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들이 말하는 서울대저널

서울대 사회과학부 04학번 정효섭원래 성격이 잡다한 걸 읽는 것을 좋아한다.대학 입학 후, 월요일에 ‘대학신문’과 ‘대학내일’을 즐겨 읽고, 매달 기자인 친구를 재촉해서 『서울대저널』 최신호를 받아보는 재미에 빠져있는 독자이다.나는 서울대 내에 배포되는 다른 신문이나 잡지에서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한 채 띄엄띄엄 읽다 버리곤 한다.하지만 『서울대저널』은 유심히 읽게 되는 것 같다.

서울대 사회과학부 04학번 정효섭

원래 성격이 잡다한 걸 읽는 것을 좋아한다. 대학 입학 후, 월요일에 ‘대학신문’과 ‘대학내일’을 즐겨 읽고, 매달 기자인 친구를 재촉해서 『서울대저널』 최신호를 받아보는 재미에 빠져있는 독자이다. 나는 서울대 내에 배포되는 다른 신문이나 잡지에서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한 채 띄엄띄엄 읽다 버리곤 한다. 하지만 『서울대저널』은 유심히 읽게 되는 것 같다. 우리 학교 안에서 벌어지며 나의 피부로 실제 느낄 수 있는 문제들을 공유하는 저널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학교 곳곳에 어떤 사건에 대한 대자보가 붙으면, 나는 그 사건에 대해 ‘학내 언론매체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라는 의문을 품으며, 언제쯤 이 문제에 대해 언급할까를 기대하게 된다. 『서울대저널』은 이런 기대를 잘 충족시켜주기 때문에 이 관악캠퍼스 안에서 우리와 함께 호흡하고 있음을 느낀다. 이렇듯 『서울대저널』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은 굉장히 긍정적이다.하지만 아쉬운 점도 있다. 우선 매월 초 배포되는 『서울대저널』의 ‘부수’이다. 앞서 말했듯이 나는 『서울대저널』의 기자인 친구에게 부탁해서 저널을 받아보는 형편이다. 잠깐만 타이밍을 놓치면, 학내 곳곳에 배포된 『서울대저널』을 “건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서울대의 속내를 드러내주는 서울대저널에 언제나 고마움을 느낀다. 앞으로도 더 많은 학내 이슈들을 담아내어, 서울대 학우들 모두가 그 이슈를 공유할 수 있는 다리로서의 역할을 감당해내기를 바란다. 서울대 기계항공공학부 03학번 정새롬나는 『서울대저널』9월호에 버스에 관한 기고글을 쓴 적이 있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했던가. 이전에는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지내던 잡지였지만, 이제는 내 글이 한번 실렸다는 것 때문에 그 이후로는 『서울대저널』을 결코 가볍게 훑어 볼 수 없었다.기사 내용은 독립언론답게 중립적이었다. 학교의 입장을 대변하는 대학신문과도 달랐고, 강한 논조를 보이는 교지관악과도 분명히 달랐다. 또 바쁜 학생 기자들의 입장에서, 주간지에는 아무래도 넣기 힘들고, 그렇다고 계간지에서는 이미 늦어버리기 쉬운, 심도 있는 기사들을 적절한 시기에 볼 수 있었다.지난 달을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게 하는 ‘이달의 키워드’, 갑자기 많은 학생들을 놀래키고는 어느 새 흐지부지 지나가 버린 농활철수의 속 이야기, 그 어디에도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지 않던 서울대 정보화의 현 실황, 47대 총학생회의 운영에 관한 설문조사 등 참신한 기사들이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도서관 토론회 기사처럼 기자가 직접 배심원으로 참여하는, 누구보다 그 주제에 관해 확실히 알고 기사를 쓰겠다는 마음가짐도 좋게 느껴졌다.하지만 『서울대저널』에 있어 가장 불만스러운 것은 발행부수이다. 301동에서는 발행소식을 듣고 다음날 바로 찾아봐도 서너 부 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월간지로서, 적어도 일주일 이상은 그 자리에서 사람들을 기다려 주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많은 사람들이 읽을거리에 목말라 하는 301동에서는 특히 그렇다.고려대 사회과학부 03학번 오보애 친구에게서 『서울대저널』을 받아들었을 때 가장 먼저 시선을 끄는 부분은 ‘여성’에 관한 칼럼과 기사였다. 그 중 지난 9월호에 실렸던 달빛시위에 관한 글은 기자의 생생한 체험과 참신한 시위의 내용을 담아내어 매우 인상적이었다. 칼럼 ‘젠더앤더시티’ 또한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듯한 시원한 글로 읽는 동안 연신 나의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었다. 하지만 여성주의란 말도 낯설고 그 인식도 매우 부족한 현실에서 이 글이 혹자에게는 조금은 감정의 편에 치우친 과격한 이야기로 들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성주의에 대한 인식을 차근차근 불어넣어줄 수 있는 목소리로, 여성주의가 궁극적으로 무엇을 원하고 추구하는지 이해하고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도록 하는 건 어떨까. 다양한 연재기사들도 흥미로웠다. 특히 한 학기 동안 특집으로 연재하는 ‘NGO꼬레아’와 ‘지금일본은’은 대학생들의 현재 관심사를 잘 잡아내어 그것을 문화, 역사, 사회 등 다각적인 시각에서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또한 『서울대저널』에서 다루고 있는 학교의 실태와 문제점, 숨겨진 서울대의 문화에 대한 소개들을 접하면서 낯선 학교에 대해 알아가는 즐거움과, 같은 문제로 고민하고 같은 문화를 공유하고 있다는 연대감을 느낄 수 있었다.나와는 멀게만 느껴졌던, 다르다고 생각했던 누군가들을 알아가는 기쁨을 맛보게 해주는 『서울대저널』의 70호 발행을 축하하고, 앞으로도 『서울대저널』의 살진 결과물들이 지금까지처럼 계속되기를 기대한다. 군인 박준희 정보의 수혜자인 나의 입장에서 『서울대저널』을 평가하기란 참으로 ‘성은이 망극한’ 일이다. 그러나 조심스럽게나마 몇 마디 해볼까 한다. 우선 풋풋하면서도 역동적이고 전문적이기까지 한 하나의 ‘작품’을 탄생시키는 저널 기자들의 열정과 작품의 이면에 느껴지는 기자들의 다리품, 지적고뇌, 작문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들이 진정한 성장과 성숙의 구심점에 있구나 하는 감명을 받았다.그러나 자신의 주장이 짙게 배어 있는 기사를 쓰는 것은 역동성과 생동감을 주는 반면, 정보전달의 측면에서 편중된 입장 전달로의 변질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에 대한 작은 대안을 생각해보자면, 기사에 대한 응답을 열어두는 개방성을 두는 것은 어떨까. 인터넷을 개방하여 ‘몇년 몇월호의 OO기사’에 대한 독자의 다양한 반응, 투고 등을 수렴하여 다음호에 이르기까지 기사의 연계를 형성하는 것이다. 독자들은 하나의 주제에 대한 보다 다양한 입장을 접하고, 심도 있는 객관성의 확보에 흥미를 느끼고 진지함을 경험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저질의 비방일변도의 역기능이 발생할 가능성도 있다. 그러므로 절대 감정섞인 입장을 보여서는 안 될 것이다. 학내에서 활동하는 언론으로서 학생들의 참여와 유도를 이끌어 내는 것이 일방적인 수/시혜자의 관계를 탈피하는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또 월별 BEST 명제를 따로 특별호로 편집하여 의견교환의 상황을 한 눈에 볼 수 있게 하는 것도 흥미로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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