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다고 생각했던 방학이 어느덧 흘러 새학기가 시작되었다. 편집장이 된 이후, 앵벌이의 심정(?)으로 건물마다의 보수공사 소음을 뚫고 학교 이곳저곳을 돌아다녔지만, 올 여름방학의 학내는 심(心)적으로 참 조용하게 보냈던 것으로 기억된다. 『우리세대』의 제호를 변경하는 작업 은 기실 외부충격으로 인한 것 같지는 않다. 그것도 ‘서울대’라는 미묘하고도 첨예한 단어를 결합시켜야 할 만한 외부적 당위가 우리에게 있었을까? 단언컨데 그렇지 않다. 우리 기자들과 함께 결언을 한 것은 일종의 ‘자생적 의기투합’이라 부르고 싶다. 외부 취재 때 마다, “우리세대는 뭐하는 곳이죠?”라고 되물음 당하는 불편함도 한몫했다고 치자. 그러나 그런 불편함을 제호변경으로 해결해야만 하는 무기력은 적어도 우리에게는 존재하지 않았다. 애초 『우리세대』라는 제호는 (90년대에도 이어져 왔을) 80년대 치열했던 운동권 문화의 특수성과 90년대 변화된 대학문화 속에서 시대적 주체(90년대 학번들)의 정체성을 그려보고자 택했다고 한다. 무기력의 존재를 부인하는 이유는, 그만큼 『우리세대』라는 제호의 의미가 아깝기도 했고, 『우리세대』선배 기자들이 걸고 왔던 제호에 대한 되먹지 못한 버릇없음으로 비쳐질지 않을까 걱정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해결해야 했던 내부적 어려움이었다. 그러나 가장 걱정되었던 부분은 앞서 말한 ‘서울대’라는 미묘하고도 첨예한 단어의 선택이었다. 흔히들 우리는 ‘한겨례’는 진보로 치환하며, ‘조선’은 보수로 바라본다. 물론 실제로도 그런편이다. 그렇다면, ‘서울대’는 어떠한 뉘앙스가 우리 앞에 펼쳐지는가?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진보나 보수의 정치적 스펙트럼이 아닌 ‘권력’이라는 계급적 스펙트럼의 정점이었다. 우리 모두가 ‘서울대’라는 정체감을 그런 곳에서 찾아야만 하는 이유는 그것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필연적인 이유가 있다. ‘서울대에 관한 비난의 외압’과 ‘치열했던 입시전쟁으로부터 그나마 한줌의 예비권력을 가진 자’의 숙명이라고 할까…. 그렇다. 기자들 조차도 그러한 딜레마에서 벗어날 수 없음이었다. 그래서 ‘자생적 의기투합’을 말한다. 이렇게 이야기 함조차 자가당착(自家撞 著)으로 환원될려나? ‘저널’이라는 단어를 제호에 채택했음 은 우리에게 부족했던 일종의 기자근성에 관한 강박이었음을 방증한다. 월간지를 만들어 가면서, ‘우리는 혹시 주간지를 만드는 시간만으로 월간지에 관한 열정을 애써 포장하려드는 게 아닐까’하는 반성(그렇다고 주간지를 만드는게 쉽다는 것은 아니다. 한달의 시간이 우리에게 터무니 없이 긴 시간일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부터, ‘언론(言論)인가 소식지인가’하는 체념까지… 저널이라는 기만적 단어로서 (사실 ‘저널(journal)’이란 단어는 ‘학회지’나 ‘논단모음’으로 해석된다) 언론의 성격을 나타내야 함은 우리의 정체성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는 계기로 만족해야 했다. 뭔가 쌈빡한 단어로서 표현하고자 했음은 ‘질리지 않아야 한다’는 원칙에 의해 무산됐음은 물론이다. 『우리세대』라는 제호의 나이 는 이제 여섯 살을 갓 넘어섰다. 그리고 총 46권을 냈다. ‘매월 내왔다’는 자부심을 독자들에게 드러낸다면 오만일까? 한번 냉정하게 생각해봤다. 무슨 내용을 어떻게 담아왔는지, 그리고 어떠한 성과가 있었는지를 조용히 집어치우고, 책을 낸다는 것 차체만으로 우리의 현실과는 어떻게 조응할까 생각해봤다. 왜냐하면 적어도 마흔여섯권의 흔적을 사생아(死生兒)로 만들어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론은 ‘괜찮았다..’라는 쪽으로 흘러갔음을 고백한다. 적어도 내 스스로에게까지 거짓으로 포장해내고 싶지는 않다. 혹자는 ‘관악언론의 선두주자인가?’라 고 물었고, 타자는 ‘『우리세대』는 색깔이 없어’라고 따끔한 충고를 내렸드랬다. 그러나 원래부터 그러한 비난과 충고를 겸허하게 받아들여하는 의무는 우리에게 지워져 있어야 하는 것이라고 일축해버렸다. 환골탈태(換骨脫胎)라는 자못 멋드러진 단어로 표현해내지 못함 또한 제호 자체가 주는 무거운 뉘앙스를 오히려 벗어나고 싶어서 일지도 모른다. 차라리 고유명사와 차이가 없을 수도 있는 『서울대 저널』이란 제호를 언제 누군가에게 빼앗길 수도 있다는 긴장감을 늦추지 말자는 다짐으로 대신 해야겠다. 끝으로 필자가 꼭 이야기 하고 싶었음은 쉽게, 정말 쉽게 다가가고 싶음이다. 컬트(이 단어를 씀은 어리석을 수도 있지만)적인 분위기로서 자신의 본색을 드러내는 방법은 필자 스스로 너무나도 싫어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능력부족과 의지과대의 교집합 속에 필자가 포함되어 있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