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활‘사건’ 이후에는 그다지 남은 것이 없다. 학생 사회의 특성 때문인지 인간의 원천적 성격 때문인지, 밀물처럼 터져 나오던 불만과 해명으로 점철되던 인터넷 공간에는 이제 침묵만이 남았다. 태풍 ‘메기’처럼 학생사회를 강타하고 갔던 농활 사건. 과연 학생들에게는 책임 있는 ‘피해 복구반’이 존재하는가? 뚜렷한 책임 단위는 과연 존재하는가? photo1이번 철수 사태를 두고 책임 있는 대응을 할 수 있는 단위는 각 과반 학생회와 단대, 총학생회를 주축으로 하는 ‘학생회라인’ 뿐이었다. 성폭력과 관련한 반성폭력 규약은 흔히 90년대 말에 생겨났지만 전혀 통일된 형태는 아니었다. 반성폭력 규약과 관련한 조치는 모두 각 학생회 단위들의 자치에 맡겨졌으며, 전체적 문제의식을 같이 하고 있기는 하여도 강제적인 조치는 취해지지 않았다. 통합된 집단행동을 이끌 수 있는 주체가 없다는 문제점은 이번 사건을 통해 직접적으로 드러났다. 농활은 각 학생회 단위들을 주축으로 이루어지는 만큼, 준비도 자치단위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며 반성폭력 주체들도 각각 학생회 소속으로 존재한다. 하지만 농활이 다가올수록 농활준비회의는 대부분 실무적인 부분에 치중할 수밖에 없고 실질적으로 가장 농민과 마찰이 많은 성폭력 규약에는 상대적으로 고민의 무게가 줄어들게 된다. 학내 여성주의 잡지, 쥬이쌍스의 필진 중 한 명인 야생싸가지(필명)씨는 “농활에서 성폭력 사건을 너무나 미숙하게 처리하는 해결방식이 문제”라고 지적하며, “이러한 해결방식을 위한 지속적인 준비작업이 필요하지만 의욕을 가지고 계속 활동을 할 사람도 기제도 부족하다”고 말했다. 학내 단위들의 상황 학내에 여성주의와 관련된 논의를 위해 만들어진 모임이 존재하긴 하지만 학내에서 일어난 성폭력 문제들과 관련하여 직접적인 책임을 지지는 않는 형태다. 관악 여성주의 모임(이하 관악여모)의 경우, 농활과 관련한 인터뷰를 거절하며 “아직 내부적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명확한 대표도 존재하지 않는 만큼 입장을 밝힐 수는 없다”고 말하며 8월 말에 있을 토론회를 통해 외부 입장을 듣는 동시에 내부 입장을 정리하겠다고 밝혔다. 각 단대에 있는 여성주의 단위들 역시 마찬가지다. 사회대 여성주의 연대(이하 사연) 역시 농활과 관련한 인터뷰를 거절하며, “사연 역시 대표자가 존재하지 않고, 사연 구성원들이 각각 농활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이 다르다”고 말했다. 인문대 여성주의 연대(이하 연대) 역시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다. 단지 여성주의에 대해 관심을 갖고 모인 이들에게 강제적 책임을 지게 만드는 것은 어불성설인 만큼, 책임을 추궁할 수 있는 문제는 당연히 아니다. 그렇다고 총학생회에게도 책임을 씌우기도 어려운 일. 직접적으로 농활을 가는 단위는 단대인 만큼 총학생회에서 직접적으로 관여할 수 있는 부분은 적다. 총학생회장 홍상욱(경제 99)씨는 “이번 농활 사태에서 농민과의 마찰도 문제였지만 학생들 간의 합의가 안 되었다는 것도 문제”라고 지적하며 “내년 농활 때는 전 관악인 자치규약을 준비하여 학생들 간의 합의를 이루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합의? 그러면 누가 만들어? 연세대, 동국대, 한양대, 건국대, 부산대 등의 학교의 경우 총여학생회가 여성주의 사업과 관련한 책임을 총괄한다. 한양대 총여학생회의 한 간부는 “나날이 양성 평등과 관련한 담론들이 확산되면서 대학 내에서도 이 담론을 정체시키지 않고 중심적으로 사람을 배치시키는 단위가 필요하다”며 총여학생회의 필요에 대해 설명했다. 한양대 총여학생회는 농활과 관련한 부분에 대해서는 “총여학생회는 반성폭력 규약의 초안을 만들어 단대에 제시함으로써 주체적으로 풀어나가려 한다”고 말하며 “성폭력 피해자의 일은 단대의 일이 아닌 만큼 일반 학생회로 소속될 문제가 아니라, 남성과 여성이라는 틀 속에서 비롯된 문제인 만큼 총여학생회가 해결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photo2고려대학교의 경우는 총여학생회는 이미 10여년 전에 사라졌으며, 여학생 위원회가 자치단위나 학생회와 독립된 모습으로서 관악여모와 비슷한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 고려대 여학생 위원회(이하 여위)의 정이은하씨는 “총여학생회라면 성폭력 사건에 좀더 강제적이고 책임 있는 대응을 할 수 있겠지만, 여위의 입장에서는 자보 작업이나 선전전 외에 실질적인 행동이 어렵다”고 말한다. 또한 농활과 관련하여 역시 고대에도 전체적인 반성폭력 규약은 존재하지 않는다며, “반성폭력 규약을 만들기는 하여도 도와주는 차원에 그칠 뿐”이라고 답했다. 총여학생회의 부재는 어쩔 수 없는 선택 하지만 서울대 총여학생회가 이러한 장점에도 불구하고 괜히 없어졌던 것은 아닐 터. 서울대 총여학생회는 1993년에 들어오면서 회장 후보가 나오지 않자, 학생회라는 틀을 버리고 관악여모라는 방식으로 틀을 전환하여 여성 운동을 지속하고 있다. 여성 문제에 관해 대표성을 획득할 수 있다는 이점을 버리고 일종의 연대체의 개념으로 틀을 바꾼 것은 단순히 운동 하는 사람들의 문제가 아니다. 쥬이쌍스의 야생싸가지씨는 현재 여성 운동이 많이 없어지는 실정이라고 말하며, “할 사람이 줄어드는 것이 주원인이기는 하지만 이보다 선행되는 것은 전반적인 운동의 침체다”라고 대답했다. 관악여모와 비슷한 형태를 띠고 있던 고려대학교의 여성위원회 역시, “총여학생회가 고려대학교에서 없어진 것은 역량이 안 되기 때문이다”라고 지적하며, “총여학생회를 구성하기 위해서는 인력과 같은 많은 인프라가 필요하지만, 현재는 재생산이 어려운 실정이다”고 말했다. 총여학생회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아서 없앤 것이 아닌, 활동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입장이다. 현재와 같은 추세에 비해, 올해 총여학생회가 다시 구성된 한양대학교의 경우는 상당히 예외적이다. 한양대 총여학생회의 한 간부는 “없어졌던 총여학생회를 이렇게 다시 구성하게 된 건, 여성의 복지와 권리를 위한 책임 주체가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을 공유했기 때문”이라며 총여학생회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피해 복구는 피해가 난 시점부터 photo3태풍으로 인해 집 앞 다리가 쓸려갔다면, 밭의 비닐하우스가 벗겨졌다면 이 때 필요한 것은 ‘나중에 고치자’는 안일한 자세가 아닌 직접적인 ‘피해 복구반’의 동원이다. 그렇지 않다면 다리 건너 사는 사람들의 이동권도 보장될 수 없을 것이며, 비닐하우스 없이 말라빠져가는 농작물들을 볼 수밖에 없게 된다. 농활 역시 마찬가지다. 몇몇 언론의 왜곡으로부터 상처 받은 단위들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의 발언권을 숨기는 것이 아니라 대안을 모색하는 새로운 방식을 토론하는 것이다. 농활 성폭력 사건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닌 만큼, 현재 관련 단위들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한 입장 선언(입장 선언조차도 보류하긴 하지만)이 아닌, 구체적인 피해 복구반을 구성하여 추후 대책을 구체적으로 논의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시점 역시 ‘나중’이 아닌 ‘지금’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