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화를 선도하는 대학문화의 길라잡이가 되어주었으면…
광주대학교 언론정보학부 교수 최윤식캠퍼스는 가을 축제가 한창이다. 캠퍼스를 뒤흔드는 스피커 소리에 사색도 강의도 불가능하다. 오늘날 대학문화를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우울해진다. 노랗게, 파랗게 물들인 머리나 내 눈에는 끔찍 그 자체인 피어싱도 개성이라고 이해해주자. 그러나 진지한 토론보다는 고막이 찢어질 듯한 음악소리와 춤 파티로 끝나는 대학축제나 강의실 곳곳에서 울려대는 핸드폰 소리는 마치 내 인내심의 한계가 어디쯤인지를 실험하려는 듯하다. 올해 축제도 어김없이 인기 연예인이 단연 주인공이다. ‘연예 행사’의 다른 한편에선 질펀한 술판과 장터가 벌어진다. 70-80년대, 통기타와 생맥주 그리고 청바지로 대표되던 청년문화의 진원지는 언제나 캠퍼스였다. 탈춤이나 국풍과 같은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 또한 대학에서부터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었다. 대학생들의 창작곡 경연이었던 대학가요제는 우리 대중가요의 모습을 새롭게 바꾸어 놓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날 대학축제나 대학언론 등을 보면 상업화된 대중문화를 베끼기 급급하다. 대학언론은 앵무새처럼 기성 언론을 중계한다. 그것도 한 박자 늦게. 무대 위 주인공이어야할 대학생들은 객석의 구경꾼으로 밀려나있고 번쩍이는 조명과 함께 연예인들이 그 자리를 채우고 있다. 축제는 기업들의 상품 홍보의 장이 되어버렸다. 대학인들이 주체요 문화의 생산자가 아니라 객체요 소비자로! 전락하고 있다. 기성문화를 견제하고 대중문화의 선도적 역할을 담당했던 대학문화. 대학문화가 대중문화를 건전하고 진보적인 방향으로 견인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 때는 아카데미즘에 입각한 대학언론만의 시각이라는 것도 있었다. 지금 대학에는 문화는 있어도 그 문화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없다. 민중이나 노동자를 위한 문화 보다는 기업이나 자본을 위한 문화가 판을 친다. 대동의 문화 보다는 파편적이 이기주의가 판을 친다. 나는 을 잘 모른다. 그러나 이 대중문화를 선도하는 대학문화의 길라잡이가 되어주었으면 하는 바램을 보듬고 있다. 옛날 초기 잠수함에는 토끼를 싣고 다녔다고 한다. 산소 부족으로 토끼가 죽으면 대여섯 시간 뒤에는 사람도 죽는다. 의 작가 게오르규가 말한 ‘잠수함의 토끼’처럼 대학은 그리고 대학언론은 시대와 사회의 풍향계와 같은 역할을 해야 한다. 설익어도 대학생다운 도전, 창의성, 패기, 저항, 실험, 희망… 캠퍼스에서 그리고 의 책장을 넘기면서 이런 단어들이 풍기는 진한 향취에 젖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흉내는 아무리 잘 내도 아류일 뿐이다. 소설가 황순원 선생님은 그의 고희 기념 문집에 실은 짧은 수상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 안에 최상의 독자를 키우는 것은 작가인 내가 해야 할 의무중 하나다.” 이 말은 작가가 아닌 입장에서도 귀담아 들어둘만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