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점에, 영어 점수에, 과제에 치여 살다 보면 주변 사람들에게 소홀해지게 된다. 친구들과 연락이 뜸할 무렵 친구들로부터 하나 둘 안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누구는 시험에 떨어졌다느니, 누구는 심하게 아팠다느니.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나도 내 할 일이 있었으니까. 소홀해지게 되는 건 주변 사람들만이 아니었다. 지난 대선 이후 나를 엄습했던 무력감과 회의감으로 인해 한동안 언론 보도를 피해가며 살았더니 어느새 세상은 30여 년 전으로 퇴보해 있었다. 한때 “대운하를 파겠다면 청와대 앞에 드러눕겠다”고 단언했던 나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내 코가 석자니까. 시간강사 문제 취재를 위해 국회 앞에 농성중인 시간강사들을 찾을 때마다 내 마음은 그토록 무거울 수가 없었다. 생계유지에도 턱없이 부족한 강의료와 연구할 여유도 없는 빡빡한 시간을 호소하는 그들의 이야기를 받아 적으며 나는 그들이 내 손에 쥐어주는 빵과 우유를 목으로 넘길 수 없었다. 취재랍시고 다른 메이저 언론사 기자들이 이미 다 물어봤을 법한 뻔한 질문을 던지며 시간을 빼앗는 것조차 죄송스러워졌다. 하루는 인터뷰를 마치고 일어서려는데, 서울대 중앙도서관 통로에 설치된 한경선 비정규교수의 분향소에 영정이 놓여 있지 않음을 안타까워하시던 어느 강사는 자신이 갖고 있던 한 교수의 사진 한 장을 액자에 끼워 영정을 마련했다. 그리고 봉투에 조심스레 포장해 나에게 분향소에 영정을 갖다 놓아 달라고 부탁했다. 영정을 품에 안고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생전 옷깃조차 스친 적 없었을 한 사람의 영정이 왜 내 품에 안겨 있는 것일까. 그들은 왜 이것을 나에게 맡겼을까. 우리나라의 6만 여 명 시간강사들은 모두가 서로를 잘 아는 사이라서 그랬을까. 그들은 농성장 앞에, 자신이 출강하는 대학 캠퍼스 안에 손수 한 교수의 분향소를 마련하고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시간강사라는 같은 이름을 공유한 6만 여명의 사람들 중 한 사람. 단지 그게 이유였다. 내 코가 석자라는 핑계로 내 주변에 대한 관심을 끄고 살 때, 1년 반 전 나에게 프랑스어권 국가들의 사회와 문화에 대한 가르침을 주셨던 어느 강사는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언젠가 내 은사가 될지 모르는 강사들은 강단이 아닌 거리에 나서 성명서를 읽고 농성을 한다. 방 한 구석에 처박혀 내 코 길이나 재고 있을 때가 아니다. 나도, 학생들도, 교수들도, 국회의원들도, 교육 당국도, 정부도, 우리 모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