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활, 역사 짚어보기
농활 그리고 철수, 아직 끝나지 않은 얘기들
‘피해 복구반’을 찾아서

농활 그리고 철수, 아직 끝나지 않은 얘기들

총학생회의 파병반대 수행을 위한 농활의 연기, 참가인원수가 적어서 농활을 포기한 과/반, 아예 농활 갈 계획을 세우지 않았던 과/반….2004 서울대 농활은 가기 전부터 많이 삐걱거렸다.혹자는 이를 학내 운동권 붕괴의 연장선상에서 오는 자연스런 현상으로 보기도 하고, 개인주의와 얽혀 대학문화가 소멸하는 결과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총학생회의 파병반대 수행을 위한 농활의 연기, 참가인원수가 적어서 농활을 포기한 과/반, 아예 농활 갈 계획을 세우지 않았던 과/반…. 2004 서울대 농활은 가기 전부터 많이 삐걱거렸다. 혹자는 이를 학내 운동권 붕괴의 연장선상에서 오는 자연스런 현상으로 보기도 하고, 개인주의와 얽혀 대학문화가 소멸하는 결과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어찌됐든’ 농활에 대한 여러 논의들 속에서 농활대들은 ‘2004 서울대 농민학생 연대활동’을 펼치기 위해 충남으로 향했다. 또 다시 채택된 대응방식, 철수 농활 가기 전 논의들은 농활을 가서도 연장선을 그으며 몇 가지 문제의식들을 던졌다. 특히 농민학생 ‘연대’활동의 의의가 농활 진행 과정에서 충분히 공유되지 못한다는 문제의식이 강조되었다. ‘작업과 분반활동 속에서 농민들과 소통하려는 노력들이 줄어들었다’, ‘농활이 아니라 무슨 MT를 온 것 같다’등의 지적이 그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또 90년대 후반 급속히 커진 ‘반성폭력, 반성차별’ 등의 여성주의 담론이 농활과 맞닿는 접점에서도 많은 문제가 발생해왔다. ‘농활과 반성폭력, 반성차별 기조의 공존’에서 비롯된 문제들은, 2001년 홍성군 농활대 철수때에도 (어쩌면 불가능할) 완전한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몇 가지 눈에 보이는 노력과 개별 농활대의 능력에 의존하며 넘어갔다. 나아진 점도 있었지만 그에 비해 불안함이 더 컸던 이 공존은 2004년에 다시 깨졌다. 먼저 15개 과/반 중 8개 반이 농활에 참가한 인문대는 같은 마을에 들어간 국문과와 노문과반이 철수를 결정했다. 이들 과반의 경우 농활 수행 중 언어적 성폭력이 있었으며, 공개적인 사과를 포함한 합의를 만들었지만 이와는 별개로, ‘사건 발생 이후 피해자의 심리적인 충격과 농활대 내부의 준비 부족으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환경형 성폭력에 대한 우려’ 때문에 철수를 결정했다. 법대의 경우 4개의 과/반 중 3개 반이 농활에 참여했으나 이중 A반은 충남도연맹 간부의 발언을 반성폭력 자치규약을 무시한 성폭력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철수를 결정하였다. B반은 발언에 대한 농민회 측의 사과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내부 구성원들의 입장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내부 문제로 인한 철수’를 단행했다. 반면 C반은 남은 농활 일정을 수행했다. 사회대 학생회의 철수 권유, 그 후 사회대의 경우 얘기가 조금 달라진다. 사회대는 집행부에서 일어난 일을 계기로 ‘단대차원’에서 농활대장회의를 소집했으며, 각 반 농활대에 철수 논의를 전달했다. 이때 농활대의 개별 논의를 배려하기 위하여 철수를 ‘단행’하지 않고 ‘권유’했다. 그리고 이 ‘권유’에 대해 각 반의 결정은 달랐다. 정치학과/일치단결반과 심리학과/알반, 사회복지학과/한길반과 경제학과/시반의 경우 내부 논의를 거쳐 농활대의 철수를 결정했다. 일치단결반의 경우 성폭력 사건에 대한 농민회의 대응에 대하여 ‘농활대가 연대하는 직접적인 당사자인 농민회가 반성폭력 운동에 대한 의지가 전혀 없고, 사건의 해결조차 책임지지 않으려는 모습을 보였다’며 ‘이는 반성폭력, 반성차별의 기조가 완전히 실행 불가능한 상황, 더불어 농민학생연대활동의 기반을 이루는 연대의 원칙이 완전히 산산조각난 상황’임을 표명했다. 시반의 경우 처음 잔류를 결정했으나 후에 다시 철수를 택했다. 시반 농활대장 우성희씨(02, 사회학과)에 의하면 “농민회가 연대하는 과정에서 약속이 어긋났지만, 우리 농활대가 이 마을 자치적으로 그와 관련해 아무것도 해놓지 않은 채 철수해서는 안된다는 의견이 커서 잔류를 택했다”고 한다. 그 후 합의를 도출하긴 했으나 마을분들의 진정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합의가 아니었다고 판단하고, ‘껍데기일 뿐인 합의문을 만들어 놓고는 농활을 끝까지 수행한다는 것은 그동안 우리가 해왔던 반성폭력에 대한 모든 노력들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여 철수를 결정했다. 반면 그 외의 반의 경우 개별적인 내부 논의를 통해 잔류를 결정했다. 철수하지 않은 반 중 하나인 사회학과/악반의 농활대장 노영실씨(02, 사회학과)는 “우리 반의 경우 같은 마을에 4년째 들어간 특수성이 있다”고 전제한 후 “농활 수행에 있어 마을의 농민분들과 함께 직접 풀어나가는 것이 중요하지, 농민회와 학생회의 연대 결렬이 농활수행에 미칠 영향은 가시적이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또 “개별마을에서의 연대가 농민회와 연결돼야만 농활을 잘 수행하는 것은 아니다”고 덧붙였다. 또 다른 잔류 결정 반인 언론정보학과/꼼반의 경우, 잔류 결정 후 마을 분들과 ‘사건 발생시 공론화 및 공동 해결책 모색, 피해자 중심주의 존중’의 제안에 대해 합의를 보고 호별 방문 등을 통해 마을 분들의 이해를 구했다고 한다. 꼼반 농활대장 윤효정씨(03, 사회복지학과)는 “농활 오기 전에 믿었던 성폭력 사건에 대한 사회대-농민회 간의 해결 루트가 없어진 상황이었지만, 그렇다고 철수 하는 것은 문제 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며 “큰 흐름으로써 농민회와 맺는 연대도 있지만 연대가 꼭 그것만은 아니며, 개별 마을에서 새로운 해결 루트를 만드는 과정에서 또 다른 연대의 의의를 찾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러한 의견의 한계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있다. 일치단결반 여름농활에서 여농반장을 맡았던 장윤정씨(03, 경제학과)는 “농활에서 우리의 행동은 결국 농민회와의 활동으로 수렴된다”며 “마을 안에서의 열흘간의 농활은 분명 한계가 있고, 농활을 다녀온 후에도 우리의 활동은 농민회와 연계하는 차원에서 이어진다”고 말했다. 비온 뒤 땅은 굳는다? photo1철수에 대한 입장을 결정하는데 개별 마을의 다양한 상황과, 농활의 여러 기조를 풀어나가는 과정에서의 입장 차이 등 여러 문제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였다. 하지만 사회대 학생회가 성명서를 통해 발표했듯 철수의 근본적인 원인은 성폭력 그 자체가 아니라 ‘그에 대한 농민회측의 대응 태도를 통해 기존의 연대의 원칙이 지켜지기 힘들 것이라고 판단’한 점이었다는 것을 미루어 볼 때 ‘연대’에 대한 입장 차이는 의미를 갖는다. 문제 발생에 대한 해결 방식과 연대활동의 바탕에 대한 개별 반들의 ‘틀린’이 아닌 ‘다른’ 입장들 속에서 다음 농활은 어떤 모습으로 수렴될지 의문이다. 총학생회장 홍상욱씨(99, 경제학부)는 “농활에 가지 않는다는 단위가 늘어나더라도 일단 농활은 기존 틀을 유지할 것이다”고 말했으나, 지금과 같이 농활에 대해 학생들 간에 합의가 안된 상황에서 적지 않은 진통을 겪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와 같이 이번 철수 사태를 계기로 확산된 ‘연대’에 대한 다양한 정의내림속에, 농활에 대한 논의는 ‘명확한’ 해결점을 찾지 못한 채 흐지부지 일단락되고 있다. 이에는 철수 상황에 대한 사람들의 무조건적인 비방여론을 형성하는데 ‘한 몫’한 일부 언론들과 감정적인 리플로 비방을 심화시킨 일부 사람들에게 책임이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큰 책임은 사건 발생시 언론에 의해 담론이 형성된 후에라야 대응에 나선 학생회와 8월 중순이 넘었는데도 불구하고 ‘아직’ 내부의 충분한 논의가 진행되지 않았다며 입장표명을 유보한 반들, 그리고 철수 논의 때의 목소리에 비해 후에 아무런 행동을 보이지 않고 있는 반들에게 있다는 것을 간과할 수 없다. ‘피해자 중심주의’라는 당연한 원칙을 끌어다 덮기에는 무책임의 범주가 너무 크다. 안으로나 밖으로나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던 서울대 2004년도 여름농활. ‘비온 뒤에 땅이 굳을지 무너질지’에 대한 답은 앞으로의 각 단위들의 책임 있는 행동과 학우들의 고민 속에서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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