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활, 역사 짚어보기

농활, 그 오래된 시작 ” 농민들이 맞닥뜨리는 농촌의 현실과 이러한 상황들이 나타나게 되는 이 사회의 구조적 모순들을 농민들과 함께 일하고 대화하면서 피부로 직접 느끼고 이것들을 함께 해결할 수 있는 방향을 모색해 나가는 것”(이화여대 2001년 봄 농활자료집) 농민학생연대활동의 호칭이 가지는 대략적인 의미를 이렇게 정의한다면, 우리는 농활의 뿌리를 의외의 사건에서 발견할 수 있다.

농활, 그 오래된 시작

” 농민들이 맞닥뜨리는 농촌의 현실과 이러한 상황들이 나타나게 되는 이 사회의 구조적 모순들을 농민들과 함께 일하고 대화하면서 피부로 직접 느끼고 이것들을 함께 해결할 수 있는 방향을 모색해 나가는 것”(이화여대 2001년 봄 농활자료집) 농민학생연대활동의 호칭이 가지는 대략적인 의미를 이렇게 정의한다면, 우리는 농활의 뿌리를 의외의 사건에서 발견할 수 있다. 1928년, 신간회는 일제와 지주의 억압에 대항해 일어난 갑산 화전민 투쟁에 청년 학생들을 파견했다. 파견된 학생들은 농민들과 함께 낮에는 노동하고 밤에는 둘러앉아 토론을 벌였으니, 이 때의 사건은 오히려 1930년대 브나로드 운동에서 1960년대 향토 개척단 운동에 이르는, 낭만적이고 인도주의적인 ‘농촌계몽봉사운동’보다 ‘농민학생연대활동’의 성격에 가까이 접근했다 할 수 있다. 끊어졌다 이어지다 농민학생연대활동의 직계 연원이 되는 것은 1970년대 중반 시작된 팀 단위 농촌활동이다. 당시는 군부 독재 시기로, 정치와 경제 등 사회 전반에서 민중희생을 담보로 한 정부의 일방적인 정책이 추진되었다. 학생들은 이러한 상황에서 막 사회적 구조의 모순을 깨닫기 시작한 민중 – 당시 농민과 노동자로 대표됐던 – 으로 하여금 사회 변혁의지를 고취토록 하여, 이들과 연대해 억압적인 사회 현실에 대항하고자 했다. 이러한 목적을 지닌 활동의 주요한 일환으로 농활이 제시된 것이다. 이 때의 농활은 농민의 주체적인 역량 강화를 목표로, 농민활동의 지원을 과제로 삼았으므로 노동력 지원보다는 분반활동, 호별 방문 위주로 활동의 구체적인 내용이 구성되었다. 한편 각각의 팀 단위로 활동했으므로 통일성이 부족하다는 필연적인 한계도 있었는데, 이는 농활의 학내 파급을 어렵게 해 이 시기의 농활이 대중화되지 못한 데 일조했다. 대중 속으로 ” 농촌현장에 들어가 농민들과의 만남을 통해 모순의 척결을 지향하는 ‘집단적’이며 ‘의식적’인 활동” (1985. 서울대 대학언론 제 26호) 농활에 있어서 대중성의 부족이라는 고민은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해결되기 시작한다. 1980년 일어난 광주민주화운동으로 학생사회는 운동을 보다 조직적통일적으로, 그리고 보다 폭넓게 수행해야 한다는 요구에 직면한다. 이러한 필요성에 의한 학생운동의 변화에 힘입어, 이전 선진인자 중심의 팀 농활은 농활추진위원회 또는 총학생회 등의 전체기구가 관리하는 과 단위 농활로 변모한다. 대중성, 공개성과 더불어 과의 결집력을 확보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지속되어 87년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가 출범하면서 전대협 하에 전국적 단위의 농활이 시행되기에 이르렀다. 이후 93년에는 전국농민회총연맹이 성립되어, 전대협의 후신인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과 전농의 연대 사업으로 농활이 추진됨에 따라 농활 규모가 더욱 크게 확대된다. 그리하여 이 즈음 농활은 한 때 연인원 6-7만 명에 이르는, 대규모의 대학생 연례 활동으로 입지를 다지게 된다. 한편 농활의 대중화는 농활의 성격 자체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농활의 기조가 농촌현실에 대한 폭로와 농민 의식화에서, 일손 돕기와 학생들의 사회체험을 넓혀주는 방향으로 전환하기 시작한 것이다. 농민운동이 87년 6월 항쟁 이후 농민회라는 자체적인 조직을 갖게 된 것도 이러한 변화에 일조한다. 연대, 고개 숙이다 1990 년대 대학사회는 뚜렷이 탈정치화된다. 6공화국 출범 이후 변화하기 시작한 정치 환경은 1993년 문민정부 탄생을 계기로 대학사회에 더욱 큰 영향을 미쳤다. 분명한 ‘ 타도’대상을 잃어버린 학생운동 세력은 이전의 강력한 통일성을 상실했으며, 운동에 대한 학생들의 호응도는 점차 약해졌다. 이러한 경향은 신자유주의의 물결 아래 등장한 경쟁 사회 구조에서도 어느 정도 기인한다. 치열한 경쟁 논리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개인주의가 확산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대학 사회의 풍토에서 80년대 후반부터 시작됐던 농활의 성격 변화는 가속된다. 농활은 농민의식화나 농학연대라는 심각한 주제의 활동이라기보다는 일손을 돕고 땀의 소중함을 배우는 기회로 인식되는 측면이 강했다. 또는 약화된 학생 세력이 내부의 자체결속 강화의 수단으로 농활을 활용하기도 했다. “…. 연대의 관점보다는 학생회 강화의 측면만 강조하는 모습도 많이 보이게 되고 관점을 명확히 세우기 위한 교양보다는 실무 중심의 교양위주로 진행되는 것 등 실제 수행과정에서 관점과 원칙이 퇴색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99년 한총련 자료집 녹두꽃) 이러한 경향은 2000년대에도 변함없이 이어진다. “물론 과거의 연대의 의미도 크겠지만 학생들이 농촌에서 뭔가를 배우고 온다는 이유가 더 크죠. 농활로써 과 공동체가 결집될 수도 있고요.” 서울대 총학생회장 홍상욱 씨의 말이다. 여성, 고개 들다 1990 년대 후반 농활에 있었던 뚜렷한 변화는 여성주의에서 비롯된다. 이 시기에는 대학 내 반성폭력 운동이 학칙제정 운동으로 이어지는 등 ‘여성주의’가 대학사회의 주요한 화두로 떠올랐다. 농활도 이러한 흐름에 합류하여 분반조직에 여농반이 새로이 추가되는 등 변화의 움직임을 보인다. 특히 반성폭력에 대한 논의가 농활에 깊이 파고들게 되는 것이 특기할 만하다. 반성폭력이 농활 자료집의 주요한 내용으로 자리 잡았고, 학생들은 연대지역 주민들과 함께 반성폭력 워크숍을 가지거나 각 학교의 총여학생회, 여성위원회 등을 통해 사전교양을 진행했다. 일부 단위에서는 ‘식사 주체’, ‘체조 주체’ 등 농활에서의 담당직책 종류에 ‘반성폭력주체’라는 새로운 직책을 추가했다. 이러한 여성주의의 신장 하에 2001년의 홍성군 농활 성폭력 사건이나 2004년 농활 철수 사건이 성립되고 공론화되었고,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부결되긴 했지만 2003년에는 서울대 총학생회가 충청남도 농민회와의 반성폭력 규약문 협의를 시도하기도 한다. 위기의 농활 1990년대 전반 절정에 달했던 농활 참여도는 90년대 후반 들어 현재에 이르기까지 점차 하향선을 그린다. 1997년의 경우 일부 대학에서는 그 감소 폭이 3~40%에 달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에 들어서는 인원이 부족해 아예 농활을 못 가게 되는 단위도 나오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90년대부터 대두된 경쟁의 문화 아래 일찍부터 졸업 후의 진로와 취업에 대해 걱정하는 학생들의 경향에도 원인이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농활이 현재에 맞는 ‘명료한 얼굴’을 가지지 못한 것에서 기인한다. 10여 년 전부터 제기되어 온 농활의 관성화라는 문제 제기에 대한 뚜렷한 해결책이 아직까지도 제시되지 못한 채 기존의 농활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 96년 부산 동의대와 전북 원광대를 시작으로 각 대학에서 농활을 봉사 학점으로 인정해준다는 발표를 하는 등, 농활이 봉사활동화 되어가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현상이지만, 여전히 ‘농민학생연대활동’이 내세우는 표면적인 슬로건은 그대로다. 이러한 상황에서 학생들은 농활 대신 다른 현장활동을 택하기 시작했다. 환경적인 논쟁의 중심지가 되는 지역을 찾아가는 환활(환경현장활동), 중활(중소기업 현장체험활동), 빈활(빈민활동), 장애인과 함께하는 현장활동, 전공을 살려서 가는 의활 또는 간활 등이 그것이다. 또한 대학의 총학생회 선거 공약으로 농활 폐지 항목이 등장하기도 했으며, 2003년 성균관대 총학생회에서는 농활을 ‘운동권의 유물’이라 규정하며 농활 거부를 전격 선언했다. 농활은 이제 존폐 여부마저 논란이 되는 상황에 처해 있다. 이번 여름 서울대 농활 철수 사건 이후 농활은 또다시 도마에 올랐다. 그리고 이 논란은 정말 농활이 없어지거나, 또는 혁신적으로 변화하지 않는 한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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