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는 국민이 담배를 피워서 건강을 상하게 하는 것을 인정하고 방치해야 하는가?’ , ‘유치원 교사는 꼬마가 난로에 손을 댈 때, 스스로 뜨겁다는 것을 경험하도록 놓아둬야 하나?’ 소위 ‘온정적 간섭주의(paternalism)’는 교육심리학이나 경제학에서 문제가 된다. 시장의 자율성을 중시하는 시카고 학파에서는 경제 주체들의 합리성을 높게 평가하여, 그들의 선택이 효용 함수에 따른 합리적인 것이라 보기 때문에 이에 대한 개입을 자제한다. 따라서 정부가 국민들의 건강을 생각해서 담배에 많은 세금을 물리건, 노후 대책을 세우지 않는 국민을 염려하여 국민 연금에 의무적으로 가입시키는 것을 반대한다. 교육심리학에서도 자율적 깨달음을 중시할 때, 어느 정도의 위험은 감수할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마냥 합리적인가? ‘진정한 합리성은 다른 이의 간섭을 받아들여 이용하는 것까지 포함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도 언뜻 떠오른다. 그리고 ‘온정적’ 간섭이라 하여 괜히 남의 일에 끼여드는 듯한 인상을 주기도 하는데, 자기 주변의 일도 넓게 보면 나에게 영향을 끼치는 일이므로 나와 이해관계가 있는 것이다. 자기 일에 대해 관여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간섭이 물론 간섭 받는 자에게는 자유에 대한 침해로 다가갈 수 있다. 이 땜누에 온정적 간섭주의를 제창하는 사람들도 그 간섭에 대한 제한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간섭을 하는 이유가 충분히 합리적이어야 하고, 간섭 받는 자가 자율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가능성이 낮아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언론이나 재벌에 대한 간섭이 정당화될 수 있을리라 생각한다. 오랜 기간 동안 그들은 자율적으로 변화할 수 있다고 외쳤지만, 실상 달라진 것은 별로 없지 않았던가? 언론, 재벌 개혁의 당위성을 공감하고 있는 이상, 마냥 그들이 스스로 변화할 것을 기다리기엔 시간이 부족하다. 이는 학내 문제도 마찬가지다. 특히 대학이라는 공동체 안에서는 서로에 대한 비강제적 간섭이 더욱 너그러이 받아져야 하지 않을까? 정부와 같이 막강한 구너력일 경우 자유의 침해를 방지하기 위해서 이러한 제한은 꼭 필요하겠지만, 대학이라는 공동체 안에서 서로에 대한 비강제적 간섭이 더욱 너그러이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사안의 문제제기에 대해 비판받는 쪽은 ‘우리 입장을 너희가 아느냐?’ 가 대체적인 반응이 아니었다 싶다. ‘내 일에 네가 웬 참견이냐?’, ‘우리 과 일을 너희가 왜?’ 라는 반응보다는, 적절한 문제제기에 대해서 열린 자세가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