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4학년이 되어 버린 2003년 3월. 캠퍼스에서 만나는 새내기들을 보면 부러운 마음이 든다. 분명 나도 새내기 시절이 있었음에도, 지금에 와서 부러워하는 건 아쉬움이 있기 때문이리라. 그런 아쉬움을 품은 채 서울대저널 개강 호 앞에 섰다. 처음 대학에 들어와서 그야말로 난생 처음 겪어 보는 방임의 시간. 지방에서 서울로 온 문화적 충격과 함께 대학 생활의 전면에 나섰다. 주어진 어떠한 가이드라인도 없었기에 지금 생각하면 무모하다 싶을 정도로 내 마음대로 일을 벌여놓았다. 성취한 것도 있지만, 이루지 못한 것도 많았다. 되돌아보면 결국 나의 대학생활은 시행착오로 요약될 것이다. 불과 몇 년밖에 흐르지 않았지만, 지금 생각하면 낯이 뜨거울 정도로 부끄러운 일도 있고, 입가에 아쉬운 미소를 띠게 하는 일도 떠오른다. 서투른 점이 참으로 많았지만, 그것 없이 지금의 내가 여기 있을까? 시작을 두려워했다면 아무 것도 이루지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위안 삼는다. 대학 생활을 앞둔 새내기에게 대학 생활을 한 장의 백지 수표라고 말하고 싶다. 확정된 내용이 없는, 내가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것이 백지 수표다. 이는 백지 수표를 뜻하는 불어 carte blanche가 ‘전권(全權)을 준다’는 말로 쓰이는 것처럼. 한자로도 白地는 정해진 것이 없는 것을 뜻한다(白紙가 아니다). 우리 앞에는 백지 수표가 놓여 있다. 정해진 것은 없다. 채워 넣는대로 효력이 생긴다. 대신 모든 책임은 발행자에게 있을 뿐이다. 액면으로 얼마를 써 넣는가는 당신의 선택에 달려 있다. 그 수표의 가치를 작게 잡으면 부담은 적겠지만, 얻는 것이 없다. 수표 액면을 지금 가진 것보다 많이 써도 좋다. 다만, 결제일까지 그만큼 더 노력하면 된다. 부도 수표가 되지 않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