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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개의 메콩강 지류가 합쳐져 유유히 흐르는 곳, 캄보디아의 수도인 프놈펜에서 비포장도로를 40분 남짓 버스로 달려 이곳 칸달 프로빈스(Kandal Province)의 작은 마을인 코 크로배이 빌리지(Koh Krobey Village)에 도착하였다. 우리가 앞으로 3주동안 머물게 될 숙소앞에는 우리를 반겨주는 아이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집으로 들어가는 우리에게 손수만든 자스민 꽃 팔찌, 목걸이를 건네주는 이들의 환대가 버스 창밖으로 보아온 새로운 풍경에 대한 낯설음을 어느새 따스한 감동으로 바꿔 놓는다. 나는 지난 해 8월부터 동남아시아의 경제, 문화의 중심지인 싱가포르의 국립 싱가포르 대학에서 교환학생으로 재학 중이다. 앞으로 다가올 12월 한 달 간의 방학을 어떻게 알차게 보낼까 학기 초부터 고민이었다. 너무나 많이 발전되어 동남아의 정취를 느낄 수 없는 싱가포르에서 벗어나, 좀 더 동남아시아 특유의 문화와 생활에 젖어들고 싶었다. 마침 이 곳의 공동체 봉사동아리인 ‘로타렉트 클럽’에서 겨울방학 동안 캄보디아에 학교를 짓는 프로젝트에 참가할 사람들을 모집한다고 하여 지원하였다. 선발된 우리 28명은 캄보디아 현지 ‘로타렉트 클럽’의 구원 요청으로 앞으로 3주간 이곳에서 숙박하며 초등학교 아이들에게 무료로 영어를 가르쳐 줄 수 있는 학교를 지어야한다. 지금까지 영어 수업은 현지 ‘로타렉트 클럽’의 자원 봉사자들에 의해 일주일에 한두 번씩 주민들의 집을 번갈아가며 빌려서 진행되어왔다. 그러나 학생수가 백여 명으로 불어나게 되자, 이들을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는 것이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된 것이다. 이 마을에 도착한 첫날, 앞으로의 일정에 앞서 이웃들과 얼굴을 익히고 친해질 수 있는 잔치가 마련되었다. 식사당번이 음식을 만드는 동안 마을의 어른들과 아이들이 함께 준비한 캄보디아의 민속음악이 아쟁과 비슷하게 생긴 현악기, 배의 형상을 띠고 있는 가야금, 자그마한 손바닥 크기의 북 등 전통악기로 연주된다. 여기에 가미된 10살 남짓 여자 아이의 캄보디아 특유의 흐드러진 노랫가락으로 긴장했던 마음을 풀어본다. 곧 마을 아이들이 음악 장단에 맞추어 손의 움직임이 매우 묘하고 아름다운 전통춤을 추기 시작하였고 우리들의 팔목을 잡아 춤판으로 이끈다. 부끄러워 마지못해 춤을 같이 추기 시작한 우리들, 아이들과 눈웃음을 주고받으며 조금씩 춤의 동작을 따라해 본다. 첫날 향연의 즐거움이 무색하게도 다음날부터 우리가 맞닥드린 현실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았다. 우리의 숙소는 마을의 주민이 빌려주신 2층 가옥이다. 현대식으로 지어진 집이었지만 2층의 화장실은 수도가 고장이 나 샤워을 하거나 변기의 물을 내리기 위해서는 아래층으로부터 물을 길러 와야 한다. 수돗물 비슷하게 공급받는 생활수는 강물이어서 식수로 사용할 수 없다. 이 강물마저 밤에는 공급이 충분히 되지 않으므로 아침부터 커다란 독에 물을 받아 놓아야 한다. 부족한 생활수로 샤워는 하루에 한번, 두 양동이의 물 사용으로 제한한다. 전기의 공급도 충분치 않아 여러 밤 정전이 되는 밤도 잦았다. 학교가 세워질 장소는 숙소에서 5분 남짓 떨어진 강 비탈이다. 이미 기부가 될 콘크리트 빔(beam)이 세워져 있다. 현장에는 이미 섭외된 현지 건설업자 분들이 우리를 기다렸고, 이들과 함께, 학교는 이곳에서 가장 흔한 건축양식인 수상촌락의 가옥 형태로 짓는다. 가장 먼저 할 일은 자재를 나르는 일. 얼마 먼 거리는 아니지만 도로에서 건축 장까지 여러 크기의 나무 빔과 판자 등 자재를 옮긴다. 7~8미터는 족히 됨직한 통나무 기둥을 어깨에 함께 메고 발걸음을 맞춰가며 운반한다. 여럿이 같이 운반을 함에도 불구하고 중간에 두어 번 쉬어가야 할 만큼 통나무의 무게가 어깨와 손을 압박한다. 콘크리트 빔 위에 굵기가 15cm x 15cm인 긴 나무 빔을 가로와 세로, 수직으로 놓아 집의 골격을 만든다. 이 골격 사이사이에 두께가 반인 나무 빔으로 채우고, 그 위에 판자를 놓아 못질로 고정하여 집의 바닥면과 옆면을 만들어 나간다. 이런 식으로 나무를 짜 맞추기 위해서 길이를 정확히 측정하여 필요한곳에 끌질을 하여 홈을 파는 일이 선행되었다. 바닥과 벽이 만들어졌으면 이제 지붕을 만들 차례. 지붕의 골격도 바닥과 같은 방식으로 만드는데, 이때 골격의 재료로 가볍고 탄성이 뛰어난 대나무를 사용하였다. 이어 갈대가 약 길이 1미터, 굵기 1센티미터의 나무 막대에 한쪽 방향으로 50cm가량으로 촘촘히 묶어 놓은 것을 지붕의 면으로 사용한다. 이것을 15cm 간격으로 고정되어있는 지붕의 대나무 골격에 아래로부터 위로 묶어나가 갈대가 겹겹이 층을 이루며 지붕을 덮는다. 마치 과거의 초가와 비슷하리라. 너무 약하게 집을 짓는 것은 아니냐는 물음에 현지 건축업자는 앞으로 10년은 문제없을 거라고 말한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그때까지는 이 나라의 경제가 발전하여 더 좋은 공간에서 공부할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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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의 일과가 끝나고 숙소로 돌아와서는, 찾아온 아이들과 함께 수건돌리기, 쎄쎄쎄와 비슷한 이곳 아이들의 놀이로 웃고 떠들며 시간을 보낸다. 인터넷과 텔레비전이 아닌 사람과 함께 서로를 알아가며 웃는 웃음과 즐거움은 우리들 모두가 오랜만에 얻는 신선한 유희였다. 이렇듯 아무 거리낌 없이 우리를 친구로 맞아준 아이들, 이들은 정부에 의해 운영되는 초등학교에 다닌다. 아침 7시부터 11시까지 오전 수업을 듣고 집에 와서 점심을 먹은 후, 다시 오후 1시부터 4시까지 학교에 가서 오후 수업을 받는다. 하루에 약 1,500~2,000 Riel(캄보디아의 화폐단위로 4,000Riel은 US$1에 달한다)의 수업료를 내게 되는데, 이들이 속한 가정의 한달 가계소득이 약 10,000에서 30,000Riel($2.5~5)인 것을 생각할 때 적지 않은 액수이다. 그래서 이 아이들은 스스로 가계 활동을 해야 한다.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면, 자스민 꽃 봉우리를 따서 실로 엮어 목걸이, 팔찌 등을 만든다. 이렇게 만든 수공예품을 도시 근처에 있는 고급식당에 가지고 가서 팔거나 불교 행사가 있는 날 사원에 가서 부다에게 드릴 공물로 판매한다. 부모님의 보살핌으로 별 어려움 없이 생활해 온 우리와는 달리 이곳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스스로 돈을 벌어야 하는 운명이다. 하지만, 이들은 도시 외곽 슬럼가에 살고 있는 아이들에 비하면 행복한 편이다. 학교를 거의 다 지어갈 무렵 우리는 프놈펜의 외곽에 위치한 슬럼가를 찾았다. 이 슬럼가에 프랑스인 중년부부가 설립한 학교에 들어서자 그동안 신문이나 텔레비전을 통해서 보아 온 헐벗고 굶주린, 기아에 허덕이는 아이들의 모습이 바로 내 눈앞에 보였다. 아침을 얻어먹기 위해 학교를 찾은 아이들로 자그마한 운동장이 붐볐다. 제대로 씻지 못한 몸과 헝클어지고 기름져 갈라진 머리카락들…… 배식을 받기위해 아이들은 한 줄로 모여섰다. 깨끗한 물, 세제가 풀린 물, 그리고 다시 깨끗한 물의 순으로 3분의 2쯤 채워진 3개의 큰 대야를 차례로 지나가면서 손과 식기를 씻은 후, 배식대로 가서 오늘의 메뉴인 쌀밥과 긴 소세지 한개, 썰어진 오이 2조각을 접시에 받아들고, 끝에서부터 차례로 테이블을 채워 앉는다. 4살 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옆에 다가와서 꼬리를 흔드는 개에게 소세지를 한입 주려고 하다가 그만 전체를 빼앗겨 버렸다. 울상이 된 아이에게 중년의 프랑스 부인이 다가와서 아이를 달래고 의자에 앉혀서는 먹는 것을 도와준다. 이 아이들은 캄보디아의 변방에서 수도로 일자리를 찾기 위해 몰려온 가정의 아이들이다. 이들의 부모는 낮에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나가야하기 때문에, 아직 어린 아이들이 돌보아줄 사람도 없이 비슷한 또래와 어울려 하루를 보낸다. 프랑스 부부는 아이들에게 하루 세끼의 음식을 제공하는 일을 자원해서 하고 있다. 쓰레기 더미 바로 옆에 자리 잡은 이 슬럼가의 사람들에게 쓰레기 더미는 또 하루를 살아가게 해주는 생계 수단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 쓰레기 더미를 뒤져 재사용할 수 있는 물품을 찾아낸다. 아직 뚜렷한 일거리를 얻지 못한 사람들은 이렇게 찾은 사용가능한 물품을 팔아 생계를 이어가기 때문이다. 이 사람들이 막 도착한 쓰레기 트럭의 하치물을, 우리가 갓 구워낸 빵의 향기에 즐거워하듯 반기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인간의 기본권조차 보장되지 않고 있는 이곳에서, 굶주린 사람들은 쓰레기 더미에서 음식을 찾아 먹기도 한다. 막 풀어헤친 쓰레기 봉지에서 찾아낸 음식을 입으로 넣어 삼키는 장면은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었다. 1953년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이 후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내전과 테러, 쿠테타, 외세의 침입, 대량학살을 겪었던 나라. 그렇기에 이들에게는 발전의 시간도 없었고 늘 가난에 허덕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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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주라는 배움과 노동의 시간이 지날 무렵, 처음 도착했을 때 휑하게 콘크리트 기부만이 있던 이곳에 빨강, 파랑, 흰색으로 화려하게 페인트 칠 된 우리들의 학교가 만들어졌다. 그동안 피곤했던 몸과 마음을 쉬이며, 과거의 찬란했던 캄보디아인들의 문화적, 경제적 번영을 잘 나타내주는 앙코르 왓의 돌담길을 걷는다. 이 나라에 전쟁이랑은 없었다는 듯이 고요하고 평화로운 일몰을 보며 피폐한 캄보디아의 현재가 우리가 잊지 말아야할 지난 날 우리의 조부모님들의 과거가 아니었는지 생각해본다. 값진 경험과 인연들을 가슴에 담고 싱가포르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그동안 정들었던 친구들과 크리스마스 캐롤을 불러 승객들을 깜짝 놀라게 하고 1시간여 비행 후에 싱가포르에 착륙했다. 기숙사로 돌아오는 택시에서 창밖으로 보이는 메트로폴리탄의 모습이 반갑게 느껴진다. 마치 방금 우리나라의 60년대로 타임머신 여행을 하고 돌아온듯…. 이제 2주 여의 시간이 지나면 국립 싱가포르 대학에서의 두 번째 학기가 시작된다. 책상정리를 하다가 코 크로베이 마을의 여자 아이 테리쓰(Thearith)가 준 카드를 다시 열어본다. 검은 보드지에 금색 실로 학의 무늬를 수놓은 장식.. 그 동안의 경험이 영사기의 필름이 돌아가듯 머릿속을 스친다. 왠지 이들에 대한 기억으로 이번 학기는 좀더 풍성할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