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법 상 공식적인 대통령선거 일정은 시작되지 않았다. 그러나 사실상의 대선은 이미 오래 전에 시작되었고 거의 종반에 접어들었다. 이번 대선은 10년간 지속된 양김정권의 시대를 마감하는 동시에 3김씨가 정치적으로 퇴장하는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하는 선거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이 변화는 선거결과와는 무관하게 나타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번 대선은 누가 대통령이 되느냐 하는 문제 못지 않게 지루한 3김정치가 막을 내린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선거가 된다는 평가도 있다. 그러나 대선의 의미를 그렇게 폄하할 필요는 없다. 실제로 이번 대선은 우리의 민주주의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기를 형성할 것이며, 이를 통해서 정치발전을 가로막고 있는 전근대적 정치구조를 뛰어넘어 새로운 정치로 나아가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다만, 우려할만한 상황은 아직도 공정선거의 틀이 취약한 상황이어서 국민의사를 정당하게 수렴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 때문에 ‘개혁의 촉진자’이자 ‘중립적 심판자’로서 시민운동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2000년 총선시민연대에 이어 지난 9월에 대선유권자연대가 발족한 것도 이런 문제의식 때문이다. ‘개혁의 촉진자’이자 ‘중립적 심판자’로서 시민운동의 역할이 매우 중요 대선국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대선을 둘러싼 정치·사회적 상황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크게 다섯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자. 첫째, 이번 대선은 역사적 진보와 퇴보의 물결이 격렬하게 대립하면서 공존하는 과도기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민주화의 결과 탈군사화가 진전되었지만 군사독재의 잔재는 여전히 엄존하고 있다. 지난 10년간 민주화와 개혁에서 상당한 성과가 있었지만 더 많은 개혁이 지연되었으며, 개혁을 부정하는 수구세력 앞에서 개혁이 반복적으로 좌절되고 있다. 그 결과 민주세력과 반민주세력의 팽팽한 교착상태 하에서 민주주의와 개혁과 통일이 ‘냉전-수구-반통일’에 의해 위협받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 둘째, 지난 10년간의 실험의 결과 양김정권의 공과에 대한 평가가 역전되고 후퇴하는 상황에서 이번 대선이 시작되었다. 양김정권의 말기에 공통적으로 나타난 권력형 부패사건은 양김정권의 한계를 드러낸 사건으로서, 민주화와 민주세력의 역사적 위상을 크게 실추시켰다. 그 결과 독재세력이 스스로를 산업화 세력이라고 부르면서 양김씨 등 민주화 세력과 산업화 세력의 공존을 주장하던 90년대식의 공존논리는 사라지고 지금은 수구세력에 의해 민주화 세력이 “나라를 망친 세력”으로 매도되는 상황으로까지 추락했다. 셋째, 지난 10년간의 민주화의 실험이 우리에게 21세기에 대한 긍정적인 전망을 제공하지 못하는 전망 부재의 상황을 조성했으며, 이러한 상황에서 선거가 시작되었다. 민주진영이나 진보진영은 80-90년대의 이론적·실천적 경험을 뛰어넘어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의 전망을 제시하는 ‘새로운 민주주의'(post-democracy)에 대한 전망을 제시하지 못했다. ‘새로운 민주주의’를 모색하고 주도할 핵심적인 정치주체의 형성에서도 실패했다. 보수정치권의 개혁정당, 진보정당, 시민운동, 노동운동, 학생운동 어디에서도 신뢰할만한 정치주체를 발견하기 어렵다. 결국 미래를 책임질 ‘새로운 세대'(New Generation)를 형성하지 못했다. 넷째, ‘권력회복’을 위한 구세력의 단결은 차질없이 진행되는 반면 민주개혁세력은 분화와 분산을 거듭하고 있다. 구세력은 지난 10년간의 민주적 실험기를 통해 드러난 양김정권의 한계를 활용하여 권력 재탈환을 시도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구세력의 핵심부를 구성했던 군부의 탈정치화로 인해 군부를 제외한 총체적 수구보수연합이 가시화되고 있는 바 한나라당을 중심으로 재계와 수구언론, 비민주적인 사학과 특권적인 이익집단들이 핵심적인 참가자들이다. 부시정권의 출범이나 한반도의 긴장고조 등 주변정세도 수구보수세력에게 유리하게 작용하고 있다. 이런 상황 때문에 대선을 앞둔 대한민국의 21세기는 정치적 복고풍의 흐름을 강하게 풍기고 있다. 다섯째, 지역주의, 정계개편, 세대갈등이 대선의 결정요인으로 부각되는 상황이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대립구도를 중심으로 구축되어 있는 현재의 정당체계는 90년 3당합당체제 하에서 만들어진 지역갈등구조를 반영하는 것이다. 따라서 잠재적이든 현재적이든 지역대결구도는 가장 강력한 결정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다. 이 지역갈등구조를 타파한다는 취지에서 민주당이 정계개편을 추진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최근에는 지역주의와는 무관하게 선거연합이나 후보단일화 등 선거용 정계개편이 논의되고 있지만 실현가능성이 높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불안정한 정치구조를 감안할 때 어떤 형태로 실현되든 정계개편은 강력한 변수가 될 수 있다. 세대갈등 역시 매우 뚜렷한 변수로 떠오르고 있다. 잠재적이든 현재적이든 지역대결구도는 가장 강력한 결정요인으로 작용할 것 이러한 상황에서 민주당내 개혁세력을 대표하는 노무현과 한나라당내 보수세력을 대표하는 이회창을 중심으로 한 대립구도가 형성되었다가 최근 무소속의 정몽준이 참여하면서 3파전 구도로 변화되고 있는 상황이다. 여기에 정체성이 불투명한 이한동 후보를 제외하고 진보정당의 권영길 후보를 포함하면 이회창, 노무현, 정몽준의 3강 후보에 민주노동당의 권영길 후보가 1약 후보로 개입된 3강 1약의 대결구도가 그려진다. 그러나 대립구도의 성격상 이회창, 노무현, 정몽준 모두가 대응한 후보군을 형성할 가능성은 낮다. 따라서 이회창, 노무현, 정몽준 세 후보중 1명의 지지율이 낮아지면서 ‘2강-1중-1약’의 최종적인 4파전 대립구도가 형성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2강 대열에서 낙오될 후보를 전망하는 것은 쉽지 않다. 다만 이 대립구도에서 정몽준은 계급 계층적으로는 이회창의 지지기반을 잠식하지만 정서적으로는 변화와 개혁을 바라는 노무현의 지지기반을 잠식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 대립구도에는 이념·정책의 측면에서 수구보수와 개혁의 대립구도와 더불어 전근대적인 지역주의 대립구도가 중첩되어 있으며, 이것이 세대간 대결로 연결되는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대선을 2개월 이상 남겨둔 시점에서 여론지지도에서 앞선 이회창은 이념적으로는 수구보수, 지역적으로는 영남중심, 세대별로는 50대 이상의 중장년 세대를 아우르는 후보로 상징화되고 있다. 반면 노무현은 뚜렷하게 개혁적인 정책노선을 표방하고 있으며, 지역적으로는 호남과 영남의 통합을 바탕으로 한 초지역주의적 득표를 추구하고 있으며, 세대별로는 20-30대 젊은 세대를 아우르는 후보로 상징화되고 있다. 정몽준의 정치적 위치는 아직은 매우 모호한 상태라 할 수 있다. 수구보수와 개혁의 대립구도와 더불어 전근대적인 지역주의 대립구도가 중첩 이 대립구도에 영향을 미치는 변수는 크게 세 가지라 할 수 있다. 하나는, 지역대결구도에서 이회창의 호남 포위론과 노무현의 영호남 통합론의 향방에 따라 선거결과가 크게 달라질 것이라는 점이다. 둘째는, 이회창을 거부하는 20-30대나 노무현을 거부하는 50-60대의 정서를 감안할 때 40대 부동층의 선택이 선거결과를 좌우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전체 유권자의 1/5을 점유하고 있는 40대의 중요성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정확하게 진실을 표현한다면 40대는 20-30대의 선택에 의해 영향받는 종속변수일 뿐이다. 20-30대 젊은 유권자들이 대거 선거에 참여하고 개혁적인 선택을 할 경우 40대는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20-30대가 선거를 기피할 경우 40대는 보수적인 선택으로 기울어지는 기회주의적인 속성을 드러낼 것으로 전망된다. 결국 20-30대의 선택이 선거결과를 좌우하게 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선거지형을 바꿔버리는 후보단일화 등 정계개편의 가능성 역시 중요하다. 이 세 가지를 구조적 변수라 한다면 선거과정에서 구체적으로 작용할 행위변수의 역할도 매우 중요하다. 이것 역시 세 가지 영역에서 검토할 수 있다. 첫째 변수는, 이회창 후보가 연루된 아들의 병역비리 등 부패사건의 가연성이다. 지루하고 소모적인 논란을 통해서 상당 부분 희석되고 있지만 병역비리 문제는 여전히 폭발력을 가지고 있다. 둘째 변수는, 수구세력의 결집과는 반대로 개혁세력이 분산되어 있는 상황에서 이들 개혁세력의 결집을 촉진하는 흐름의 등장 가능성이다. 개혁세력은 현재 진보정당, 민주당, 시민운동의 세 핵을 중심으로 분산되어 있는 상태이며, 따라서 이번 대선에서 각각 별개의 가치를 추구하고 있다. 이들을 하나의 가치로 묶어내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지만, 결집할 수 있다면 상당한 힘을 발휘할 수도 있다. 셋째 변수는, 젊은 층 참여변수로서 이번 대선의 가장 강력한 뇌관으로 남아 있다. 개혁적이지만 정치에 무관심하고 냉소적인 대학생 등 20대의 젊은 유권자들을 선거에 참여시킬 수 있게 된다면 선거국면이 급변하게 될 것이다. 젊은 층 참여변수가 이번 대선의 가장 강력한 뇌관 이런 점에서 이번 대선에서 참여 문제가 새로운 화두로 부각되고 있다. 그간 젊은 유권자들의 관심은 이념과 노선, 민주주의와 개혁에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조건이 제도정치권에서 충족되지 못하고 있다고 판단되는 상황에서 젊은이들이 제도정치에서 등을 돌리고 있는 것이 최근의 현실이다. 이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이지만 최선의 선택은 아니다. 혁명을 꿈꾸지 않는 젊은이가 제도정치권의 개혁까지 부정한다면 아무데도 갈 곳이 없다. 그것은 젊은 지성인의 역사인식의 오해이거나 자기기만일 가능성이 높다. 큰 변화는 작은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배태된다. 지금은 참여를 통해서 민주주의와 개혁의 완성을 추구할 때이다. 이번 대선이 젊은 학생들에게 최선의 공간은 아니겠지만, 이 제한된 공간 안에서도 얼마든지 활동의 여지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