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의 질곡을 극복하는 내부의 역동성

한국현대사와 관련된 자료들을 찾다 보면 답답함을 느낄 때가 많다.분명 우리 사회는 20세기 이후 ‘근대’로 들어섰건만, 20세기 우리 역사에 대한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조선시대만 해도 ‘왕조실록’, ‘일성록’, ‘비변사등록’과 같이 당시의 정치, 사회구조를 자세하게 복원할 수 있는 자료들이 남아 있으며, 이 민족이 식민지의 나락에 떨어지는 순간까지도 현실을 기록하고자 하는 노력만은 멈추지 않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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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현대사와 관련된 자료들을 찾다 보면 답답함을 느낄 때가 많다. 분명 우리 사회는 20세기 이후 ‘근대’로 들어섰건만, 20세기 우리 역사에 대한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조선시대만 해도 ‘왕조실록’, ‘일성록’, ‘비변사등록’과 같이 당시의 정치, 사회구조를 자세하게 복원할 수 있는 자료들이 남아 있으며, 이 민족이 식민지의 나락에 떨어지는 순간까지도 현실을 기록하고자 하는 노력만은 멈추지 않았었다. 물론 수많은 신문과 잡지들이 한국현대사를 복원하는데 중요한 자료로서의 역할을 한다. 그러나 신문과 잡지를 1차 자료라고 할 수는 없다. 이미 그 글을 쓴 사람과 그 사람이 속한 조직에 의해서 한 차례 걸러진 내용들을 채우고 있다. 또한 깊은 곳에서 비공개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역사의 흐름을 읽기에는 너무나 부족한 면이 많다. 거대 언론의 왜곡은 지금에 있어서 더 잘 드러나고 있지 않은가?따라서 많은 현대사 연구자들이 자료를 찾아 미국으로, 일본으로 떠난다. 특히 미국의 대외정책 관련 기관들에서 만들어낸 자료들은 신문이나 잡지만으로 채울 수 없는 허기를 만족시키고도 남을 정도로 풍부한 사실들을 담고 있다. 그 중에는 미국의 국무부나 국방부에서 만든 정책 자료들도 있고, 주한미국대사관에서 보낸 전문들도 포함하고 있다. 특히 주한미국대사관의 자료들은 한국의 상황을 상세하게 본국에 보고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현대사를 복원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여기에서 한국현대사의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난다. 먼저 미 행정부의 정책 자료들을 보면 한국의 위치가 한 눈에 들어온다. 어쩌면 한국은 중국과 일본이 있기 때문에 주목받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한국의 지정학적 위치가 강대국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항상 피해를 입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거꾸로 생각하면 그러한 위치 때문에 그나마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는지도 모른다. 왜 한반도와 같은 작은 나라가 냉전의 최전선에 위치해 있어야 하며, 한국전쟁과 같은 비극을 치르고, 세계적 차원에서 냉전이 해체된 지금도 한반도 위에서는 냉전이 계속되고 있을까? 냉전의 대리전이 그 많고 많은 곳을 놔두고 한반도에서 일어났어야 했는가? 그 해답은 바로 거대한 대륙세력과 해양세력 사이에 위치한 한반도의 독특한 지정학적 위치에 기인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도 양 세력은 끊임없이 한반도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하여 온갖 올가미들을 씌워놓고 있다. 한미관계가 그렇고, 북핵문제를 둘러싼 열강들 간의 이해관계의 조정이 그러하다. 한국현대사를 복원하는 작업이 주한미국대사관의 문서들을 통해서 복원될 수밖에 없는 것은 1945년 이후의 역사에서 미국이 단지 외부자의 위치가 아니라 한반도의 내부에서 일정 정도의 지분을 갖고 있다는 점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수정주의자들의 연구가 나타날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가 된다. 수정주의자들은 한반도와 외세의 관계에 대해 주목했다. 외세는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한반도와 같은 작은 땅덩어리가 나름대로의 길을 가는 것을 결코 허락하지 않았다. 특히 중국과 일본의 사이에 위치해 있는 한반도는 상황에 따라서 동북아시아에서의 세력균형을 좌우할 수 있는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다. 주변의 강대국들이 한반도에서 나타나고 있는 자주적이며, 균형적인 외교정책에 대해서 제동을 걸고 있는 이유는 바로 동북아시아에서의 세력균형을 유지하고자 하는, 또는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수정주의자들은 이러한 한반도와 외세와의 관계를 통해서 한국현대사를 복원하고자 했으며, 한반도가 스스로의 길을 걷지 못하도록 했던 외세의 힘에 대해서 비판의 칼을 들이댄다. 이는 결코 역사 왜곡이 아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관점이 한국현대사의 전체를 보여주고 있다고는 할 수 없다. 한 측면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조그만 한반도의 힘이 외세의 힘에 비하여 보잘것없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외세의 힘에 의해서만 좌지우지되었던 것은 더더욱 아니다. 바로 이점이 수정주의자들에 대한 비판의 길목이다. 한반도 내부에서의 역동적인 힘은 한반도가 결코 외세의 의지에 의해서만 움직이지 않도록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한반도 전체에서 미국에 우호적인 국가를 만들고자 했던 미국의 신탁통치 정책은 미국이 지지했던 보수세력들의 반탁운동에 의해서 좌절되었다. 물론 반탁운동이 좌익에 대한 보수세력들의 대응이었기 때문에 그 근본적인 원인은 해방 이후 한반도에서 변화를 원하고 있었던 좌익세력들의 압도적인 힘이었을 것이다.이승만 정부를 통해서 안정적인 반공정책을 실행하려고 했던 외세의 정책 역시 국민들의 힘에 의해서 실패했다. 국민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은 4.19 혁명으로 분출되었으며, 완전한 성공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열린 공간을 만들어냈다. 한국현대사를 통해 국민들은 세 차례(4.19 혁명, 부마항쟁, 6월 민주항쟁)에 걸쳐 외세의 지원을 받고 있었던 정권을 몰락시켰으며, 눈부신 민주주의의 발전을 이룩해냈다. 그러나 한반도 내부의 역동적인 힘이 항상 긍정적인 역할을 한 것만은 아니다. 바로 ‘분단’이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우리의 분단이 외세의 힘에 의해서만 이루어졌다면, 세계적 차원에서 냉전이 무너졌을 때 우리의 분단문제도 해결되었어야 했다. 물론 외세의 영향력이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기 때문에 6.15 정상회담과 같은 남북관계의 진전이 이루어졌으리라. 그러나 베트남이 통일되고, 독일과 예멘이 통일되었음에도 한반도는 아직까지 긴장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1953년에 체결된 불완전한 정전협정은 지금까지도 한반도를 규정하고 있는 가장 큰 규율로서 작동하고 있다. 분단은 우리 민족에게 엄청난 불행을 안겨 주었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이산가족의 문제뿐만 아니라 지난 반세기 동안 휴전선의 철책선 안과 밖에서 지내야만 했던 수많은 군인들의 문제는 지금도 해결되지 않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분단을 통한 체제경쟁이 경제개발의 기간 동안 남북 간의 체제경쟁을 통해 국민을 동원하는데 중요한 이데올로기로 작용하였지만, 그 시대를 살았던 한국 사람들에게는 결코 유쾌한 기억으로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민족주의 역시 분단문제에서 결코 유리되지 않는다. 한국의 민족주의는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한 저항 민족주의로 시작되었건만, 1945년 이후의 민족주의는 결코 그렇지 못하다. 남한의 민족주의는 한미동맹과 반공을 그 기준으로 하고 있었으며, 북한의 민족주의는 반미를 기준으로 하고 있었다. 민족주의는 우리 민족이 이해관계를 지상 목표로 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외세와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는가가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작용하였다. 냉전의 최전선에 위치한 한반도에서 민족주의마저도 결코 순수하게 작동하지 않았다. ‘현대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이것은 1988년 모 신문사에서 출간한 책의 이름이다. 그러나 이미 15년 이상이 흘렀건만 이 질문에 대해서 자신있는 답이 아직까지도 나오지 않고 있다. 어쩌면 정답이 없을지도 모른다. 역사는 정체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살아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역사가 흐르면서 시대가 변한다면, 현대사를 바라보는 눈과 역사를 평가하는 기준 역시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것은 우리 현대사를 균형된 시각에서 바라보기 위해서는 외부의 힘과 내부의 힘을 동시에 고려해야 하며, 시기에 따라서 안과 밖의 힘이 결합하는 양상을 동태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점이다. 때로는 외부의 규정성이 더 강하게 작동하기도 한다. 그러나 강한 외부적 규정성이 고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내부의 역동성이 외부의 규정성을 밀어내기도 한다. 물론 이것도 변하지 않는 진실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한국 현대사가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교훈을 찾을 수 있다. 냉전의 최첨단에 위치한 한반도에서 지금까지도 분단의 질곡이 계속되고 있지만, 결코 그러한 상황이 계속되지는 않을 것이다. 남쪽을 찾은 경계인을 구속하고, 학자의 발언을 냉전적 ‘법률’에 의해서 옭아매려는 시도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지만, 이러한 상황이 언제까지나 계속되지는 않을 것이다. 질곡을 벗어나고자 하는 힘은 내부의 역동성으로부터 나올 것이다. 물론 내부적 역동성이 항상 긍정적으로만 작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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