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퓰리즘이란 무엇인가. 알기 쉽게 해석하자면 대중영합주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대중이란 무책임하고 선동적이고 가변적이며 즉흥적이기 쉽다. 따라서 포퓰리즘이라고 하면 사태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결여된 채로 표피적인 감정에 호소함으로서 상황을 오도하는 대중 정치인이나 언론인이나 연예인 같은 부류에 대해 비난할 경우에 쓰인다. 한편으로 현대는 정보가 넘쳐나고 있으며 신속히 전달되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대중주의로 나아갈 수 밖에 없고 민주주의는 대중의 뜻을 존중하는 정치제도이기 때문에 포퓰리즘을 무조건적으로 비난할 수만은 없다고 하는 주장도 있다. 다수가 원하면 배가 산으로 가도 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포퓰리즘이 이성에 입각하기 보다 감정에 호소하는 것이라면 아무리 대중민주주의 시대가 되었다고 해도 환영받을 만한 것은 못된다. 자칫 중우(衆愚)에 떨어질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서울대학교 정운찬 총장이 7월 22일자 동아일보 인터뷰에서 학벌타파 주장이나 대학의 서열철폐 주장에 대해서 한마디로 포퓰리즘이라고 격하시키고 서울대학교 폐교는 어려울 것이라고 단언했다. 우리는 대학의 서열 철폐를 주장하지 않으므로 이 부분에 대해서는 자세히 언급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대학의 서열이 유연하고 가변적이며 사다리꼴을 닮기를 바란다. 이런 서열은 대학들이 열심히 노력하면 서열상승을 기대할 수 있게 되고 그렇게만 된다면 모든 대학들이 최선의 노력으로 전체의 수준을 높이고 이익을 가져올 것이라고 본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대학들은 서열이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큰 눈으로 보면 하나의 대학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고 서열이라는 말 자체가 의미가 없다. 대학간의 위계 혹은 계급만 존재한다고 말해도 될 것이다. 정 총장이 학벌타파 운동을 포퓰리즘이라고 폄하한 것은 학벌타파 주장을 학벌을 가지지 못한 자들의 열등감의 발로라고 하는 극단적인 학벌주의자들의 말과 같다. 학벌타파 주장이 무슨 내용을 담고 있고 무엇을 고치고자 하며 어떤 사회를 건설하고자 하는지 하는 것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학벌없는 다수의 한을 선동해 사회의 엘리뜨의 입지를 허물어버리고자 하는 불평불만분자들의 하소연 쯤으로 치부해 버리는 것이다. 아무리 우리 사회가 학벌사회이고 그 연원이 조선의 문벌주의에 있고 학벌주의가 21세기 우리사회 속에 용해되어 있는 전근대적 봉건성의 현대적 표현이라고 해도 마이동풍이다. 일제가 양반사회를 흡수해 통치에 이용했고, 긴 기간의 군사정권이 고등교육에 대한 국가주의로 학벌을 양성해 독재정권의 하수인으로 이용했드시, 정치권력과 고등교육의 유착에 의한 또 하나의 특수한 신분계급의 등장이라는 주장에 대해서도 묵묵부답이다. 구 소련의 노멘 클라투라라든지 북한의 공산당원 같은 게 오늘날 한국의 국가학벌이다. 그래서 국민의 세금으로 국가경영 엘리뜨를 양성해서 공급하는 것이다. 민간영역에서의 배출을 용인하지 못한다. 국립대학의 존재의 정당성을 엘리뜨 공급에서 찾아야 한다고 강변하고 있지만 바로 그 엘리뜨 양성을 민간영역에서 의지와 열정이 넘쳐나고 있을 때 넘겨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그럴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는다. 서울대학교가 오늘날과 같은 위치를 차지한 결정적인 요인은 내부가 아니라 외부에 있으며 정확히는 국가권력이라고 할 수 있으며 국가공권력의 부당한 행사의 결과다(서울대학교는 법도 아닌 영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언젠가 우리는 이런 문제도 세심하게 물을 날이 오리라고 본다. 어쨋든 우리가 학벌타파를 주장하며 동시에 서울대학교의 존재의 근거를 묻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무슨 이유로 국립대학이 있어야 한단 말인가. 학벌은 군벌이 가고 재벌이 가고 남은 마지막 패거리이고 우리 사회가 씻어내야 할 나쁜 유산이다. 그러나 사회의 지도자들 중에는 정총장처럼 에리뜨 주의의 필요성을 장황하게 설명하면서 사회개혁이고 정치개혁인 학벌타파와 교육개혁에 대해 찬물을 끼얹는 경우가 많다. 누가 엘리뜨주의를 부정하는가. 민주주의 시대는 엘리뜨주의를 거부하는가. 엘리뜨주의는 학벌타파와 양립할 수 없는가. 일방적으로 엘리뜨주의를 내세우면서 학벌타파 주장을 배척하는 것은 스스로의 존재근거의 없음을 드러내는 것밖에 안되고, 학벌타파 주장의 내용을 모르는 무식의 소치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진정한 엘리뜨란 패거리문화와는 거리가 멀다. 대학입학시점이나 졸업시점 혹은 고시패스시점에서 굳어지는 엘리뜨가 아니라 각자의 분야에서 10년 내지 20년의 장구한 세월에 걸쳐 스스로 쌓은 업적에 의해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명예 그리고 그 소유자들이 엘리뜨인 것이다. 간판과 서열과 파벌을 두려워 않는 진정한 현대의 영웅으로서 대중의 사랑을 받는 엘리뜨가 구세주처럼 우리에게 다가오기를 기대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