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코너]

사안에 대한 총체적인 접근이 아쉽다이정오(사회 03) 서울대저널(이하 저널)을 보면 이걸 만든 사람들의 노력에 대한 감탄이 먼저 나온다.많은 이들이 보고 있기에 나름의 책임감을 가지고 임하고 있으리라 믿으며 앞으로도 계속 그 자세를 잃지 않기를 기원한다.이런 기대와는 별개로 저널의 기사를 보고 있으면 아쉬움이 남는다.잘 모르고 있었거나 그 동안 관성적으로 넘어갔던 사실을 일깨워주는 기사를 볼 땐 예리한 시각을 느끼기도 한다.

사안에 대한 총체적인 접근이 아쉽다

이정오(사회 03) 서울대저널(이하 저널)을 보면 이걸 만든 사람들의 노력에 대한 감탄이 먼저 나온다. 많은 이들이 보고 있기에 나름의 책임감을 가지고 임하고 있으리라 믿으며 앞으로도 계속 그 자세를 잃지 않기를 기원한다. 이런 기대와는 별개로 저널의 기사를 보고 있으면 아쉬움이 남는다. 잘 모르고 있었거나 그 동안 관성적으로 넘어갔던 사실을 일깨워주는 기사를 볼 땐 예리한 시각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저널의 일부 기사는 말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이번 호의 표지를 넘기면 작은 입시라는 글이 있다. 이 글은 저널의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누구를 뽑을지 고민하는 것보다는 무엇을 줄지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는 것으로 마무리 짓고 있다. 결국 선발과 관리를 대립시키면서 선발에만 신경을 쓸 것이 아니라 관리를 잘해서 인재를 만들어나가는 것을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과연 이것이 논의의 핵심을 짚어낸 것인지 의심스럽다. 우선 선발과 관리라는 측면의 대립은 논리에 맞지 않는다. 선발과 관리 모두 현재 사회에서 교육이 어떤 내용을 가져야 하며 어떤 역할을 담당해야 하는지에 대한 결론에서 나온다. 대학 수업은 사회에 학생들을 잘 팔기 위해 필요한 내용들로 채워지고 있다. 현실을 실감하는 학생들의 생존전략으로 부자동아리, 금융부분 관련 학회 등도 늘어나고 있다. 이미 선발과 관리는 충분히 일치되어 있는 현실에서 대학의 자율성을 말해봤자 그 방향은 이미 정해져 있다. 이미 서로 다른 전제에서 출발하는 두 집단이 있다. 한 쪽은 대학을 인간상품을 만드는 공장으로 만들고 그 공장에서 기업들에 구미에 맞는 상품을 생산해내는데 혈안이 되어있다. 그들에겐 등록금을 인간상품에게 부담시키는 것은 기업의 짐을 덜어주기 위한 당연한 조치일 것이다. 더불어 사회 문제를 고민하는 사람을 만들어낼 생각조차 않는다. 시장에서 사람들의 피땀이 아무도 모르게 없어지고 있는데도 이 문제에 대해 탐구하는 수업은 없다. 그 뿐인가 비정규직이 전체 노동자의 50%가 넘고 사회의 중요한 쟁점이 되고 있지만 이 현실에 대해 학생들에게 판단력을 길러 줄 수 있는 수업은 준비되어 있지 않다. 때문에 다른 한 쪽에서 등록금이 올라가는 현상에 반대하고 돈 되는 학문만 만들어내려는 다양한 시도들에 대해서 저지하려고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저널의 이번 교육기사는 그 목적이 사실관계의 확인에 있는 듯 계속되는 나열과 현실에 대한 명확한 판단이 없는 누구나 말할 수 있는 준비와 소통에 대한 강조였을 뿐이다. 덕분에 이번 교육에 대한 기사들로는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인지를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현재의 교육구조조정에 대한 총체적인 파악도 불가능하다. 저널이 현실과 민감하게 연관되어 있는 부분들을 자주 다루는 것을 생각할 때 아쉬움은 커져만 간다. 기사를 객관적으로 쓰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현실을 총체적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것이 객관적인 것은 아닐 것이다.

댓글 댓글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

Previous Post

익숙해짐의 무서움

Next Post

바쁜 일상에 쉼표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