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68혁명의 향기에 흠뻑 취하다
책과 영화, 68을 기억하다

2008년, 68혁명의 향기에 흠뻑 취하다

아메리칸익스프레스 파리지점 앞 교차로 68년 당시 격렬한 시위가 벌어졌던 개선문 인근‘68혁명의 진원지’ 파리 파리에서 가장 큰 발레 전용극장인 오페라 갸르니에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아메리칸 익스프레스사 앞 교차로는 여느 때처럼 평온했다.지금은 전세계에서 찾아온 관광객들이 지갑을 활짝 여는 명품샵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이 거리는 불과 40년 전 이맘때만 해도 ‘해방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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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칸익스프레스 파리지점 앞 교차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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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년 당시 격렬한 시위가 벌어졌던 개선문 인근

‘68혁명의 진원지’ 파리

파리에서 가장 큰 발레 전용극장인 오페라 갸르니에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아메리칸 익스프레스사 앞 교차로는 여느 때처럼 평온했다. 지금은 전세계에서 찾아온 관광객들이 지갑을 활짝 여는 명품샵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이 거리는 불과 40년 전 이맘때만 해도 ‘해방구’였다. 1968년 3월 20일, 아메리칸익스프레스 파리지점 앞에서는 베트남전에 반대하는 대학생들의 반전시위가 열렸다. 시위 도중 회사 사무실의 유리창이 박살나는 폭파 사건이 발생하자, 경찰은 다음날 시위 참가 학생 8명을 각자 집에서 전격 체포했다. 8명 중 하나였던 낭테르대 학생 랑글라드의 석방을 요구하던 동료 학우들은 강의실과 총장실을 점거했고, 급기야 ‘3·22운동’이라는 조직을 결성하기에 이른다. 이 조직은 공통의 이론적 토대 없이 개인의 자율성이 철저하게 보장된 실천적인 행동조직으로, 그들은 “나중에 어떠한 사회를 건설할 것인지는 고려할 필요가 없다. 오직 기존 체제의 파괴에만 집중해야 한다”고 외쳤다. 시위가 격렬해지자 낭테르대 총장은 대학 폐쇄 결정을 내렸고, 학생들은 소르본대로 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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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탱지구에 위치한 소르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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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68혁명 관련 서적들

라탱 지구, 세계를 놀라게 한 ‘5월 10일 코뮌’의 주무대

지금은 ‘파리 4대학’으로 불리는 소르본대는 쎄느강에 인접한 라탱 지구에 자리 잡고 있다. 한국의 대학 캠퍼스는 모든 건물들이 한 울타리 안에 갇혀있는 형태지만, 유럽의 대학 캠퍼스는 대개 도시 곳곳에 건물들이 흩어져 있는 형태로 존재한다. 따라서 한국의 대학이 사회와 격리되어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반면, 유럽의 대학은 사회와 더불어 숨쉬는 느낌을 준다. 아담한 규모의 소르본대 건물도 담장 없이 길가에 인접해 있었다. 40년 전인 68년 5월, 소르본대학은 가장 격렬하게 사회와 더불어 호흡하고 있었으리라. 소르본대로 집결한 학생들의 시위가 격렬해지자 소르본 대학 총장은 경찰의 학내 개입을 요청했다. 경찰은 5월 3일 학내에서 527명의 학생들을 체포하고 그날로 대학을 폐쇄했다. 이로 인해 학생들의 투쟁은 더욱 격렬해졌고, 라탱 지구는 경찰의 무력진압에 대항하는 ‘바리케이드의 바다’로 변해 갔다. 이들의 규모는 일주일 뒤에 절정을 이뤄 ‘5월 10일의 코뮌’으로 불리는 ‘바리케이드의 밤’이 펼쳐졌다. 시위대는 경찰의 강경대응과 드골정부의 권위적인 지배체제에 단호히 맞섰다. 올해 출간된 관련 서적만도 100여 권, 68혁명을 추억하는 프랑스해외 순방을 마치고 돌아온 드골 대통령은 텔레비전 앞에 나섰다. 그는 대국민 연설에서 “전체주의로의 귀결에 대한 우려를 표명한다”면서 “공화국의 정통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단호한 의지를 밝혔다. 드골이 연설을 마치자마자, 격렬한 시위에 숨죽이던 퇴역군인, 카톨릭 신자, 소상공인 등의 드골 지지자들은 샹젤리제 거리로 뛰쳐나와 프랑스 국가 ‘라 마르세예즈’를 부르며 드골을 연호했다. 드골은 정국 타개를 위해 의회를 조기 해산하고 다음 달인 6월에 총선거를 실시했다. 이 선거에서 드골 지지파가 압승을 거두면서, 프랑스의 68혁명은 사실상 막을 내렸다. 정부에 의해 강제로 해산된 운동조직들은 이후 이념에 따른 이합집산을 거쳐 ‘프롤레타리아 좌파’, ‘공산주의 동맹’, ‘신민중항거’ 등으로 분화돼 1973년까지 소규모 운동을 지속했다. 파리는 차분하고도 다채롭게 68혁명 40주년을 맞고 있었다. 퐁피두센터 안에 자리 잡은 작은 서점에만도 68혁명 관련 서적들이 10여종이 넘었다. 서점 직원은 “아마 올해 출간된 책만도 100권을 넘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서른이 넘은 사람은 그 누구도 믿지 말라’는 구호를 외쳤던 68혁명의 주역들이 이미 예순을 넘긴 지금이지만, 아직도 프랑스가 그때를 회상하는 이유는 68혁명의 비판정신이 오늘날에도 유효하기 때문은 아닐까. ‘68혁명의 부활’ 꿈꾸는 베를린프랑스의 이웃나라였던 독일도 68혁명의 소용돌이를 비켜가지 못했다. 구서독 지역에서는 이미 1966년부터 ‘독일사회주의학생연맹’(SDS)이 주도 아래 베트남전 반대시위가 간헐적으로 열려 왔지만, 냉전체제의 반공정부 하에서 이들은 별다른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듬해에 있었던 이란 팔레비 왕의 서독 방문으로 인해 지지부진했던 학생운동은 큰 전환점을 맞게 된다. 당시 지식인 탄압과 국고 착복으로 악명이 높았던 팔레비 왕을 서독 정부가 환대하자 학생들은 대규모 시위를 조직했고, 그 과정에서 서베를린대(현재 베를린자유대)의 학생이었던 오네조르크가 경찰의 발포로 사망했다. 시위대의 규모는 불어갔고, 이때 폭발적인 연설력을 가진 루디 두취케가 혜성처럼 등장했다. 루디 두취케는 구동독 지역에서 태어나 고등학교 시절까지를 그곳에서 보냈지만, 군입대를 거부하고 서독으로 건너왔다. 그는 1961년부터 서베를린대에서 사회학을 공부하면서 ‘전복행동’이라는 조직을 만들었고 1965년에는 SDS에 가입했다. 오네조르크 사망사건 이후로 일약 대중스타로 발돋움한 그는 1968년 2월 서베를린에서 개최된 국제베트남회의에서 기조연설을 맡게 된다. 그는 “제국주의의 첨병인 나토(NATO)가 서유럽에서 민중의 해방을 방해하고 있다”며 서독 군대가 나토에서 탈퇴할 것을 촉구했다. 그는 ‘자유는 항상 다른 것을 생각하는 자들을 위해서 존재한다’고 믿는 로자 룩셈부르크의 신봉자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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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달렘지역에 위치한 루디 두취케의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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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트 차이퉁’을 발간하는 악셀 슈프링어 본사

서독 좌우대립의 상징이 된 ‘두취케 vs 슈프링어’

당시 언론재벌 악셀 슈프링어가 운영하던 ‘빌트 차이퉁’(Bild Zeitung)은 베트남전에 반대하는 학생시위를 ‘좌파 불순세력의 획책’이라며 비난하고 두취케를 공적으로 매도했다. 여기에 영향을 받은 대중들은 두취케에 반대하는 집회를 열었다. 사실상의 친미 관제집회였다. 좌우세력의 대립이 극심해지는 와중에 급기야는 ‘빌트 차이퉁’ 독자였던 요제프 바흐만이 4월 11일 두취케를 저격하기에 이른다. 그는 체포 직후 “나는 매일 ‘빌트 차이퉁’을 읽으면서 이 더러운 빨갱이를 처치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소리쳤다. 다행히도 암살 기도는 실패로 돌아갔고, 두취케는 이후에도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반전운동을 계속하다가 1979년에 눈을 감았다. 두취케의 묘소가 위치한 베를린 달렘 지역의 성 안넨게마인데 교회묘지는 평일 오후여서 그런지 한산했다. 묘지에는 수백 기의 무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의 묘소를 찾아내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유독 그의 무덤 앞에만 각양각색의 꽃다발들이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베를린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대학원생 레나 크레펠 씨는 “68혁명을 직접 겪었던 내 부모님에게 두취케는 영웅이자 우상”이라고 말했다. 68혁명 40주년, 그가 죽은 지도 30년이 다 돼가지만 독일에서 그의 인기는 아직 식지 않았다. 두취케의 피습은 학생들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학생들은 두취케의 피습 다음날인 4월 12일 ‘빌트 차이퉁’을 만드는 슈프링어사의 사무실을 공격했다. 서베를린에서는 수천 명이 철조망과 경찰들로 둘러싸인 슈프링어 본사를 향해 “살인마 슈프링어”를 외치며 행진했다. 시위는 더욱 격렬해져 시위대가 ‘빌트 차이퉁’의 신문 공급을 길거리에서 차단하기에 이른다. 다음 달인 5월 사회불안을 조장하는 사건에 대해 국가가 비상대권을 갖는다는 ‘긴급조치법’이 통과되자, 6만 명의 학생들과 시민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좌파세력을 대변해 왔던 사민당마저 긴급조치법에 찬성하자, 68세대가 주축이 된 신좌파들은 사민당에 등을 돌렸다. 이들 가운데 일부 급진적인 이들은 적군파(RAF)를 창설했고, 지역과 환경 이슈에 관심을 가졌던 이들은 녹색당을 창당해 활동을 꾸준히 이어나갔다. 2008년판 ‘68혁명’ 준비하는 독일 대학생들때마침 베를린자유대에서 SDS가 주최한 ‘행동의 날’(Bewegungstag)이 개최됐다. 캠퍼스 내 곳곳에서 기획강연과 서명운동, 집회가 잇따라 열렸다. 이날 현장에서는 지난해부터 부활된 등록금 제도를 비판하는 목소리도 이어졌다. SDS는 ‘68혁명 40주년- 우리가 승리했던 마지막 순간’이라는 주제로 5월 2일부터 4일까지 베를린에서 대규모 기념행사를 열 계획이다. 그들에게는 ‘엘리트 교육과 신자유주의에 대한 저항’이 68혁명의 오늘날 시대정신이었다. 참고서적오제명 외, , 도서출판 길,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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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독 68혁명의 중심지였던 베를린자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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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시내에서 발견한 68혁명 40주년 기념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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