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퀼로트와 로베스피에르, 프랑스 혁명

혁명이라는 말을 들으면 가장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프랑스 대혁명’일 것이다.실제로 부르주아 혁명의 이론 틀에 가장 근접하는 것이 프랑스 혁명이다.또한 ‘자유, 평등, 우애’의 기치를 내걸고 일어났던 프랑스 대혁명은 ‘인권’이라는 가치가 가지는 중요성을 급부상시켰으며, 프랑스가 국민 국가적 기틀을 갖추게 했다.이러한 기틀은 혁명 말기에 등장한 나폴레옹이 유럽에서의 패권을 노리게 되는 기반이 되었다.

혁명이라는 말을 들으면 가장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프랑스 대혁명’일 것이다. 실제로 부르주아 혁명의 이론 틀에 가장 근접하는 것이 프랑스 혁명이다. 또한 ‘자유, 평등, 우애’의 기치를 내걸고 일어났던 프랑스 대혁명은 ‘인권’이라는 가치가 가지는 중요성을 급부상시켰으며, 프랑스가 국민 국가적 기틀을 갖추게 했다. 이러한 기틀은 혁명 말기에 등장한 나폴레옹이 유럽에서의 패권을 노리게 되는 기반이 되었다. 그리고 물론 ‘프랑스 대혁명’이라고 지칭되는 시기는 대략 왕정이 몰락하는 1789년 5월에서 나폴레옹의 군부통치가 시작되는 1799년 11월까지 이지만, 실질적으로 프랑스 혁명이 완수되는 시기는 1875년 공화정이 수립되는 시점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그 사이에도 혁명과 반혁명이 일정 주기로 계속 반복된다. 프랑스에 때 이른 현대를 가져온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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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스티유 감옥으로 돌진하는 성난 민중들

프랑스사의 시대구분을 살펴보면 일반적인 시대구분과 다른 특이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역사에서는 고대, 중세, 근대, 현대로 구분하는 4시대 구분법을 이용하는데, 다른 나라들이 현대의 시작을 제 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혁명 이후의 시점으로 잡는 것과는 달리 프랑스는 현대의 시작을 프랑스 대혁명 이후로 잡고 있다. 이는 프랑스사의 조숙성이나 때 이른 근대성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프랑스 안팎에 걸쳐 대한 대혁명의 영향력이 그만큼 엄청난 것이었음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인간이성의 진보라는 측면에서도 프랑스 혁명을 높게 평가할 수 있다. 혁명을 통해서 국왕이라는 신적 주체에게 종속된, 하나의 일개 부속품에 불과했던 신민들이 ‘국민’이라는 하나의 독립된 주체로 변모하게 된 것이다. ‘인권’과 ‘주권’이라는 가치의 급부상은 프랑스 대혁명이 가져온 가장 ‘혁명적’인 결과일 것이다. 1789년 8월 26일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들에 대한 선언’은 이러한 프랑스 혁명의 성격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문서라고 볼 수 있다. 이 선언을 통해서 ‘자연적이고 양도할 수 없으며 신성한 인간의 권리’라는 말이 등장하게 된다. 그리고 이 선언의 제 9조에서는 ‘무죄추정의 원칙’이 규정되어 있다. 이처럼 프랑스 혁명에서 나온 주장들은 단순히 국왕의 압제를 벗어나기 위한 소극적 자유를 원하는 것 이상으로 개인을 보호하기 위한 적극적인 자유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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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스피에르와 상퀼로트-이들은 평등주의적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급진과 반동의 그네타기

혁명의 주체세력이나 이념적인 성향에 있어서는1789년부터 1799년까지 큰 변화가 있었다. 이러한 변화는 각 시기에 제정된 헌법의 성격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1791년의 헌법이 입헌군주제를 도입하고 유산계급의 지배를 공고히 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면 1793년의 자코뱅 헌법은 보통선거제를 도입하고 노동권과 교육권을 보장하는 등 민중지향적인 성격을 가졌다. 하지만 로베스피에르와 생쥐스트, 쿠통 등 급진파들이 처형된 테르미도르 반동 이후에 제정된 1795년의 헌법은 유산계급 중심의 제한선거제를 채택하면서 반동적인 성격을 가지게 된다. 결국 이러한 반동적인 체제는 오래가지 못했고 군부의 힘을 장악하고 있었던 나폴레옹에 의해서 제 1 제정이 들어서게 된다.여기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혁명적인 과정이 급진과 반동의 양극단 사이를 오가면서 전진한다는 점이다. 정치세력의 정당성과 견고함이 대중적인 지지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본다면 혁명의 과정은 그 양극단을 절묘하게 피해가면서 전진해 나가는 것이다. 프랑스 혁명 이후의 프랑스는 ‘절대왕정’과 자코뱅 중심의 ‘민중공화정’의 절충점을 찾기 위해서 전진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우리 사회의 발전과정에 비춰 봐도 크게 다르지 않다. 과거의 보수, 반동적인 정치세력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다면 이제는 진보세력들이 정계에 진출하면서 한국 정치의 우익적 독점이 해체되고 있다. 물론 한국 정치의 흐름이 급진적인 세력에 의해서 좌우되고 있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단지 중도점을 찾기 위해서 조금씩 왼쪽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학 안에서의 탈정치화나 운동권 세력의 약화 역시 비슷한 흐름에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혹자는 이러한 현상을 ‘대학 내에서의 좌파 독점의 해소’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프랑스 혁명 이후 프랑스가 공화정의 수립이라는 절충점을 향해서 점차 나아갔던 것처럼 한국 사회 역시 좌와 우의 충동 안에서 조금씩 전진하고 있다. 꺾여버린 이상, 로베스피에르와 상퀼로트프랑스 혁명이라고 하면 가장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인물이 로베스피에르 일 것이다. 그는 자코뱅의 지도자로서 매우 청렴, 결백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물론 지나치게 이상적인 공포정치를 수행하면서 많은 사람의 미움을 샀고, 테르미도르 반동에 이르러 숙청당하게 되었지만 어느 누구도 로베스피에르에게 부정부패라는 죄목을 뒤집어씌우지는 못했다고 한다.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는 어떻게 시작되었고, 왜 결국에는 사람들에게 버림받게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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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두대(기요틴)-외과의사 기요틴이 고안한 기계, 혁명시기 많은 사람들이 단두대 위에서 목숨을 잃었다.

원래 자코뱅은 좌파 급진주의자들이 모여서 토론을 하던 클럽의 이름이었다. 혁명 초기에는 자코뱅파는 온건주의자들인 페이앙파와의 경쟁에서 승리하고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 하지만 초기에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던 것은 자코뱅 내에서 비교적 온건한 성향을 가지고 있었던 지롱드 파였다. 자코뱅이 온건 성향인 지롱드파와 산악파로 완전히 분열되게 된 계기는 주변 강대국 군대가 프랑스 혁명을 잠재우기 위해 일으킨 반혁명전쟁이었다. 지롱드 파 쪽에서는 프로이센이나 오스트리아 군대의 침입에 대해 군대를 양성해 저항할 것을 주장했던 반면 급진 계열의 산악파는 전쟁이 확대되면 주변 지역에 대한 혁명전쟁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전쟁에 반대했다. 완전한 지방분권제도와 경제적 자유주의를 표방했던 지롱드파와는 달리 산악파는 강력한 중앙집권제와 통제경제제도를 주장했다. 1792년 9월 산악파는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이 시점부터 산악파의 거두인 로베스피에르는 본격적으로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펼치기 시작한다. 이듬해 1월에는 국왕 루이 16세, 엄격히 말하면 시민 루이 카페는 단두대에서 처형되었고, 전국적으로 통제정책이 실시되어 임금과 물가가 국가에 의해서 결정되었다. 이러한 산악파의 정책은 부유한 유산계급의 이익을 반영하는 것이라기보다 하층민중, 특히 도시의 노동대중인 상퀼로트의 이해관계와 부합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공포정치라는 수단과 극단적인 평등주의 이념은 당시에는 받아들여지기 힘든 것이었고, 결국 로베스피에르는 실각하게 된다. 나폴레옹, 혁명의 계승자? 파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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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루이 다비드가 그린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 – 그는 혁명의 계승자가 아니라 파괴자였다.

결국 테르미도르 반동이후로 수립된 정권은 오래가지 못하고 11월 군사쿠데타에 의해서 나폴레옹이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혁명 시기에 외국 군대로부터 프랑스를 보호하기 위해서 군사조직의 힘이 강해졌고, 결국 이러한 집중된 힘을 이용해 나폴레옹이 권좌에 오르게 된 것이다. 나폴레옹은 이후 주변 유럽지역에 대한 정복전쟁을 수행하면서 혁명 이념의 전파를 표방했지만, 그것은 오로지 구실에 불과했다. 하지만 나폴레옹의 출현으로 인해서 프랑스 혁명의 모든 결과가 원점으로 돌아가 버린 것은 아니었다. ‘절대왕정’과 ‘봉건제’가 프랑스에서 영원히 사라졌으며, 훗날 프랑스에서 완전한 공화제가 도입되는 기반이 갖춰진 것이다. 급진주의자들의 이상이 좌절되고 나폴레옹이 황제에 올랐다고 해도, 프랑스 혁명이 모두 좌절된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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