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그들은 우리에게 무엇이었는가

1945년 8월 15일, 우리는 일본으로부터 해방되었다.그러나 정확히 3년 뒤에 우리는 서로다른 국가이념을 국가에서 살게 되었다.그리고 다시 2년 뒤, 한국전쟁은 우리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혔다.해방 후에 나라가 분단될 위기에 몰리자 소수 선각자들은 이념을 넘어 민족의 통일이 우선이라 역설했으나, 이미 대다수 국민들은 이념 논쟁에 정신이 팔려있는 상황이었다.

1945년 8월 15일, 우리는 일본으로부터 해방되었다. 그러나 정확히 3년 뒤에 우리는 서로다른 국가이념을 국가에서 살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2년 뒤, 한국전쟁은 우리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혔다. 해방 후에 나라가 분단될 위기에 몰리자 소수 선각자들은 이념을 넘어 민족의 통일이 우선이라 역설했으나, 이미 대다수 국민들은 이념 논쟁에 정신이 팔려있는 상황이었다. 공식적으로 분단된 것은 1948년이지만, 훨씬 이전에 이미 내부적으로 분단되어 있었다. 무력북진통일론과 남북 총선거론의 공존 1950년대 이승만 정권, 즉 제 1공화국의 대북관은 지극히 이중적이었다. 대외적으로는 유엔 감시 하 남북자유총선거를 주장했으나 내부에서는 철저하게 반공에 기반한 북진통일론을 밀고나갔다. 전쟁 직후 남북 정부가 처음으로 통일정책에 대한 의견을 나눌 수 있는 장소는‘제네바 정치회담’이었다. 그러나 UN을 배제한 채 ‘전조선위원회’를 통한 총선거를 주장한 북한의 의견은 남한과 배치되었다. 결국 회담에서 양국은 결렬한 뒤 한동안 남과 북은 철저하게 대립하였다. 이승만 정권이 내부적으로 강력한 반공정책을 견지한 것은, 정권의 유지와 깊은 연관을 갖고 있다. 김구를 비롯한 민족계열을 배제하고 한민당을 비롯한 친일 경력을 가진 극우파들의 기반 아래 유지된 이승만 정권은 정통성에 있어 매우 취약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북한에 대한 극도의 대립 구도를 유지함으로서 정권에 대한 반대파를 제거하는 동시에 국민들의 통합을 유도할 수 있었다. 이승만은 정적이었던 신익희를 ‘인도에서 북한에 있는 조소앙과 만났다’는 이유로 모함하였으며, 진보당 당수 조봉암이 위협으로 떠오르자 그가 제기한 평화통일론을 이적으로 몰아 증거도 불충분한 상태에서 처형하였다.4.19, 그리고 잠깐의 자유 이승만 정권의 철권통치를 무너뜨린 4.19혁명은 대북 시각에서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장면정권의 통일 정책은 무력북진통일론을 폐기하였다는 점을 제외하면 유엔 감시하 총선거를 유지한다는 점에서 이승만 정권과 큰 차이가 없었다. 중요한 것은, 학생들을 비롯해 여러 사회 세력들(소위 혁신 세력이라 불린)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혁신계에서 내놓은 통일안은 ‘자주적 평화통일론’이었다. 이들의 주장은 ‘민족자주, 평화, 민주의 원칙’ 아래 북한 정권을 인정하고, 외국 군대는 철수하며 남북 협상을 통해 중립화 통일을 이루자는 것이다. 이는 UN에 의존하는 소극적인 장면 정권의 통일안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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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문점에서 열린 제1차 남북 적십자 예비회담

4.19 학생 세력이 만든 최고의 작품은 ‘남북학생회담론’이었다. 4.19 1주년을 기념해 서울대학교 민족통일연맹에서 ‘남북학도회담’을 주장한 것이 계기가 되어‘남북학생회담론’으로 발전하였다. 그 뒤 18개 대학 50명의 대표들이‘민족통일전국학생연맹’을 만들어 본격적으로 ‘남북학생회담’을 추진하게 되었다. 이들은 준비위원회를 구성해 구체적인 방안과 일정을 정하고 북한에 공식적으로 회담을 제안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부 반정부적 발언들과 과격한 논조는 5.16군사 쿠데타에 ‘사회를 안정시키려 군인들이 일어났다’는 빌미를 제공했다. 군사독재, 통일운동의 붕괴와 정부간 회담의 재개 5.16군사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군부는 반공을 국시로 한다는 것과 동시에 통일을 위해 실력배양에 집중한다는 원칙을 발표하였다. 이에 따라 ‘선실력 후통일’이라는 표어 아래 승공, 즉 공산주의를 이길 수 있도록 북한의 국력을 능가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4.19이후 잠깐 활발했던 통일논의들은 모두 탄압당했으며 이는 특히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를 처형한 ‘민족일보 사건’등으로 나타났다. 한편으로는 기존의 통일논의들에서 부분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부분들을 모아 ‘국토통일원’이라는 부서를 만들어 모든 통일 관련 논의들을 정부가 독점하게 하였다. 1960년대 남북국력경쟁에서 자신감을 얻은 박정희 정권은 1970년 8.15 기념사에서 ‘선의의 체제경쟁’을 북한 측에 촉구하면서 남북 대화에 나서기 시작했다.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북한의 박성철 부수상이 서로 밀사로서 각각 남, 북의 정상을 만나 합의를 이끈 끝에 남북관계 변화의 상징이 된 ‘7.4공동선언’을 발표했다. ‘자주, 평화, 민족 대단결’의 대원칙아래 통일을 위해 나아가기로 한 회담은 데땅뜨라는 국제정세와 맞물려 한반도에 평화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1972년 이후 적십자회담이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7차례 열리며 이산가족 문제가 논의됐으나 구체적인 성과는 얻지 못했다. 결국 한반도의 평화 분위기를 이용해 남측에서는 유신정권이, 북측에서는 김일성 독재체제가 확고해 지면서 1973년 북한의 일방적인 대화 중단 선언에 의해 모든 대화는 무산되었다. 군사정권과 민주화, 통일운동의 부활 박정희 대통령이 죽은 뒤, ‘서울의 봄’이라 하여 민주화의 분위기가 조성되었으나 신군부의 전두환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킨 뒤 광주를 피로 물들이고 대통령이 되었다. 전두환 정권에서 변화된 부분은 남북 회담이 재개되었다는 점이다. 남북 적십자 회담, 남북 경제회담 등 여러 가지 형태의 남북 회담이 이루어졌으며, 이를 계기로 상호 이산가족 방문과 문화교류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1986년 북한이 한-미 팀 스피리트 훈련을 문제 삼아 회담을 중단시켰다. 1987년 6월, 군사정권에 대한 학생들과 시민들의 시위는 마침내 6.29선언을 통해 어느 정도의 민주화를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야당 후보들은 서로 단합하는데 실패함으로서 노태우가 집권했다. 노태우 대통령 때 만들어진 통일정책 ‘한민족 공동체 통일방안’에서 자주,평화, 민족의 통일 3원칙을 확립하는 동시에 평화통일의 과도기로서 남북연합을 설정하였다. 현재까지 통일정책의 원칙인‘남북연합제’는 이 때 최초로 등장한 것이다. 1990년 남북이 맺은 ‘남북기본합의서’는 남북의 정상급 지도자들이 최초로 구체적인 사안에 대해 합의한 문서이다. 선언에서는 자주, 평화, 민주의 통일 3원칙을 확립하면서 군비 감축, 남북 교류의 확대, 평화 체제의 확립에 노력할 것을 합의하였다. 남북기본합의서는 지금까지 모든 남북간 합의에서 기본적인 문서로 작용하고 있다. 6월 항쟁을 통해 어느 정도 형식적 민주화가 이루어지고 공산주의 국가들이 개방되면서 학생, 시민 주도의 통일운동이 활발해졌다. 1988년 서울대 총학생회장 선거에서 김중기, 유재석 후보가 김일성 대학 학생들에게 남북학생교류를 제안하면서 통일운동이 부활하기 시작했다. 김일성 대학 학생위원회가 동의한 가운데 6월 10일 판문점에서 회담을 하기로 하였으나 경찰들에게 저지되어 농성을 벌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일부 사상가나 선각자들의 주장을 넘어 통일운동을 사회적 현안으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1989년에는 재야를 이끌어 오던 문익환 목사가 공개적으로 북한을 방문하였으며, 6월에는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을 대표하여 임수경이 북한에 방문, 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하면서 통일운동은 절정에 다다랐다. 새로운 변환기. 남북정상회담의 성사. 민주적인 과정을 통해 최초로 집권한 김영삼 정부에서는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하게 되었다. 1994년의 영변 핵 위기를 무사히 피한 김영삼 정부는, 북한에 남북정상회담을 제의하였다. 부총리급 예비 접촉까지 이루어지고 합의서까지 만든, 회담이 거의 성사된 상황이었으나 갑자기 북한의 김일성 주석이 죽음으로서 회담이 불발로 그쳤다. 게다가 김일성의 죽음에 대한 조문을 놓고 이른바 ‘조문파동’이 일어나면서 남북관계는 급격히 냉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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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 관광의 상징, 봉래호

남북관계를 가장 급격하게 변화시킨 정권은 김대중 정부였다. 정부에서 추진한 소위‘햇볕정책’이라고 부르는 정책은 북한에 대한 경제적 투자와 지원을 크게 늘렸다. 1998년에는 금강산 관광길이 열리면서 제한적으로나마 남한 국민들이 북한 땅에 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그리고 2000년 6월,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평양에서 만나 공동선언을 발표하면서 새로운 남북관계로 넘어가는 발판이 되었다. 남과 북은 자주적 입장에서 경제적 교류를 진작시키며 문제들을 인도적으로 해결하기로 하였으며, 실제로 이산가족 상봉과 장기수 송환이 이루어지면서 남북 관계는 과거 냉전적 대립 관계를 벗어나게 되었다. 그리고 최근 진행되는 경의선 재부설과 개성공단 사업은, 통일을 향한 실천적 방안으로 진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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