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내 운영체제 개편 이외에도 정운찬 총장은 여러 가지 개혁정책을 내놓았다. 취임 초부터 ‘지역할당제 도입’ 발언으로 매스컴을 떠들썩하게 했던 그는, 지난 1년간 몇가지 굵직한 정책을 내놓으며 모종의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정 총장이 이끌고 있는 서울대의 변화는 지금 어디까지 와있으며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지난 1년간 추진되어왔거나 앞으로 추진될 예정인 일련의 정책들을 보면, 한국사회에서 서울대가 갖는 위상과 역할에 대한 정 총장의 생각과 그가 머릿속에 그리는 서울대의 청사진을 엿볼 수 있다. 지역균형선발제 – 다양성 속에서 더 우수한 인재가… “경상.전라.강원 등 인구비례로 쿼터를 둬서 학생을 뽑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정 총장이 취임 초에 언급한 지역할당제 구상은 신입생 선발시 주(州)당 쿼터를 배정하는 미국대학을 모델로 한 것으로서, 지나치게 평등주의적 발상이 아니냐는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1년이 지난 지금, 지역할당제 구상은 ‘지역균형선발제’라는 약간 다른 개념으로 2005년 입시요강에 포함된 상태다. 지역균형선발 전형은 내신성적 우수자를 대상으로 모집 정원의 20% 내외를 선발하는 것으로서 지역별로 쿼터를 배정하는 지역할당제만큼 파격적인 제도는 아니나, 수능·면접점수가 상대적으로 낮은 지방 고교생이 이 전형을 통해 보다 유리한 조건에서 경쟁할 수 있다는 것이 서울대 측의 설명이다. 서울대는 이 제도를 통해 ▲다양성 속의 창의력 개발을 통한 교육 효과 증대, ▲지역적·사회경제적 교육환경의 불균형 완화, ▲잠재적 능력을 갖춘 인재들에 대한 공정한 교육기회 제공 등의 효과를 기대한다고 밝혔는데, 정 총장은 이 가운데 특히 첫 번째 효과에 방점을 찍는다. 그는 최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 제도의 원래 취지는 사회적 약자 배려가 아니라 수월성(秀越性) 추구다. 서울대가 경쟁력을 가지려면 학내 구성원을 다양화해야 한다.”라고 말하여 그러한 입장을 분명히 했다. 또한, 이 제도의 도입으로 서울대 입학생의 학력이 더 떨어지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 “그렇지 않다. 내신도 학습 능력의 척도”라고 대답함으로써, 그가 최우수 인재 선발이라는 측면을 희생한 것이 아님을 암시했다. 바로 이러한 면 때문에 지방 국·공립대들은 이 제도가 지방 인재를 독식하려는 발상이라며 일제히 반발하고 나섰다. 이에 정 총장은 “이르면 2005학년도부터 입학정원을 감축할 예정이기 때문에 지역균형선발제로 인한 지방대의 피해는 없을 것”이라고 반박하고 있으나, 지역균형선발제가 서울지역 사립대들로 확산되어 지방대의 위축을 가져올 것이라는 우려는 사라지지 않고 있다. 미국식 학부대학- 현대사회에 적합한 엘리트 양성 정 총장은 “이르면 오는 2005년도부터 학부대학 시스템을 일부 대학에 도입해 운영할 계획”이라고 밝혀 대대적인 학제개편을 예고했다. 그가 말하는 ‘학부대학(University College)’의 모델은, 인문·사회·자연과학 중심의 학부대학과 응용학문 중심의 전문대학원을 동시에 운영하여 세분화된 전공교육은 대학원에 맡기고 학부에서는 폭넓은 기초교양 교육에 중점을 두는 미국 아이비리그 대학들이다. 현재 그가 추진중인 계획은, 2학년 때까지 기초교양 중심으로 폭넓게 가르치고 3학년 때 전공을 선택하게 하는 학부대학제도를 도입하고, 동시에 응용학문 중심의 전문대학원-법학, 경영, 의학 전문대학원-을 만들겠다는 것. 정 총장의 ‘학부대학’ 구상은 지금처럼 학사과정에서 세분화된 전공교육을 하는 체제가 현대사회에 부적합하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세상이 불확실성으로 가득 차 있고, 지식·기술 발전 속도가 굉장히 빠르기 때문에 대학에서 응용학문 중심으로 세분화해서 가르치면 졸업 후에 세상의 변화에 적응하기 힘들다(대학신문과의 인터뷰 中)”는 것. 인문대 학장 이태수 교수(철학과)는 이러한 취지에 적극 지지를 표하며, 이 제도에 크게 반대하는 교수는 많지 않은 것 같다고 말한다. 그러나 경영대의 경우 학사과정을 없애고 전문대학원을 설치하는 데 대해 부정적 반응을 보일 가능성이 높아 앞으로 적지않은 논란이 예상된다. 또, 일부 비인기학과의 경우 특정 전공에 학생이 몰리는 현상이 더욱 심화될까 우려하고 있다. 몇 달 전 전국 국공립대 인문대학장 협의회에서 “순수 학문을 보호하기 위해 학부제를 폐지하고 학과제를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선 것은 비인기학과 교수들의 그러한 불안감을 대변하고 있다. 한편, 학생들 사이에서는 ‘학부대학’에 대한 여론이 그다지 좋지 않다. 충분한 준비없이 파행적으로 시행된 모집단위 광역화가 학생들의 격렬한 반대투쟁에 부딪쳐 온 가운데, 대부분의 학생들은 정 총장의 ‘학부대학’ 구상과 현재 실시되고 있는 모집단위 광역화 사이에 차별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 사회대 03학번 박 모 학우는 취직이 잘 되고 전망 좋은 과로 들어가려는 경쟁이 더 심화될 것을 우려하며, 1, 2학년 때 기초교육을 ‘잘’ 받을 수 있을지도 의문이라고 덧붙였다. 실제로 지금 광역화가 실시되고 있는 단대에서 전공진입 이전의 기초 교육과정이 부실하다는 점도 학생들의 불만 가운데 하나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서울대 측에서는 2학기부터 핵심교양 과목을 100개로 대폭 늘리고 내년부터 말하기·토론교육을 실시하는 등 기초교양 교육 프로그램을 내실화할 계획이다. 정원 감축- 교육의 질을 높이기 위해 정운찬 총장은 앞으로 서울대 대학원 및 학부의 정원을 줄이겠다고 말한다. 하버드 등 미국 대학들이 선발하는 신입생 수가 기껏해야 1500명인데 서울대는 4000명으로 지나치게 많으며, 대학원 또한 그동안 질적 성장없이 양적으로만 팽창, 구조조정이 필요한 상태라는 것이다. 이같은 정원 감축 계획의 일차적 목표는 “질적인 성장”이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제대로 된 교육을 할 수 없으니 학생 수를 줄이고 교육 및 연구활동의 질을 높이겠다는 것이다. 현재의 서울대가 지나치게 비대하다는 사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감하는 부분이다. 또, 총학생회장 박경렬 씨(응용화학·98)는 “대학교 입학 연령의 인구 자체가 크게 감소하여, 정원감축은 한국 대학들의 전반적 추세”라 말하며 서울대 정원감축의 또다른 의미를 설명했다. 그러나 현재 서울대가 지닌 독점적 위치를 그대로 유지하며 학생 수를 줄인다는 것은, 결국 더 적은 사람이 더 강력한 특권을 누리며 서울대의 입지를 강화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없지는 않다. 결과적으로 현재 서울대에 집중된 자원을 지금보다 적은 학생들이 일인당 더 많이 누리게 될 것이며, ‘서울대생’의 희소성 자체도 높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정원 감축이 기대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지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이태수 교수는 “학생 수를 줄이면 기성회비도 줄어든다. 정 총장이 재정확충에 힘쓰겠다고는 했지만, 현재 서울대 예산에서 기성회비가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만큼, 교육의 질이 기대한만큼 향상될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각 정책들을 관통하는 일관된 흐름- 엘리트주의 앞서 설명한 각 정책들은 그 기본적 목표가 최정예 엘리트 양성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정운찬 총장은 스스로 여러번 밝혔듯 ‘어느 시대든 사회를 이끌어가는 엘리트가 있으며 서울대가 그 엘리트를 키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은 결국 서울대의 특권적 지위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의 비판을 받는 한편, (특권을 받을 자격이 있는) 진정한 엘리트 양성소로 거듭나겠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또다른 사람들의 지지를 받는다. 일단 서울대 교수들은 대체로 지지를 보내는 쪽이다. 그러나 서울대 학생들이나 서울대 바깥의 반응은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 얼마 전 “대학서열 철폐는 포퓰리즘”이라는 정 총장의 발언을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이 이를 반영한다. ‘학벌없는 사회’ 등 시민단체들과 몇몇 단대 학생회를 비롯한 일부 서울대생들이 ‘정 총장이 학벌주의를 옹호한다’며 망언 규탄에 나서자, SNUlife게시판에 글을 올린 많은 서울대생들이 이에 격렬한 반대의견을 표했던 것이다. 박경렬 씨는 서울대가 엘리트교육을 담당해야한다는 생각에 “어느 정도는 동의한다”고 하면서도, 지금과 같이 기초·응용학문을 포괄하는 ‘모든’ 분야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끌어가는 파워엘리트를 서울대에서 모두 키우겠다는 것은 매우 잘못된 발상이라 말하며 바람직한 모델로 프랑스의 그랑제꼴을 들었다. 이처럼 학내외의 여론이 복잡하게 엇갈리는 가운데, 정 총장이 이끄는 서울대는 최정예 엘리트 양성소를 목표로 변화의 발걸음을 내딛을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