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입구에는 “과거를 기억하지 않는 자는 그 과거를 다시 살게 된다”는 말이 적혀 있다. 이번 학기 필자는 이 코너를 통해 상흔으로 얼룩진 한국 현대사를 헤집어 볼 계획이다. 과거를 기억해야만 미래를 개척할 수 있다고 믿는다. 지난 호 제주의 슬픈 역사를 다룬 데 이어 이번에는 광주의 한을 더듬어 보았다. 8,90년대 대학생들에게 원죄의식으로 작용한 광주 5.18. 그 역사의 현장에 순례자로 섰다. 1. 제주 4.3 사건 2. 광주 5.18 3. 여순사건 |
뜻하지 않게 자치언론사기자간의 회동이 되었던 지난밤의 진솔함, 그리고 그 진솔함의 대가로 숙취를 안은 채 광주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지난 5월 18일 폭우 속에 밴드공연을 마치고 서둘러 밤기차를 타던 순간이 겹쳐진다. 그때의 ‘준비되지 않은 순례’에 대한 죄의식이 지금 나를 다시금 광주로 이끄는 것이리라. 여행일정을 짜는 작업이 제일 설렌다. 특히 역사가 있는 곳의 경우에 그것은 더욱 큰 떨림으로 다가온다. 천안 – 익산 – 정읍 – 광주. 그곳에 가까워질수록 점점 더 구수해지는 남도사투리를 음악 삼아 주름진 뇌 한구석에 처박힌 흑백필름을 회상하며 경로를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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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년 5월16일 도청 광장의 민족민주화성회 집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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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청앞광장- 5.18의 시작과 끝을 지켜본 공간 |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에서의 총성을 시작으로 국내정세는 안개에 휩싸였다. 제적생들의 복학과 총학생회의 부활, 시민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이 표면화되던 서울의 봄은 12.12쿠데타로 실권을 장악한 전두환의 ‘5.17비상계엄 전국 확대’로 인해 다시 얼어붙고 말았다. 신군부는 17일 오후 이화여대에서 열리던 전국학생회장단모임을 급습하여 수십 명의 학생대표들을 연행하고, 자정을 전후하여 전국적으로 김대중을 비롯한 민주인사들에 대한 예비검속을 단행했다. 같은 시각 전국 각 도시와 대학교는 공수부대들의 무자비한 돌격에 하나하나 점령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18일, 전남대에서는 휴교령이 내리면 다음날 오전 10시에 교문 앞에 모이자’는 약속을 기억한 학생들과 교문을 지키던 계엄군의 충돌로 비극이 시작됐다.부족한 잠과 숙취를 이기지 못하고 깜박 잠들었더니 어느새 광주다. 대충 일정을 그렸다지만 막상 도착하고 나니 어디부터 가야할지 막막하다. 배도 슬슬 고파오고. 광주역 앞 Information Center에서 사적지 안내와 상세한 광주지도 입수! 일단 첫 번째 충돌이 있었던 전남대다. 20분 정도 걸으니 전남대 정문이 보인다. 지난 5월 답사 때 시간에 쫓겨 전남대 5.18기념관을 눈으로만 둘러본 것이 마음에 걸린다. 비록 일요일이라 불이 꺼졌지만 기념관의 유리문은 나를 반겼다. 어둠 속에서 핸드폰에 의지하던 그때, 식사를 마치고 들어오는 누군가의 인기척, 캬~ 하늘이 날 돕는구나. 5.18연구소 연구원 정유하 씨의 도움으로 기념관 내 모든 조명과 전시물들이 나의 온몸과 감정을 훑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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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범벅이 된 금남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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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남로 한가운데에서, 저기 멀리 도청이 보인다. |
‘돌격 앞으로’ 와 함께 쏟아진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곤봉세례에 피투성이가 된 학생들은 광주역 앞에서 재집결하고 ‘전두환은 물러가라’, ‘비상계엄 해제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금남로로 향했다. 초기 소수였던 시위대는 전투경찰의 진압에도 저항하지 못하고 쫓겨 다니며 산발적으로 시위를 진행했다. 오후 4시부터 금남로에 진출한 7공수여단은 시위 참가여부에 상관없이 거리에 보이는 시민들을 무차별적으로 구타했다. 전날의 잔인한 살상극에 분노한 시민들은 19일 도청 앞 광장에 자연스레 모여들었다. 그러나 10시 40분경 최루탄 공격에 투석전으로 저항하던 시민들은 광주로 증파된 11공수여단의 군화에 또다시 짓밟히고 만다. 그들은 항의하던 할아버지와 아주머니, 도망가던 여학생 모두 가리지 않고 폭력을 가했으며, 시위현장 주변의 건물, 집 등에 침입하여 젊은 사람이 발견되면 무작정 두들겨 팬 뒤 팬티만 입힌 채 연행해갔다. 광주시내 모든 병원들이 피투성이 환자들로 병상이 부족해지면서 광주 시민들의 분노는 서서히 커져갔다.5.18기념재단에서 제공해준 사진집과 수많은 책들로 무거워진 어깨를 부축하며 사회과학대 학장실로 향했다. 광주항쟁을 십여 년 이상 연구해온 나간채 교수(사회학)는 5.18의 배경과 의의에 대해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주었다. 5.18에 대한 다양한 관점과 성과를 지적해주던 그의 따뜻한 격려를 뒤로한 채 광주의 밤거리로 향했다. 25년전 이 시간 점령당했을 당시를 상상하며. 여비를 아끼려는 의도였던 빛고을 보석사우나는 여기가 광주라는 것을 실감하게 해주는 대신에 감기를 선물해줬다. 다음날 아침 뜨끈한 국밥에 간밤의 허기를 달래고 전남대 학생들과 시민들의 행적을 뒤쫓아 금남로로 향했다. 제봉로에서 예전 시외버스터미널의 위치를 묻자 당시 시위에 참여하셨다던 아저씨 아주머니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총이 나오고부턴 무서워서 나오지 못하셨다던 나종암(60)씨는 헌혈하러 장사진을 이룬 시민들을 이야기하며 당시를 회상했다. 40대 이상의 광주시민이라면 다들 잘 알거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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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타던구MBC – 정부 입맛대로만 보도하던 어용기관MBC, KBS, 세무서 등이 시민에 의해 불태워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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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 MBC사옥 |
5월 20일, 수만 명의 인파가 금남로에 모여들었다. 공수부대의 만행을 지켜본 기사들의 차량시위로 공방전은 가속화되었고 정부의 발표만 일방적으로 보도하던 MBC와 KBS방송국이 불타기 시작했다. 21일 오전에는 전날 새벽에 있던 총격에 항의하는 10만 인파가 도청 앞에 모여들었다. 각 동네 아주머니들은 솥을 거리에 걸고 시위대의 식사를 준비했으며, 시장 주변에서는 음식과 부식들이 시위대에게 전달되었다. 21일 오후 1시 정각 금남로는 피바다가 되었다. 광주시민들은 군인들이 집단발포를 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곳에서 최소 54명이 숨지고 500명이 총상을 입었지만 지금도 발포를 명령한 자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군인의 총격에 대항해 시민들도 각 지역 지서와 예비군 무기고에서 구식 무기를 획득했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시민군’으로 불렸고, 도청으로 끊임없이 압박해 들어간 결과 오후 5시 30분 계엄군은 총퇴각을 결정한다. 이때부터의 광주를 ‘시민공동체, 해방광주’라 부른다.광주에서 가장 넓은 거리였던 금남로, 수많은 사람들의 피가 스며있을 이 아스팔트길이 왜 이리 좁아보일까. 시민군의 거점 중 하나였던 YWCA 건물, 가톨릭센터, 도청 앞 광장, 구 MBC 터를 하나하나 더듬어가며 25년 전의 광주를 회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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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천여 명이 이 좁은 영창에서 갖은 고문과 구타를 당했다. |
피투성이가 된 광주시민들은 팬티만 남기고 발가벗겨진 채 연행되어 영창에 갇혔다. 당시의 영창과 법정은 자유공원으로 조성되어 시민들의 휴식터가 되고 있다. 그곳으로부터 2km 정도 떨어진 5.18기념공원 역시 엄숙한 추모공간과 시민들의 휴식공간이 병존하고 있는 구조였다. 이곳으로 소풍을 온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5.18의 의미에 대해 알고 이를 계승해나갈 수 있겠지. 더 어두워지기 전에 5.18국립묘지와 망월동 구묘역에 가야했다. 희생자들이 항쟁 직후 쓰레기차에 실려 마구잡이로 구묘역에 묻힐 때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가족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솔직히 실감이 가지 않았다. 억지로 눈물을 내보려했지만 되지 않았다. 한 열사의 묘비를 살펴보기 전에는.21일 오후, 시민들은 도청을 비롯한 전 시내를 접수했다. 곧바로 시민과 학생 수습위원회가 결성되어 사태해결을 논의했으며, 도시청소, 유류증 발급 등 당면한 치안문제를 처리해갔다. 의사와 간호사들은 헌신적으로 환자를 치료했으며 각지의 혈액원엔 끊임없는 헌혈로 피가 남아돌 지경이었다. 시민군의 치안아래 범죄율은 오히려 더 줄어들었고, 시장 주변에서는 앞 다투어 밥을 지어 나누는 등 시민들은 성숙한 모습을 보였다. 시민군지도부는 무기를 회수하고 시민군을 재편성했으며, 수습위에서는 무기반납을 조건으로 타협을 하자는 의견이 나왔으나 거부되었다. 22일부터 26일까지 잠시 해방을 누린 광주는 27일 새벽 탱크를 앞세운 계엄군의 공격에 무너지고 만다. 광주 시내 전 지역을 돌며 목이 터져라 가두방송을 한 가녀린 시민군의 목소리는 오랫동안 광주시민의 기억 속에 남아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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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8 기념공원- 시민들의 휴식공간이 된 기념공원.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투영되었다고 할 수 있다. |
비록 그때의 무력항쟁은 실패로 끝났지만 오늘날 5.18은 승리의 역사로 기억되고 있다. 수많은 열사들의 죽음은 살아남은 자들의 마음의 빚으로 남아 5.18 이후 끊임없이 일어난 민주화 운동에 동력을 제공했으며, 이는 결국 87년 6월 항쟁을 이끌어내어 한국의 민주화에 이바지했다. 95년엔 전두환, 노태우를 비롯한 5공 시절 군부의 핵심인물들이 재판정에 서서 역사의 심판을 받았다. 25년이 지난 지금 5.18은 승리의 역사로 기록되지만 과연 누구에 대한 승리인지 되물을 필요가 있다. 학살책임자에 대한 승리인가. 군부독재에 대한 승리인가. 우리가 아픈 역사를 굳이 끄집어내어 기억해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기억하지 않으면 다시 겪게 될 역사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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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정당 제4차 전당대회. 전두환은 노태우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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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년 5월16일 도청 광장의 민족민주화성회 집회 |
0“과거의 고통을 잊는 것은 고통을 야기한 세력과 싸우지 않고 그러한 세력을 용서하는 것이다. 시간 안에서 치유되는 상처는 독을 품고 있는 상처다. 시간에 대한 항복에 대항해서 기억을 해방의 매개물로 복권하는 것은 사상에 맡겨진 가장 고귀한 과업 가운데 하나다” – Herbert Marcu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