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비역과 아줌마, 아줌마와 예비역 (1)

대화의 서(序) 우리사회에서 그릇된 뉘앙스의 대명사가 두가지 있다.하나는 ‘아줌마’요, 다른 하나는 ‘예비역’이다.다시말해, 이 사회를 양분하는 남성과 여성, 여성과 남성의 부분집합으로서 그들의 사회적 역할 만큼의 적절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계층이라는 이야기다.나는 현재 예비역이요, 장차 만나게 될 나의 아내는 아줌마이다.우리 어머니는 아줌마이고, 우리 아버지는 예비역이다.이 두 대명사는 먼 곳에 있지 않다는 이야기다.

대화의 서(序)

우리사회에서 그릇된 뉘앙스의 대명사가 두가지 있다. 하나는 ‘아줌마’요, 다른 하나는 ‘예비역’이다. 다시말해, 이 사회를 양분하는 남성과 여성, 여성과 남성의 부분집합으로서 그들의 사회적 역할 만큼의 적절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계층이라는 이야기다. 나는 현재 예비역이요, 장차 만나게 될 나의 아내는 아줌마이다. 우리 어머니는 아줌마이고, 우리 아버지는 예비역이다. 이 두 대명사는 먼 곳에 있지 않다는 이야기다. 대한민국 남자가 이땅에 살면서 치기로 저지르기 쉬운 두가지 하나는 담배요, 하나는 군대다. 아쉽게도 필자는 두 개 모두 저질렀다. 이 두 개의 공통된 특징은 한번 발을 담그면 거의 빠져 나오기 힘들다는 거다. 우선 담배. 말할 것도 없다. 기십만원하는 금연초를 사서 이용해도 힘들고, 매년 ‘올해의 다짐’으로 자신있게 내 걸어도 빠져 나오기 힘든 것이 바로 담배다. 잘 알려진 바대로, 담배를 못 끊게 만드는 성분은 바로 니코틴. 니코틴은 거의 마약이나 다름이 없어서, 담배가 보편화 되기 이전에 니코틴의 정확한 증상을 알았다면 아마도 대마초처럼 금지약물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렇다면 군대는 어떠한가. 군대는 시간이 흐르면 제대한다고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절대 그렇지 않다. 군대 갔다온 남자들은 어디가나 ‘예비역’이라는 꼬리표를 뗄 수 없으며, 하는 것 없이 대중가수 ‘오빠부대’만큼이나 욕 졸라리 먹고 다닌다. 응집력 또한 ‘오빠부대’를 훨 능가하며, 어디서부터 기인한 것인지는 정확하지 않으나 (아마도 26개월간의 짬밥에서 나오는게 아닌가 싶다) 그 조직력은 2002 한일 월드컵 대표 선수단이 배워 마땅하다고 하겠다. 담배 성분 중 니코틴이 담배를 끊지 못하게 하는 주 요인이 되는 것처럼, 한국사회에서 예비역 남성이 군대문화를 빠져 나오지 못하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얼마 전, 가수 유승준의 병역기피 문제로 또 한차례 대한민국 사회는 군대문제가 도마위에 올랐다. 대한민국 남자로서 당당히 군복무를 하겠노라고 이야기했던 그가 병역기피의 조짐이 보이는 행동을 했다는 것은 일단 도덕적인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하겠다. 따라서 그가 군대를 가든 안가든 그것을 가지고 본 필자가 이렇게까지 쓸 이유는 없다. 그러나… 내가 (딴지일보식의 표현을 빌리자면) 똥코털이 빠딱 서 앉지 못할 정도의 지랄을 하였으니, 바로 “어느 장애인의 병역 신청”이라는 기사 때문이었다. 안타깝게도 그 기사의 전문을 컴퓨터에 저장하지 못한 본 필자의 모자람이 있으나 그 내용만큼은 글 쓰는데 문제없을 정도로 기억하고 있으니 걱정은 마시라. 아무튼 그 기사를 요약하자면 이렇다. [병역기피자 유승준은 나쁘다. 몸 불편한 장애인도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지고자 하는데 사지멀쩡한 너는 머냐? 너 군대가라. 안가면 조땐다] 머 이런식이다. 여기에 병역신청 장애인 분의 인터뷰의 내용은 이렇다. “나도 최전방 철책선에서 나라를 지키며 열렬한 애국심을 느껴보고 싶었다.” (사실 여기에 덧붙여 병역기피자들을 향한 다소간의 말이 있었으나 정확한 표현을 기억해내지 못해 일단 뺀다) 그러나 만약에… 만약에 말이다. 그 장애인 분이, 지극히 정상적인 군대생활을 한다면… 절책선에서 머찐 소총을 들고 머찐 군복에 노을 저물어가는 북녘 땅을 바라보며 근무만 서는 것이 아니라, 군대생활의 절반인 청소(이등병 시절의 찬물에 걸레빠는 일은 아주 고역이다. 그러나 그것은 군대생활의 절반이다)를 해야하고, 사격하는 시간보다 탄피줍는 시간이 많고, 탄피줍는 시간보다 총기 닦는 시간이 길고, 총기 닦는 시간보다 고참 시다바리 되는 시간이 긴… 바로 그러한 군대생활을 한다면, 두발들고 나는 그분을 말리겠다. 강조컨데, 이런 생활들을 이겨냈다고 해서 예비역이나 현역장병들의 군대 경험을 신성화 시켜보려는 의도가 아니다. 이땅의 모든 군인들을 경배하라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애초부터 그런 것을 기대했다면, 이런 글을 쓰지도 않았다. 마찬가지로 그러한 경배를 기대하고 군대를 다녀온 남자는 이땅에 아무도 없다. 확신하건데, 이 땅의 남자들은 군대를 ‘그냥 간 것’이다. 만일 ‘신성한 국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면, 그는 아마도 의무역이 아닌 직업군인을 선택했을 것이다. (직업군인도 사병보다는 길지만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의 단기 직업군인도 존재한다) 그냥 간 것… 우리가 말하는 ‘국방의무’란 바로 그런거다. 공동체 생활에서 의무란 누군가, 무언가에 의해 지워진 것이지 스스로 자신에게 지우는 것이 절대 아니란 이야기다. 대한민국 남자로서 20대에 인생이 끝나는 것이 아니므로.. 뭔가 계속 해야만 하는 나이이므로.. 계속 뭔가를 하기 위해서는 걸리는 것을 일단 치워야 하므로.. 그런 것이 바로 ‘국방의무’라는 것이다. 따라서, ‘신성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고 의미심장한 약속을 하듯 입영을 약속한다면, 따지고 보면 그것 자체가 사실 거짓말이다. 아니… 소위 ‘넌센스’라고 봐야겠다. 국가를 위한 신성한 의무는 ‘납세’도 있고 ‘근로’도 있고 ‘교육’도 있다. 추가로 ‘준법’도 있다. 국방이 가장 신성하다고 생각한다면, ‘직업군인'(국민의 4대 의무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직업이 아닌가)도 있다. 그냥 가는 것을 가지고 도덕성을 논하는 것은 어찌 보면 어처구니 없는 일이기도 하다. 물론 군대를 가는 일, 그곳에서 일정 시간(사실 ‘시간’이라고 말하기가 그리 적당하지는 않다. 군대의 시간은 사실상 ‘세월’이다)을 보내는 일은 충분히 인정받아야 할만한 일이지만, 가지 않으면 남자도 아니라는 둥의 그런 말은 서로가 서로에게 설득력이 없는 일이다. 또 한번 강조하지만, 도덕성은 오버다. 우리가 어떤 문제를 흑과 백의 문제로 볼 수 있는 것은 그다지 많지 않다. 군대를 가는 것은 선(善)이고 군대를 가지 않는 것은 악(惡)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조금 억지를 부리자면, 우리가 만약 길을 걸어가는 중에 장애물이 나타났을 때 그 장애물을 치우고 계속 가든 아니면 피해서 돌아가든 그 둘을 가지고 선악을 논할 수는 없는 것처럼 말이다. 대화의 종(終) 내가 예비역이라고 해서 예비역을 옹호하고자 이 글을 쓴 것은 결코 아니다. 반대로 예비역을 폄하하자고 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번쯤 집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앞서 말한 ‘군인에 대한 경배’보다는 ‘그냥 간 것’에 대한 기회비용이 훨씬 더 클 것이라는 거다. 다시말해 더 큰 기회비용이 적절한 인정(그것은 ‘평등’의 기본 원칙을 벗어나지 않아야 함은 물론이다)이 있어야 하는 이유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예비역에 관한 편견의 이유를 찾을 수 있는 예는 무척이나 많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 모두의 머릿속 인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또한 그 편견의 이유는 여성에게만 남성에게만, 혹은 예비역에게만 있는 것은 결코 아니므로. 그냥 ‘공공(公共)의 죄’라고 해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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