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60년, 에피소드로 보다

1946년 개교 이래 설립 59주년을 맞이하는 서울대학교.그동안 서울대 곳곳에 어떤 사연들이 서려 있을까.scene 1.자하연의 오작교를 함께 건너는 커플은 깨진다.자하연이라는 명칭의 ‘자하’는 어디에서 유래된 것일까.관악인이라면 한번쯤 가졌을 법한 궁금증이다.현재 관악캠퍼스 자리는 행정구역상 신림동에 소속되지만 1960년대까지만 해도 자하골이라 불리던 곳이었다.

1946년 개교 이래 설립 59주년을 맞이하는 서울대학교. 그동안 서울대 곳곳에 어떤 사연들이 서려 있을까? scene 1. 자하연의 오작교를 함께 건너는 커플은 깨진다?자하연이라는 명칭의 ‘자하’는 어디에서 유래된 것일까? 관악인이라면 한번쯤 가졌을 법한 궁금증이다. 현재 관악캠퍼스 자리는 행정구역상 신림동에 소속되지만 1960년대까지만 해도 자하골이라 불리던 곳이었다. 이 자하골은 잦은 안개구름과 도림천을 따라 오르는 숲이 묘하게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었다고한다. 후에 중앙도서관 왼편에 있는 연못에 ‘자하연’이란 이름을 붙여주게 되었다고. 참~! 03학년도 초까지만 해도 자하연에서는 오작교라는 콘크리트다리를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학생들이 하나, 둘 수면 아래로 사라지자 결국 자하연의 오작교는 철거되고 말았다. scene 2. 버들골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골프장이었다? 1969년 초 박정희 대통령과 최문환 당시 서울대 총장이 서울대를 이전할 부지를 물색 중이었다. 그러던 중 관악골프장을 답사하게 되고 그 이듬해 2월 다음과 같은 이유로 관악산 종합캠퍼스 부지가 최종적으로 확정되었다. ① 서울시 중심부로부터 15킬로미터 이내에 위치해 있다. ② 부지가 한강 남쪽이어서 한강이남을 개발하려는 정부의 방침에 일치된다. ③관악부지는 학교시설지구가 약 350만 평방미터이고, 인근에 농대 연습림 514만평이 있어 광범위한 활동영역을 보유하고 있다. ④ 자연환경이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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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ene 3. 플라토닉 러브의 추억

1960년대 중반까지의 이성교제는 발랄한 연애보다 고전적인 플라토닉 러브가 대부분이었다. 일부 예능계를 빼고는 같은 과 동급생 남녀 간에도 대개 경어를 썼고 대부분의 학생이 미팅을 거치지 않고 졸업했다. ‘먼발치로 지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아련히 가슴을 조이는 순정파’가 많았고 데이트를 한대야 기껏해야 음악감상실에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거나 영화구경을 같이 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정도였다. ‘4.19 혁명 때 희생된 어느 남학생은 3년 동안 클라스메이트인 여학생을 죽도록 사랑하면서 단 한 번의 데이트도, 은밀한 대화조차도 가지지 못했음‘이 죽은 뒤에 밝혀지기도 했다. 1960년대 초반 어느날에는 짝사랑 수년에 가슴앓이하는 스스로에 분노한 남학생이 달려가 좋아하는 여학생의 여학생의 뺨을 때리는 사건이 있었다. 물론 여학생이 곧장 교수에게 달려가 실상을 호소함으로써 그 남학생은 정학 처분을 받게 되었고 오랫동안 항간에 화제가 되었다. scene 4. ‘결석 = 징집’이었던 시대 남북전쟁 하에서 당시 당시 대학생들에게 징집연기의 특전을 주는 것은 오로지 학업을 계속 시켜, 전쟁으로 인한 국민 문화수준의 저하를 가급적 방지하는데 있었다. 따라서 학교당국 보다는 정부나 사회 일반에서 학생의 출결문제에 대하여 큰 관심을 가졌던 것이다. 그러므로 문교부는 학생들의 출석 지도를 강력히 시행하고자 학칙에 규정된 출석시간 미달자에 대한 학점의 인정을 엄금하는 동시에 과거에 있어 그 ?가 현저한 자, 공직을 가지면서 학교에 졸업한 자에 대해서는 그 졸업 인정을 취소하라는 통처또한 발하였다. 1952년 7월에는 문교, 국방당국의 합의로 매학기 수강 시간수 혹은 수업일수의 2/3이상 출석하지 않은 자 등은 모두 징?소집을 단행키로 하였다. 그래서 멀쩡히 대학 다니던 사람이 며칠 학교에 나타나지 않으면 주위 사람들은 십중팔구 징집된 것으로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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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ene 5. 닭장차를 타고 등교하다?!

1987년 ‘박종철 군 고문 치사 사건’으로 비롯된 ‘6월 민주화 운동’과 1989년의 ‘통일 운동’의 열풍을 넘기고 90년대에 들어서 관악은 변화를 맞았다. 5공 정권의 폭압과 졸업정원제로 인한 강박 속에서 학교생활을 보내야 했던 80년대 초중반 학번이 물러나고 90년대 학번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귓전을 울리는 핸드 마이크 소리도, 본부와 인문대 사이의 언덕배기 길을 줄지어 오르던 군화발 소리도, 괴성을 지르던 ‘지랄탄’의 모습도 거의 볼 수 없게 되었다. 또 1교시 수업을 들으려고 봉천고개에 줄지어선 학생들이 관악서가 제공한 ‘닭장차’를 타고 학교로 들어가는 모습도 더 이상 볼 수 없다. 아직도(?) 규장각 옆 감나무 밑에는 ‘삼양화학’의 마크가 선명한 최루탄 파편이 그때의 그 기억을 추억으로 만들어주고 있지만. *를 참조하였으며 사진은 사진집에서 인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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