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계로 알아보는 서울대내 여성의 위치 변화]
-여학생의 입학률 증가
60년간 서울대학 입학생의 통계를 보면 여학생의 비율 증가는 주목할 만하다. 1976년 이전에는 여학생 수의 큰 변화가 없다. 반면 이후 20년 동안 서울대 여학생은 432명에서 1153명으로 약 3배가량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전체 비율도 13.5%에서 25.2%로 상승해, 상대적으로 남학생 비율은 86.47%에서 74.8%로 감소했다. 이는 여성에 대한 전근대적 교육관이 변화했음을 시사한다. photo1-95년까지 여성박사는 전체 10명 중 한명 꼴 전체 박사 학위 취득자의 수도 꾸준히 증가했다. 특히 1990년 이후 취득자는 1987년에 비해 두 배 이상 증가했다. 동시에 여성 박사학위자도 꾸준히 증가해 95년에 이르러 약 100명에 이른다. 그러나 전체 학위자 중 여성비율을 따져보면 상황은 달라진다. 여학생의 박사학위취득자는 8~12%에 그쳤다. 한편 여성 석사학위자는 20%를 꾸준히 유지했던 것으로 조사됐다. photo2-교원의 여성비율, 아직은 역부족 90년에서 2004년까지 전체 여성 교원의 수는 89명에서 150명으로 두 배 가량 증가했다. 인문대의 여성교원 비율도 지난 14년간 6%에서 13.6%로 두 배 이상 증가했다. 반면 경영대의 여성 교수는 14년간 한명도 없었다. 이는 학부의 성향과 교원 규모에 따라 학부 전체 교원 수가 영향을 받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대표적으로 경영대, 법대, 공대는 여성보다 남성의 임용이 두드러지는 학부다. 그러나 올해 경영대에 여교수가 첫 임용됐다. 이로써 현재 16개의 모든 단과대학에는 최소 1명 이상의 여교수가 임용돼 있는 상태다. photo3photo4[연대별로 알아보는 서울대내의 여성의 위상 변화]-주체보다는 보조의 개념이 강했던 6,70년대 6,70년대는 4.19혁명과 군부독재로 인해 학생들의 정치적, 사회적 의식이 상대적으로 고양된 시기였다. 그럼에도 당시 여학생들은 주체로서 인정받지 못했다. 서울대 64학번 김영중 약대 교수는 “사회적 통념상 서울대에 입학한 여학생들은 남학생들의 자리를 하나 더 빼앗았다는 평가를 받았기 때문에 대부분 조용히 지냈다”고 말했다. 하지만 6,70년대에 서울대 내 여성 움직임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60년대에 여학생회가 있었는데 65년에는 음대 윤경자 씨가 여학생회장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1966년에는 여학생회관의 개관식을 위한 총여학생회의 각종 행사가 있었고 70년대에 여성들의 활동은 더욱 두드러져 79년 5월에는 3일에 걸쳐 여학생들의 축제인 ‘여울제’가 열렸다. -주체의 목소리로, 80년대 80년대에 들어서 정권이 바뀌고 이에 학생사회는 새로운 제도와 법에 대항하는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이 시기 84년에는 학교에서 임명하는 학도호국단 내 여학생부와는 달리 여학생이 주체적으로 만든 총여학생회(총여)가 처음 들어섰다. 이후 총여는 노동문제와 더불어 많은 여학생의 권익을 주장했는데 이를 계기로 여학생휴게실이 만들어졌다. 이처럼 80년대에는 여학생의 움직임이 활발했다. 83년 학생회추진위원회로 활동하기 위해 학도호국단의 여성부에 있었던 은수미 씨는 “80년대 후반으로 갈수록 노동운동 내 성차별에 관한 문제제기가 이뤄졌다”고 말했다. 학생사회 속에 주체로 들어서게 된 여학생들의 위상 변화는 여러 부분에서 나타났다. 86년 5월에는 인문대 역사상 최초의 여성 단대회장이 탄생했고, 83년 3월에는 2백88명을 수용하는 여학생 기숙사가 개관했다. 80년대에 여학생들의 움직임은 총여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이뤄졌지만 총여학생회의 흐름이 항상 원활히 이어져 온 것은 아니었다. 총여학생회는 ‘전체 운동에의 충실한 복무’라는 부차적인 위치의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전체 학생운동 내에서 제대로 된 위상을 갖지 못했다. -여성운동 꽃 피우다, 90년대 90년대의 여성 운동은 80년대에 이뤄진 기존 세력들에 동조하지 않던 여타의 소규모 여학생들과 여대학생들이 사회 속에서 경험한 사회적 모순을 바탕으로 새롭게 재탄생했다. 서울대 내에서도 이런 흐름은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90년대 중반 성폭력 교수 퇴진 운동을 시작으로 반성폭력 운동은 활발해졌고 98년 관악여성모임연대(관악여모)는 학내 성폭력 사건이 불거져 나오자 ‘성폭력해방공간 선언운동’을 펼쳤다. 관악여모는 97년에 만들어진 여성운동단위로 서울대내 90년대 여성 운동에 불을 지폈다. 초창기 멤버였던 이가은(치의학 졸)씨는 “동아리, 여학생자치회 등이 많이 생겨난 분위기 속에서 여성 연대를 위해 관악여모를 만들었다”며 “당시 관악여모에서는 96년 한총련 연세대사태에 항쟁하는 퍼포먼스, 조형물 설치, 타대학과 함께 반성폭력운동을 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90년대 서울대내 여성운동은 활발히 이뤄졌다. photo5 2000년 서울대는 2학기부터 성희롱 및 성폭력에 관한 학칙을 시행했다. 그리고 최근 서울대학교내의 여교수 비율이 처음으로 10%를 넘어섰고 관악여모를 비롯한 많은 여운단위, 「쥬이쌍스」와 같은 여성주의 언론들이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하지만 여성 운동은 어느 때나 위기의 순간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었다. 서울대 내 여성운동도 마찬가지이며 최근에 표출되는 위기는 여성 단체 내의 폐쇄성, 외부인의 무관심, 대학 내 공동체의 전반적인 쇠퇴 등의 복합적 결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60년간 서울대 내 여성 운동은 꾸준히 진행돼 왔고, 앞으로도 계속 진행될 것이다. 이런 여성 운동의 미래가 좌초되지 않도록 서울대내 여성들이 올바른 방향키를 잡고 능숙하게 항해하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