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의 고전, 영국혁명

영국 혁명이라고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가.보통 영국혁명이라고 하면 기독교의 한 분파인 청교도와 올리버 크롬웰이라는 영웅적 이미지의 인물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물론 스튜어트 왕조의 왕정복고 이후 명예혁명이 종료된 이후에야 영국에서의 혁명이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겠지만, 이번 글에서는‘청교도혁명’에 초점을 맞춰보고자 한다.영국에서의 큰 정치적 발전을 이룩했던 ‘혁명의 고전’ 영국혁명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영국 혁명이라고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가? 보통 영국혁명이라고 하면 기독교의 한 분파인 청교도와 올리버 크롬웰이라는 영웅적 이미지의 인물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물론 스튜어트 왕조의 왕정복고 이후 명예혁명이 종료된 이후에야 영국에서의 혁명이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겠지만, 이번 글에서는‘청교도혁명’에 초점을 맞춰보고자 한다. 영국에서의 큰 정치적 발전을 이룩했던 ‘혁명의 고전’ 영국혁명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영국 혁명으로 가는 길(소제목) photo1 photo2 영국 혁명이 일어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움직임은 지방 토지 소유자 계층인 젠트리(Gentry) 층의 성장이다. 일반적으로 이해하자면 이들은 지주계급의 하층과 차지농의 상층부에 위치했던 계급이라고 볼 수 있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수많은 대외전쟁을 치르면서 국가 소유의 토지를 대부분 판매하게 되는데 이를 사들임으로써 젠트리 계층은 급속히 성장하게 된다. 이 시대 영국에서는 장자상속제가 엄격하게 지켜지고 있었는데, 이로 인해 장자는 토지소유자가 되고 차남 이하의 자식들은 도시로 나가 변호사 같은 전문직에 종사하게 된다. 결국 이들 계층은 사회적 엘리트 위치를 차지하게 되고, 의회의 주도세력이 된다. 물론 의회에 진출하면서 일정한 정치적 참여가 가능했겠지만, 절대왕정이 존재하는한 젠트리 계층의 경제적인 힘과 정치적인 권리 사이에 불균형은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이 정치적 권리의 확대를 갈망하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엘리자베스 사후 튜더 왕조가 끊어지면서 스코틀랜드의 왕이었던 제임스 1세가 잉글랜드의 왕으로 등극하게 된다. 잉글랜드에는 이미 강한 의회주의의 전통이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왕권신수설의 신봉자였던 왕은 의회의 권리를 하찮게 생각했다. 왕과 의회사이의 정치적 투쟁이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하는 시점이었다. 이러한 정치적 투쟁은 찰스 1세가 등극하면서 그 정점에 이르게 되는데, 찰스 1세는 의회가 왕에게 제출한 ‘권리청원’을 거부하고 의회를 해산해버리게 된다. 이후 11년간 의회가 없는 상태에서 왕의 전제통치가 실시되게 된다. 의회를 해산시킨 왕은 또한 스코틀랜드 지역에 대한 국교강요 정책을 시기하게 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주민이 가톨릭을 믿고 있던 스코틀랜드가 왕의 이런 조치에 대해서 반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왕은 1937년 스코틀랜드와 전쟁을 시작하게 된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왕실의 재산을 이미 다 매각해버린 상태였기 때문에, 찰스 1세는 전쟁을 위한 돈을 마련하기 위해 의회를 재소집 하게 된다. 재소집 된 의회는 왕의 요구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1641년 대간의서라는 문서를 통해서 그 동안의 왕의 실정에 대해서 통렬한 비판을 가했던 것이다. 결국 왕은 이를 받아들이기 거부하고 피신하게 되고, 왕당파와 의회파 사이의 전쟁으로 잉글랜드는 내전에 빠져들게 된다. “우리는 왕을 처형하고자 한다” 내전 초반에는 찰스 1세 쪽이 군사적인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왕은 이러한 우위를 제대로 이용하지 못했고, 1945년 네이즈비 전투에서 의회파가 승리하면서 의회파가 우위를 점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의회파 군대의 주력이 되었던 것이 바로 올리버 크롬웰이 이끄는 철기군이다. 의회파가 내전의 승리자가 되면서 찰스 1세 아니 피의자 ‘찰스 스튜어트’와 영국의 군주제는 “우리는 그의 머리를 그 위의 왕관과 함께 잘라버리고자 한다”라는 크롬웰의 요구에 따라 처형되었다. 물론 이로 인해 영국에서 군주제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크롬웰이 죽은 후 왕정복고로 스튜어트 왕조의 찰스 2세가 즉위하고, 그는 이렇게 말했다. “두 명의 불법적인 권력자(올리버 크롬웰과 그의 아들)로부터 권력을 회복하였다” 하지만 누구도 더 이상 영국에서 왕의 절대적 권력을 인정하지 않을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이것이 영국혁명이 가져다준 가장 큰 정치적 결과였으며, 훗날 영국의 독특한 정치제도의 근간이 됐다. 왕을 처형할 정도로 혁명이 과격화의 길을 걷게 되자, 점차 회의를 느끼고 의회파에서 이탈하는 사람이 발생하게 된다. 또한 종교적인 견해의 차이로 의회파 내에서 분열이 발생하게 된다. 의회파의 대다수를 구성하고 있었던 장로파는 칼뱅교의 확대를 주장하면서 한 국가가 단일한 종교아래 통일되는 것을 주장하였고, 이와 반대로 독립파는 종교적인 독립과 자유를 주장하였다.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올리버 크롬웰이 속해 있었던 독립파 세력은 군사적인 우위를 이용해 장로파 세력을 숙청하고 의회파 내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된다. 잉글랜드의 내전이 마무리되고, 군주제가 일시적으로 해체된 상황에서 올리버 크롬웰의 신정정치가 시작된다. 아이러니: 혁명의 아쉬운 결말 photo3 올리버 크롬웰의 신정정치는 매우 흥미로운 정치형태이다. 정치과정에 철저한 종교적 금욕주의를 적용시킨 이 독특한 통치방식은 이상사회로 나아가는 것이었을 수도 있지만, 종국에는 사람들의 불만을 가져왔다. 지상에다 ‘신의 나라’를 건설하려던 크롬웰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가장 문제시되는 점은 올리버 크롬웰이 군사력을 바탕으로 해서 권력을 차지했다는 점이다. 이는 20세기 아시아 지역에서 일어났던 군부독재의 형태와 유사하다. 여기서 우리는 혁명이라는 과정이 가져오는 부정적인 측면을 살펴볼 수 있다. 혁명을 주도하는 세력은 혁명의 성공과 안정화를 위해서 군사적인 우위를 점할 필요가 있는데, 이때 동원된 군대와 지휘관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서 움직이게 된다. 결국 군대가 정치에 개입하는 결과가 나타나게 된다. 물론 이 한 측면만 가지고 혁명의 성과를 폄하해서는 안 되겠지만, 혁명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아이러니는 왠지 모를 씁쓸함을 남긴다. 그리고 영국 혁명을 통해서 많은 급진적인 사상이 쏟아져 나왔는데, 혁명은 결코 가장 급진적인 방향으로는 나아가지 못한다는 점이다. 이 역시 많은 혁명에서 관찰되는 사실이다. 이는 혁명을 시작한 급진적 엘리트 세력이 가지는 한계점이기도하다. 영국 혁명을 통해서도 많은 급진적 사상들이 표출되었다. 원시적 공산주의 사상을 표출하였던 ‘디거스(Diggers)’나 국민들의 정치적 자유의 확대를 주장하였던 ‘수평파(Levellers)’가 대표적이다. 특히 수평파는 ‘인민협정’이라는 급진적이고 강력한 정치 강령을 발표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수평파가 제시한 ‘인민협정’의 일부를 여기서 간략히 제시하고자 한다. 제 1 조 대표자를 선출하는 데는 21세 이상의 모든 남자가 선거권을 가진다. 제 9 조 의회의 권한은 명백해야하며, 국민의 권익을 보존하는데 중점을 맞춘다. 제 11조 양심에 반하여 종군할 것을 강요할 수 없다. 제 15조 장기간에 걸쳐 고질화된 불만을 제거하고 그 원인들을 시정한다. 제 29조 징병의 권한은 의회가 가진다. 현재에 와서야 제 1조에서 들어난 선거권의 확대가 대수롭지 않아 보이지만 당시 상황에서는 매우 파격적인 주장이었으며, 이는 훗날 차티스트 운동이 일어나고 나서야 이 정도의 선거권 확대가 이뤄지게 된다. 그리고 제 11조에 나타난 양심적 병역거부와 관련된 조항이 400년 전 사람들에 의해서 주창되었다는 것은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이러한 수평파 역시 혁명의 주도세력에 의해서 무시되고 탄압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혁명을 주도한 계층이 급진적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이익을 포기해야 할 정도의 급진적인 방향으로 혁명을 진행시키지는 못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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