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못할 한의 기억

인천에서 상근으로 근무 중인 친구가 학교에 찾아와 그동안 꽁꽁 묶어둔 이야기보따리를 실컷 푸는 중이었다.축제 둘째 날인 19일, 잔디에서 막걸리를 마시던 중 7시에 전야제가 있다며 급히 내려오라는 전갈에 교통편을 연구하다 결국 비행기를 타게 됐다.장터막걸리로 벌게진 채 중간에 누나가 전해준 옷가지와 카메라를 들고.배, 기차에 이어 마지막 연재는 비행기로구나.호강한다.

인천에서 상근으로 근무 중인 친구가 학교에 찾아와 그동안 꽁꽁 묶어둔 이야기보따리를 실컷 푸는 중이었다. 축제 둘째 날인 19일, 잔디에서 막걸리를 마시던 중 7시에 전야제가 있다며 급히 내려오라는 전갈에 교통편을 연구하다 결국 비행기를 타게 됐다. 장터막걸리로 벌게진 채 중간에 누나가 전해준 옷가지와 카메라를 들고. 배, 기차에 이어 마지막 연재는 비행기로구나. 호강한다. 현대사관련 세 번째 외부취재인 이번 여수행은 부끄럽지만, 관성적으로 가는 게 아닌가 싶다. 그러나 어딜 가든 그 지역에서 느껴지는 묘한 분위기에 몸을 맡기면 된다는 나름의 깨달음으로 큰 걱정은 없다. 다만 이번엔 과거청산의 현재적 의의를 현장에 있는 사람의 목소리로 느껴보자는 다짐을 해본다.1948년 4월 3일을 기해 제주도에서 일어난 무장 항쟁으로 나라가 시끄러운 터였다. 각 도에서 차출된 경찰 병력이 제주에 파견됐지만 항쟁은 쉽사리 진압되지 않았다. 5월 10일 남한 단독선거 후 이승만은 조급해졌고, 경찰 힘만으로 부족하다고 판단한 미군정은 국방경비대를 동원하기에 이른다.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제 14연대에도 “10월 19일 20 시를 기해 제주도로 출동하라”는 명령이 떨어진다. 이에 19일 저녁 제 14연대 하사관들은 제주도로 가서 동족을 죽일 수 없다며 제주출병을 거부했다. 연대 인사계 상사 지창수가 “지금 경찰이 우리한테 쳐들어온다. 경찰을 타도하자. 우리는 동족상잔의 제주도 출동을 반대한다.”며 일반사병들을 선동했다. 2천여 명의 병사가 합세하여 구성된 “제주도 출동거부 병사위원회’는 ‘제주도 인민을 학살하기 위한 출동반대, 조선인민 복리를 위한 궐기, 주한미군 철수와 조국통일, 조선 인민공화국 지지’를 내세우며 봉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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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중-“세계 곳곳이 피흘리고 있지만 그보다 더 많은 새 생명이 태어난다. 이는 작은 기적이다. 여기서 희망을 발견한다”

난 언제쯤이면 학교축제를 제대로 즐길까 한탄하며 관련 자료를 다시 한 번 훑어본다. 지난 광주 때와는 달리 이번엔 사건발생지역이 광범위해 어떻게 다닐지 막막하다. 여수, 순천, 광양, 구례 등등 실제 14연대가 점령했던 지역 외에도 지리산으로 들어간 빨치산을 토벌한다는 명목으로 산간 지역 주변 마을 역시 학살의 현장이 되었기 때문이다. 40분 만에 여수에 도착! 역시 제일 먼저 챙길 것은 지도, 지역의 지리를 익히며 직접 걸어 다니는 것은 그 지역에 애정을 가지고 이해하기위한 필수조건이다. 여순사건 57주기 문화제전이 열리는 여문공원을 향해 가던 택시 안에서 몇 가지 얘기를 들었다. 매형이 학교에 갔다가 돌아오지 못했는데 다른 형제분들이 군인, 공무원이라서 실종자라는 이야기조차 하지 못했단다. 시체수습도 하지 못하고 장모님은 화병으로 돌아가셨다. 형제분들의 나이가 7,80대가 되어가는 지금 이제와 진상규명을 하면 또 뭐하냐며 씁쓸한 웃음을 지으셨다. 20일 오전, 순식간에 여수를 장악한 반군은 기차로 순천으로 이동하여 부대를 재편한 후 주력은 구례, 남원으로 나머지는 광양, 벌교 방면으로 진출했다. 반군이 전남 동부 전역으로 세력을 확장하는 데에는 민중의 지지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4.3항쟁의 주요배경과 마찬가지로 해방 후 남한지역에선 친일 부역행위를 했던 경찰들이 미군정에 의해 중용되어 횡포를 부리고 있었다. 식민지상황에서 벗어났지만 여전히 생활고에 시달리던 민중들은 ‘무상몰수·무상분배에 의한 토지개혁’을 주장하는 반군에 솔깃할 수밖에 없었다. 시내를 장악한 반군은 300여 명의 우익세력과 포로로 잡힌 경찰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정부 수립 2달 만에 발생한 봉기에 당황한 정부는 이를 반란으로 규정하고 즉각 진압군을 파견했다. 10월 21일 광주에 반군토벌사령부가 설치되고 5천여 명의 국방경비대와 최신 군 장비를 갖춘 미 군사고문단은 여수·순천 지역을 빠르게 압박해나갔다.비록 누더기지만 5월 3일 제정된 과거사특별법을 환영하며 여순사건 진상규명에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자는 축사와 함께 전야제가 시작됐다. 마당극 연기자들의 환희에 찬 몸짓에 전율을 느끼고 귀를 휘감는 뚜둥거리는 베이스 소리에 취했다. “어르신들 요즘 젊은 것들은 이런 음악을 합니다. 조금만 마음을 열고 함께 즐겨주세요” 이 밖에도 김원중 씨의 하모니에서는 아픈 기억을 지역민들의 축제로 승화시키려는 노력이 돋보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관객도 함께 덩실덩실 춤을 추는 풍물공연이 제일 가슴에 남았다. 유족들이 준비한 음식을 안주로 전국각지 유족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북으로 피난 간 주민들이 돌아온다는 정보를 듣고 매복해 있던 국군에게 부모님과 남동생을 잃었다는 강화유족회 회장 서영선 씨는 지금도 강화에서는 얘기도 못 꺼낸다고 안타까워했다. 낯선 지역, 새로운 사람을 만났을 때 빠질 수 없는 것 비록 소주와 새우깡뿐이었지만 민간인학살 범국민위원회 사람들과의 이야기는 새벽까지 좋은 안주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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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 총살당하기 직전 자신을 찍는 미군병사를 바라보며 어떤 생각이 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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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은 자가 없도록 확인 사살을 하고 있는 병사들

23일 순천, 27일 여수가 완전히 진압된 후 남은 반군과 지방좌익은 지리산에 숨어 산발적 게릴라전을 전개했다. 국군은 ‘군용팬티를 입은 자, 머리가 짧은 자, 하얀 고무신을 신은 자 등으로 분류해 학살을 자행했다. 이 과정에서 개인적인 원한관계로 부역자를 처형하는 바람에 지역사회는 산산조각이 났고, 이는 피해에 관한 이야기를 더욱 어렵게 했다. 또한 지리산으로 숨은 반군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산간지역마을 역시 학살지가 되고 만다. 이승만 정부는 4.3사건, 여·순사건을 이용하여 ‘공산주의자는 죽여도 좋다’는 인식을 널리 퍼뜨려 남한을 철저한 반공국가로 만들었다. 그나마 살아남은 사람들도 전쟁을 전후하여 죽임을 당한다. 건전한 사상을 심어주기 위함이라며 의무적으로 가입해야했던 보도연맹, 이승만정부에 불만을 가진 정치세력들 1500여명이 적에게 협조할지 모른다는 명목으로 재판 없이 집단 처형되었다.새벽까지 술잔을 기울인걸 어찌 알았는지 아침은 시원한 복어탕이었다. 센스! 그동안 여수지역에서 열린 위령제가 올해 처음으로 광양에서 열렸다. 제주에선 나름의 해원 굿을 했었는데, 이곳에선 전통제례와 각 종교계의 의식이 행해졌다. 이곳 유족들은 왠지 주체적으로 움직이는 것 같지 않았다. 행사가 중간쯤에 이미 좌석의 2/3이상이 비어서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주에서 특별히 오신 무당의 해원 굿과 베가르기 행사가 이어지고 헌화를 마지막으로 위령제전이 끝났다. 여수지역사회연구소(이하 여사연)에서 일하시는 향토사가 박종길 씨의 안내로 14연대 주둔지, 한센인 마을 애양원을 방문하며 몇 가지 의문점을 풀었다. 스쿠터를 어디서 빌려야 하는지 고민하던 내게 과분한 친절을 베풀어주셨다. 향토사가로서 여순사건뿐만 아니라 향토지역문화를 연구하며 열정적으로 살아가는 그 분을 만난 것이 내가 여수에 온 이유가 아닌가 싶었다. 덕분에 여수식 아구찜을 듬뿍 사주시고 돌산대교의 야경을 보여주던 그분. 아픈 기억이 곳곳에 스며 있는 도시이지만, 아팠던 만큼이나 그것을 기억하고 축제로 승화시키며 더욱 애정을 가지는 사람들이 있는 여수. 도시 곳곳에서 열린 문화공연에서도 그 분위기를 한껏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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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화-광양에서 열린 합동위령제. 원혼들에게 헌화하고 있는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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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연대 주둔지-도로로 나뉘어진 14연대 주둔지 터

여순사건을 진압한 이승만 정부는 반공이데올로기를 이용 주민통제체제를 실시하기 시작했다. 가구 구성원 외에 다른 사람이 집에 머물면 반드시 경찰서에 신고해야하는 유숙계(留宿屆)제도와 더불어 48년 제정 공포된 국가보안법은 억울한 유족들의 삶을 옥죄었다. 연좌제는 유족들에게 경제적 궁핍을 강요했을 뿐 아니라 그들의 삶을 끊임없이 통제, 감시했다. 거창의 한 유족은 중앙정보부 직원채용에 합격했는데도 신원조회에 걸려 떨어졌으며,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해외유학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이렇게 경제적인 궁핍과 사회적인 억압 속에서 말 한마디 못하고 한을 마음속으로 삭여야 했던 지난 세월들. 시간이 더 가기 전에 그 뒤틀린 역사를 바로 써야할 것이다.열차 시간은 다가오는데 여수에 온 김에 오동도에 가보고 싶었다. 여수역에서 오동도 가는 길을 궁금해 하던 나를 위해 그 택시기사는 오동도에서 미터기를 끄고는 여수역으로 달렸다. 슝슝~ 이런 작은 감동들이 여수를 잊지 못하게 만들거다. 한 밤의 오동도를 한 바퀴 돌며 생각을 정리해봤다. 이번이 마지막 연재인데, 그동안 여기저기 다니면서 난 뭘 배웠고, 뭘 느꼈나. 여수의 과거에 대한 안쓰러움과 슬픔에의 공감이 앞서야한다는 의무감과 내 무덤덤해진 감정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지금에서야 그때의 기억을 정리하고 있다. 과거에서 현재로 나아가야한다는,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미래를 개척해야한다는 이 식상하고 막연하지만, 내 몸으로 느낀 진리. 과거의 ‘사건’들 보다는 ‘사람’ 이 좋았다. 사람들도 과거의 사건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통해 좀 더 인간다운 세상을 만들어보자는 이야기를 하는 것 아니겠는가. 이번학기 여러 지역을 다니며, ‘이런 사건들이 있었다’를 소개해주는 것뿐만 아니라. 세상에는 이런 사람들이 있고, 이런 사람들의 활동과 신념을 전해줌으로써 세상에 더욱 희망을 불어넣어주는 역할을 했다고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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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앞바다-많은 사람들이 억울한 죽음을 당한채 이곳에서 수장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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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된 두 아들-좌익세력에게 죽은 두 아들과 나중에 합장된 손양원 목사의 묘

그동안 도와주셨던 수많은 사람들. 현혜경씨 박종길씨, 정유하씨 5.18문화재단 관계자. 곽동운씨 나간채 교수님, 정근식 교수님, 거리에서 만났던 지역민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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