일이지만 외국인, 특히 한국인들에게는 위험한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는 날이라고 했다. 전날 밤부터 “위험할 수도 있으니 신궁에서는 한국어를 쓰지 마라, 한국인임을 들키지 마라.” 라는 주의를 들었는데 ‘설마 그렇게 위험할까?’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두려움과 왠지 모를 반감이 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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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궁 방문일 아침, 신궁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내다본 바깥 풍경은 상상 이상이었다. 거리에는 일본 군국주의의 부활을 기원하는 문구들로 뒤덮인 우익단체의 버스들이 다니고 있었고, 버스에서는 알 수 없는 노래들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혹시나 있을 지 모를 위험에 대비해 4-5명이 팀을 이루어 신궁에 들어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무리의 고압적인 인상을 가진 남자들이 짙푸른 제복을 입은 채 대형 일장기를 들고 ‘いち, に, いち, に(이치, 니, 이치, 니)’를 외치며 들어왔다. 그때, 옆에 있던 일본 친구가 “야쿠자야 야쿠자”라고 내뱉듯이 말했다. 그 사람들의 행동이, 흔히 아는 야쿠자의 모습과 꼭 닮았다는 것이다. 외부인의 입장이기에, 일본을 생각할 때 일본의 우경화나, 극우세력 등의 이미지를 함께 떠올리는 나에 비해 일본의 ‘보통 사람’인 그녀의 일상에서는생각하기 힘든 그런 모습들은 더 큰 충격으로 다가온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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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궁을 나오면서, 그 친구가 이런 말을 했다. “일본은 이상한 나라야” 일본인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다니, 궁금해져 이유를 물었다. “일상이 그렇다는 말이 아니야. 오늘 같은 날, 이런 공간, 이런 분위기를 보면, 그런 생각이 들어. 지금은 현잰데, 마치 과거 속에 온 듯한 느낌이 들어” 영광의 재현, 기억의 재생. 다른 많은 나라들의 축제 모습과는 많이 달랐던 그날, 내 눈에 비친 모습들을 보며 떠올랐던 말들이다. ‘그들’이 그렇게 되살리고 싶어 하는 것들이, 과연 누구의 영광이며 누구를 위한 기억인지 모두에게 물어보고 싶었다.남자들 어서 와서 짐 나르세요? 토론시간이 부족했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캠프의 내용은 기자 개인에게는 만족스런 경험이었다. 캠프가 끝나고, 서울대학교 참가자 중 일본에서 8년 동안 살았던 경험을 가진 조아라(경제05)씨는 “캠프를 통해 절실히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앎의 중요성이에요. 나의 무지함과 거기에서 비롯된 일방적인 판단이 누군가를 상처 입힐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라며 “앞으로 ‘알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해야할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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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본인에게도 캠프는 평소에 생각지 못했던 ‘또 다른 일상’을 체험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공식적인 캠프 일정 외에 다른 학교 학생들과의 교류나, 캠프에서 있었던 말과 행동들에서는 아쉬움이 남았다. 이동을 할 때 ‘당연한 듯’ 남학생들만이 짐을 옮기는 것, 그걸 보고도 별 의문을 가지지 않았던 대다수 학생들의 모습은 조금 의아했다. 술자리와 게임 과정에서 흘러나온 몇몇 성폭력적인 상황들 역시 받아들이기 힘들었으며 그런 문제에 대해서는 앞으로 반드시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밖에도 일정에 쫓겨 다른 학교 학생들과 충분히 이야기하지 못한 것과, 짧은 일본어 실력 탓에 여러 일본인 친구들과 깊은 생각을 나누지 못한 것도 아쉬움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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