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TV속 공익광고는 또 하나의 도덕 선생이었다. 때로는 근엄한 목소리로 우리를 꾸짖고, 훈계하였으며, 때로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우리에게 희망을 심어 주었고, 그것은 다른 어떤 광고들보다 더 우리의 뇌리 속에 깊이 각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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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익광고는 사회의 공공의 이익을 위해 사회 문제를 해결하거나 사회적 가치를 가진 주제를 표현하는 광고이다. 한국에서는 1981년 한국방송광고공사 산하에 공익광고협의회가 설립되면서 공익광고라는 개념이 도입되었지만 실질적으로는 해방 이후부터 공익적 가치를 선전하는 광고가 있어 왔다. 즉, 1970년대까지는 공보처(이후 공보국, 공부부, 문화공보부 등으로 명칭 변경)와 각 정부 부처, 기관들이 직접 광고를 제작하고 있었다. 81년 한국방송광고공사(이하 광고공사)가 설립되고 같은 해 방송광고향상 자문위원회(공익광고협의회의 전신)가 설립되면서 공익광고의 운영, 관리는 이전의 정부 각 부처가 독립적으로 수행하던 것에서 광고공사를 중심으로 한 체계로 정리되었다. 본격적인 국가 재건 사업에 들어가는 전쟁 이후 1950년대부터 공익광고의 흐름을 짚어 보면 우리 사회의 변화상을 살펴 볼 수 있다.전쟁 직후 폐허 속 국가 재건 1950년대의 공익광고는 직접적인 어조로 국민을 계도했다. 예를 들면 보건사회부(보건복지부 전신)의 “모기잡기 운동, 또 하나의 적 모기를 없애자”, “쥐를 잡자”, 농림부의 “아카시아를 심자” 등의 광고는 제목이 선동적이면서 구체적인 행동을 촉구하는 구성을 보이고 있었다. 이러한 광고들의 탄생 배경은 당시의 우리의 시대 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전쟁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1950년대의 우리의 낙후한 사회적 환경에서 정부의 정책은 근대화를 위해 필요한 것들 중 국민들이 쉽게 실천할 수 있는 보건, 환경과 관련된 일들을 적극적으로 국민들에게 알리기 위한 수단으로 광고를 사용하였다. 따라서 이는 다분히 공익성을 띠고 있었고, 이 시기를 오늘날 공익광고의 태동기라고 볼 수 있다. 이때도 광고는 현재와 같이 인쇄 광고와 영상 광고로 만들어졌다. 특히 영상 광고는 재생 길이 상으로는 오늘날의 광고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긴 재생 시간을 가졌다. 짧게는 1분 정도에서 길게는 10분까지 재생되었으니 하나의 단편 영화처럼 이야기 구성을 갖고 있었다. 영상 광고는 만화로 제작되기도 했고, 실사로 제작되기도 했는데 기술적으로 단순한 카메라 구도와 부족한 편집 기술을 가졌던 조악한 수준의 광고였다. 조국의 근대화를 위한 장기 캠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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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 70년대에 박정희 정부는 ‘혼·분식 장려 운동’을 통해 우리의 밥상을 지도했다. 그 명분인즉슨 혼분식이 국민 건강에 좋다는 것이었지만 실질적인 이유는 다름 아닌 ‘쌀 부족’이었다. 정부는 1965년부터 식량증산 7개년 계획을 수립하여 ‘보릿고개’로 표현되는 당시의 극심한 식량난을 해결하고자 했고, 이러한 식량난 타개책의 일환으로서 혼·분식 장려 운동이 등장했다. 여하튼 이 캠페인은 수많은 웃지 못할 상황들을 연출했다. 학교에서는 담임선생님이 직접 도시락을 검사하여 쌀 이외의 잡곡이 규정 비율인 30%를 넘지 못할 경우 학생들은 벌칙을 받게 했고, 음식점들도 정부가 요구하는 25%의 잡곡류, 면류 혼합식을 지키지 않을 경우 영업정지와 같은 제재가 가해졌다. 밀가루 음식의 대표 주자인 라면 시장이 급성장한 것도 혼·분식 장려 정책이 활성화 되면서부터였다. 이러한 혼·분식 식사는 70년대 후반에 접어들어, 다량으로 생산되는 통일미에 의해 쌀 자급률이 100%를 넘어서는 가운데에서도 80년대 초반까지 계속되었다. 혼분식 장려운동과 함께 시대를 풍미했던 또 하나의 ‘운동’은 가족계획정책이다. 그렇지 않아도 먹을 것이 부족하여 잡곡밥을 섞어 먹도록 강제 받았던 시기에 가족들 중에 ‘입’이 하나 더 있는 것은 그야말로 큰 부담이었다. 정부에서는 가난을 면치 못하는 큰 이유 중 하나로 부양가족이 많은 것을 문제시했다. 오죽했으면 “덮어 놓고 낳다 보면 거지 꼴 못 면한다”는 표어까지 등장했을까? 이밖에도 ‘아들 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 “하나만 낳아도 삼천리는 초만원”. “무서운 핵폭발 더 무서운 인구폭발”이라는 표어들이 유행했고, 콘돔을 비롯한 피임 도구들이 보급되면서 ‘피임’이라는 개념이 등장했다. 출산율이 낮아 적극적인 출산 장려 정책을 펴고 있는 지금의 모습과 비교할 때 격세지감이 느껴진다. 박정희 정권의 또 다른 대형 캠페인은 ‘반공’을 주제로 한 것이었다. “다시는 속지 말자”, “이것이 간첩이다”, “상기하자 6·25”, “싸우며 건설하자”처럼 전투적이고 결연한 어조의 정책 광고를 냈다. 이는 이전 전쟁 직후의 이승만 정부 때의 어조보다도 훨씬 강력해진 것이었다. 최고의 목표 경제 성장 박정희의 집권 후반기인 70년대는 경제 발전과 조국 근대화에 총력을 다한 시기이다. 그 외에도 수출 지향의 산업 발전과 소비 절약, 저축 증대를 목표로 하는 경제 성장 정책에 대한 광고들도 많이 등장했다. “배격하자 외제품”, “우리도 잘 살 수 있다” 등의 표어를 통해 끊임없이 국민들을 경제 성장 운동에 참여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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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맥락에서 낙후된 농촌에 대한 근대화 작업이 ‘새마을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실시되었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새벽종이 울렸네, 새아침이 밝았네”, “잘 살아보세, 우리도 한 번 잘 살아보세”라는 노래 가사처럼 당시 못 다 이룬 경제발전에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전 국민이 농촌의 근대화와 조국의 근대화에 매진했다. 새마을 운동은 초가집 없애고 양옥 짓기, 마을길 넓히고 포장하기, 다리 놓기 등의 기본적/ 전반적 농촌 환경 개선 사업이었다. 당시 새마을 운동이 얼마나 중요한 사업이었는지 담배와 일기장에도 ‘새마을’이라는 이름이 붙을 정도였다. 이러한 새마을 ‘열풍’은 비록 주체는 민간인으로 바뀌지만 80년대가 되어서도 계속 이어지는 지속력을 보여 준다. 광고 전담 기관의 설립과 공익광고의 봇물 80년대 전두환 정권은 언론통폐합을 통해 언론에 대해 직접적인 통제를 실시한다. 이러한 정책의 연장선상에서 광고공사를 설립하여 정부의 직접적인 국민 계도를 강화해 나간다. 이리하여 영상 부문에서만 81년을 제외하고 한 해에만 평균 15편 이상의 공익광고가 제작되는, ‘공급 초과 현상’이 나타난다. 조국의 선진화된 모습과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광고들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민족의식과 단합된 힘을 바탕으로 더욱 경제 발전에 힘쓰자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다. 군사 정부의 성격을 극명하게 보여 주는 80년대의 키워드는 ‘질서’였다. 아시안 게임, 올림픽 등의 굵직한 국가적 행사들이 있었다. 이것은 “질서”를 주제로 한 일련의 캠페인을 등장시킨다. 올림픽을 개최하는 선진국의 국민답게 질서 정연하게 행동하자는 의도에서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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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부터 시작된 저축/절약 운동은 8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과소비 추방 운동으로 이어진다. 전두환 정권 내내 3고 현상으로 우리는 엄청난 경제 성장을 이루었으며 특히 86~89년엔 사상 처음으로 무역수지가 흑자를 기록하는 등 단군 이래 최대 호황이라는 말이 등장할 정도였다. 이는 해외여행 붐과 같은 사치 풍조로 이어졌고, 이로 인해 과소비를 경계하고 절약을 미덕으로 삼자는 외침이 나타나게 됐다. 공익광고는 불필요한 해외여행과 해외물품 유입을 자제하고, 에너지를 절약하자는 구호를 전달했다. 당시에 임하룡이 출연한 “자린고비 이야기”편이 화제가 되어, “내가 달~리 자린고비냐?”란 유행어를 탄생시키기도 했다.다양하게, 세련되게 변화하는 공익광고 하지만 90년대를 기점으로 공익광고는 주제의 다양화를 이루었다. 이전에도 문제로 나타났지만 다른 것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중요성을 인정받지 못했던 주제들이 등장했는데 대표적인 것들이 청소년 문제, 환경 문제, 개인의 도덕성 문제 등이었다. 물론 90년대 후반에는 IMF의 영향으로 “다시 일어서자”는 격려성 캠페인과 똑똑하고 현명한 소비를 유도하는 캠페인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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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의식은 성장과 광고 전반의 발달, 그리고 공익광고 제작 수 감소는 공익광고의 질적 향상으로 이어진다. 이제 더 이상 공익광고는 무엇을 지시하기만 하는 딱딱한 도덕책이 아니라 부드럽고 감동적인 이야기를 들려주는 동화책이다. 광고의 질 향상은 기술적인 면과 내용 구성적인 면에서 모두 일반 기업 광고에 뒤떨어지지 않는 세련된 광고를 생산하게 했다. 국가 기관의 주도 하에 이루어졌던 과거의 제작 방식에서 광고의 주제 선정과 사후 평가에 국민들이 참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영상도 한 편의 영화와 같은 인상을 주고, 음악과 음향 효과에 최소한의 대사와 자막, 나레이션으로 눈이 높아진 국민들에게 거부감을 줄였다. 제작 편수는 줄었지만 그 속에서도 특별히 어느 한 주제에 중점을 두기보다 다양한 주제를 같은 중요도 수준으로 다루고 있다. 광고는 시대의 상을 반영한다. 특히 과거 우리의 공익광고는 그 시대 국가가 의도했던 바람직한 국가의 상을 반영해 왔다. 시대가 변하면서 이제는 공익광고의 생산 주체가 국가뿐만이 아니라 온 국민에게까지 확대되었다. 앞으로의 공익광고는 더욱 진정한 공익을 반영 하는 도구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