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주의, 무관심의 벽을 넘어

서울대에서 여성주의 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된 지 10년이 넘었다.모두가 여성주의에 호의적인 것은 아니다.비판적인 평가를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지만, 여성주의 운동이 그동안 일궈낸 성과는 다양하다.지금 서울대 여성주의 운동은 어디쯤 와 있는 것일까.여성주의 정책, 학생회 선거의 필수 요소?학생회 선거 기간에는 거의 대부분의 선본이 여성과 관련된 공약을 내놓는다.

서울대에서 여성주의 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된 지 10년이 넘었다. 모두가 여성주의에 호의적인 것은 아니다. 비판적인 평가를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지만, 여성주의 운동이 그동안 일궈낸 성과는 다양하다. 지금 서울대 여성주의 운동은 어디쯤 와 있는 것일까.여성주의 정책, 학생회 선거의 필수 요소?학생회 선거 기간에는 거의 대부분의 선본이 여성과 관련된 공약을 내놓는다. 제50대 총학생회 선거에서도 ‘생리공결제’ ‘여학생 전용 체육수업 실시’ ‘여학생을 위한 미술치료 프로그램’ ‘여학생휴게실 보완’ 등의 다양한 공약이 등장했다. 여성에 대한 고려가 선본들이 정책을 마련하는 데 기본적 요소가 된 것은 그간의 여성주의 운동의 성과로 볼 수 있다. 학생회 선거에서 여성 관련 공약의 형태는 변화해 왔다. 김보명(여성학협동과정 석사과정) 씨는 “예전의 학생회 선거에서 여성주의는 정책적인 문제라기보다 정치적인 문제였다. 구체적인 정책을 내놓을 경우 ‘비권’으로 몰려 비난받기도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구체적인 정책이 없는 선거에서 여성주의는 현실과 동떨어져 하나의 당위로만 존재한다는 비판이 있었다. 현재처럼 구체적인 정책들이 등장한 것은 여기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한다. ‘여성 공약’이라는 이름으로 발표되는 다양한 정책들이 여성주의적으로 의미가 있는지는 의견이 엇갈린다. 김효정(사회 05) 씨는 “여성주의 안에도 여러 생각이 있다. 왜 소위 ‘복지 공약’으로 수렴되나”라며 “자신들의 젠더 관점을 드러내는 게 중요하다. 그런 면에서 여성 정책이 필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선본이 오히려 더 솔직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정민우(사회 05) 씨도 “여성주의가 ‘복지’로만 환원되면서 다양한 논의의 가능성이 봉합되는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반면 김효실(언론 04) 씨는 “지금 학생회 선본들의 공약을 ‘보여주기 식의 공약’이라고 비판하는 것은 섣부른 판단”이라고 말했다. 이들 공약을 통해서도 여성주의 담론을 확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그것을 긍정적으로 끌어낼 수 있는가는 다른 문제”라며 책임감 있는 실천이 중요다고 말했다. 이보미(사회 05) 씨도 “형식적인 공약에 대해 비판이 많지만, 그런 시도 자체를 비판할 수는 없다”고 지적했다. 김보명 씨는 “특정한 형태의 논의만 여성주의적으로 의미가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며, 실천하기에 따라 구체적인 정책으로 여성주의를 풀어내는 게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복지냐 아니냐보다는 어떤 관점, 어떤 문제의식을 갖고 공약을 제시했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반성폭력 운동, 쇠퇴했나 정착했나반(反)성폭력 학칙 제정은 많은 학생들의 뜨거운 관심 아래 이뤄졌다. 하지만 막상 학칙이 만들어진 이후 성폭력에 대한 논의는 수그러진 듯 보인다. 반성폭력 학칙에 대해 대부분의 학생은 “그런 것이 있는지 잘 몰랐다”는 반응이었다.정진성 교수(사회학과)는 “반성폭력 학칙 제정과 함께 많은 제도적 정비가 이뤄졌다. 대학원에 여성학협동과정이 생기고, 성폭력 상담소도 만들어졌다. 이렇게 한 단계 정비가 되니 학생들이 발벗고 나서야 할 필요성은 줄어들지 않았나 한다. 또 한국 사회의 전체적인 열기도 식은 게 한 가지 이유가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보미 씨는 “반성폭력 학칙을 어떻게 계속해서 공론화할지 고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학칙 제정 이후 구체적으로 나아진 점이 무엇일까? 김보명 씨는 “그게 한계일지도 모르지만, 일단 제도화됐다는 것이 긍정적”이라고 평가했다. 그리고 ‘성폭력 신고센터’라는 기구도 생겼다. 학칙이라는 ‘규정’도 의미가 있지만, 그 규정을 집행할 기구가 생긴 것이다. 김 씨는 “성폭력은 사적인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문제다. 대학이라는 공동체가 학생을 보호할 책임이 있다고 보면, 이런 제도는 꼭 필요하다”고 말했다. 성폭력 사건이 발생할 경우 개인이 나서서 해결해야 하는 어려움을 성폭력 상담소가 완화해주기도 했다. 반감을 넘어, 무관심을 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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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 처리방식을 두고 2001년 벌어진 자보논쟁. 많은 학생들이 지켜보고 있다.

“여성주의는 더 이상 의미있는 논의가 아니다. 관성적인 여성주의에서 벗어나 좀 더 발전적인 논의가 필요하다.”(사회대 04학번 한 학생)”여성주의 자체가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관악의 여성주의는 너무 폐쇄적이다. 사회대에서 팩차기는 여학생들이 할 수 없다며 금지시켰다고 들었다. 이런 데에서 특히 폐쇄적이라는 느낌을 받았다.”(인문대 06학번 한 학생)여성주의가 모든 사람에게 환영받아온 것은 아니다. 최근에는 반감이 더욱 심해지고 있다는 지적이다. 정민우 씨는 “‘스누라이프’ 게시판같은 공간에서 여성주의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여성주의 관련 자보 훼손도 점점 심해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유가 무엇일까. 여성주의 운동의 성과가 역설적으로 반감을 심화시키고 있다는 게 정 씨의 분석이다. “지금은 당연한 에티켓으로 여겨지는 많은 것들은 과거 여성운동의 슬로건이었다. 여성주의 운동이 많은 것을 이룩하면서, 비(非)여성주의자들은 이에 대해 보상심리를 갖게 되고, 반감을 불러일으킨다.” 반감은 오해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한 학생은 “여성주의자라는 정체성을 갖게 되는 서로 다른 과정이 있다. 많은 사람들은 그런 과정을 외면한 채 ‘여성주의자’라는 획일적인 잣대를 모두에게 들이댄다.”고 지적했다. 사람들이 여성주의자에 대해 정형화된 이미지를 갖고 있어 의사소통에 문제가 생긴다는 것이다.반감보다 더 힘든 것은 무관심이다. 김보명 씨는 “내가 활동한 1998년부터 2000년까지는 지금보다 관심이 높았다. 지지를 하든 욕을 하든 반응이 없진 않았다. 내가 하는 일이 뭔가를 만들어낸다는 느낌이었다”며 “비난보다 사람을 더 힘들게 하는 것은 무반응”이라고 말했다. 현재 학내에서 활동하는 이들은 무관심을 강하게 느낀다. 한 학생은 “사람들이 너무 여성주의에 무관심해서 내가 하는 일이 무가치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고 전했다. 다른 한 학생도 “여성주의 운동에 내가 투입하는 노력에 비해 산출이 극히 적다. 피드백이 거의 없다”며 어려움을 호소했다. 전통적으로 여성주의 운동의 활동 공간이었던 과/반 공동체가 무너지고 있는 것도 어려운 점이다. 여성주의 담론을 풀어낼 공간이 줄어들고, 많은 학생들에게 여성주의는 ‘타자화’됐다. 과/반 외부에 존재하는 여성운동 단위는 결과적으로 고립되는 형태가 됐다. 때문에 여성운동 단위간 연합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제기돼왔다.새로운 여성운동을 모색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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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관악여모가 준비한 페미니즘 문화제.

그러나 여성주의가 위기를 맞고 있다고 섣불리 결론지을 수는 없다. 김효실 씨는 “학생 자치의 영역에서 여성주의 운동의 활발함이 둔화된 것은 사실일지 모른다. 하지만 학생들의 여성주의 의식이 저하됐다고 함부로 말할 수는 없다”고 지적했다. 여성주의 운동진영에서 이야기하는 것만이 여성주의라고 말하는 것은 오만한 태도라는 것이다. 적극적인 운동의 형태는 아니라도, 여성주의적 태도는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내면화됐다고 볼 여지도 있다. 수 년째 ‘성과 사회’ 강의를 진행하는 정진성 교수는 “수업시간에 보면 특히 남학생들의 태도가 변한 것을 느낄 수 있다. 과거에는 수업할 때 남학생과 여학생 사이에 미묘한 전선이 형성됐다. 하지만 지금은 여학생들의 입장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남학생들이 늘어났다”고 밝혔다. 여성주의에 대한 이해가 넓어졌다면, 여성운동 또한 확산의 가능성을 가진 셈이다. 여성주의 운동을 새롭게 만들어나갈 대안은 무엇일까. 여성주의 담론에서 새로운 의제를 찾을 필요성이 제기된다. 김효정 씨는 “새로운 의제가 필요하다. 지금은 자기 고백의 언어들, 이들 서로 다른 고백을 연결시키는 일이 주목받고 있다. 이와 함께 더 많은 의제를 발굴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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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일부터 11일까지 사회대 ‘아고라’에서 열린 페미니즘 문화제 전시.

여성주의 담론이 소통될 새로운 공간을 모색할 필요도 있다. 정민우 씨는 “예전에는 과/반을 중심으로 여성주의가 소통됐다. 이제 여성주의를 말하는 사람들은 과/반의 외부에도 많이 있다. 이들을 끌어안기 위한 새로운 공동체를 탐색해야 한다”고 말했다. 아울러 여성주의 내부의 다양한 조류를 연결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정 씨는 “개인의 고백을 중시하는 여성주의자도 있고, ‘신자유주의와 여성’같은 거시적인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있다. 이들을 연결하는 네트워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편 50대 총학생회는 여성과 관련한 여러 사업을 진행하기도 했다. 9월 둘째 주를 여성주간으로 지정, 설문조사를 비롯해 다양한 활동을 했다. 한 주 후에는 에서 페미니즘 포럼을 열기도 했다. 이들 사업은 여성운동 단위들과는 별개로 준비, 개최됐다. 때문에 ‘이런 일을 할 때는 여운단위와도 준비 단계에서부터 공유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가진 이들도 있다. 이런 평가에도 불구, 여성운동단위 외에 여성주의를 말하는 또 다른 주체가 있다는 것은 일단 긍정적인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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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총학생회가 개최한 <관악 2007>행사 중 페미니즘 포럼.

대안을 실천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서울대의 여성운동은 아직 활력을 잃지 않았다. 여성주의 자치언론이 존재하고, 매년 페미니즘 문화제가 열린다. 강의 시간에 ‘동성애는 질병’이라고 말한 교수에 대해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지난 10여 년간의 여성주의 운동 역시 어려운 여건 속에서 활동을 계속해온 사람들이 이뤄낸 것이었다. 대안을 모색하는 이들이 있는 한, 여성주의 운동의 흐름은 끊이지 않고 계속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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