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복재(40)씨의 아버지는 경북 영일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먹고살기조차 힘들었던 시대상황은 그의 가족을 만주로 내몰았고, 그의 가족이 만주에서 고생 끝에 정착하게 된 곳은 중국 길림이었다. 때는 그가 10살이었던 1930년대 무렵, 그 당시 그의 가족처럼 일제치하를 벗어나 중국으로 흘러 들어간 조선족은 무려 200만이 훨씬 넘었다. 그리고 서재복씨가 살던 길림성의 고향도 그렇게 이주했던 조선족들이 정착해 가꾼 조선족 자치구였다. 서복재씨는 길림에서 중개업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런 그가 한국에 오게 된 것은 당시 한국의 고향에 다녀오신 부모님의 권유가 크게 작용하였다. 한국에서 좋은 이미지를 얻고 돌아오신 부모님이 그에게 한국행을 적극 추천한 것이다. 더구나 당시 그곳에는 한·중 수교 이후 돈을 벌기 위해 한국으로 떠나는 조선족들이 많이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그는 1994년 처와 아들을 남겨두고 한국행을 택했다. 장밋빛 희망을 품고… 막연한 기대를 갖고 산업연수생 자격으로 서울에 도착한 그는 한국의 발전상을 보고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중국에서는 찾기 힘든 병원이 서울의 밤하늘에서는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그것이 오해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중국에서는 병원 표시를 나타내는 십자가가 이곳에서는 교회 표시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하나의 해프님이지만 그만큼 그는 한국에 대해 무지했고 순진했었다. 그러나 그의 한국에 대한 믿음이 깨지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가 산업연수생으로 취직한 첫 직장은 ‘대륭전선’이라는 조그만 중소기업이었다. 이때 그가 그곳에서 한 달 간 일하고 받기로 약속한 돈은 고작 21만 3천 원. 최저임금에도 한참 못 미치는 금액이므로 그는 주간 10시간, dirks 14시간의 교대 근무를 해가며 일을 했고 첫 달에 손에 쥔 월급은 60만원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서 계속해서 일을 해나가기가 힘들었다. 그것은 월급이 적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정작 그를 힘들게 한 것은 바로 재중동포에 대한 한국인들의 인간적인 차별이었다. 욕설은 예사였으며, 한 예로 한 달에 한 번 있는 회사의 전체 회식 자리엔 재중 동포인 이들 둘만 제외시킨채 이우어졌었다. 그러나 그에게 또 다른 시련이 닥쳐왔다. 취직을 한지 한달 반만에 산업 재해를 당하게 된 것이다. 작업 기계에 몸이 끌려 들어가 머리에 큰 상처가 나고 갈비뼈가 부러지는 등 큰 부상을 입게 되었다. 병원에 입원한 후 뇌수술을 받았으나, 이번엔 입원비 문제로 인해 한달 후에 퇴원을 당해야만 했다. 병원에서 회사측에 보상을 요구하였으나 회사는 노동부에 책임을 돌렸고, 노동부에서는 그가 산업 연수생이기 때문에 산재처리가 불가능하다며 보상을 꺼린 것이다. 3년이 지난 97년 국정감사에서 이 문제를 놓고 증언을 하게 됨에 따라, 결국 정부측의 보상을 얻어내긴 했지만 그는 이 과정에서 지울 수 없는 큰 상처를 얻게 되었다. 그는 뇌수술을 받고 퇴원한 후 5개월이 지나 또 한차례의 뇌수술을 받아야만 했다. 이러한 육체적인 상처는 그의 노동력을 상실하게 만들었고, 결국 그는 한국에 들어와 처음 한달 반 동안의 경험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노동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지금은 다른 중국 동포들의 도움을 얻어가며 함께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 지금 한국 땅에는 서복재씨와 같이 돈을 벌기 위해 들어온 재중 동포가 약 10만 명에 이른다. 이들은 그와 같이 산업 연수생의 자격으로 왔거나, 아니면 친척방문 혹은 관광의 명목으로 국내에 들어와 돈을 벌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여권 기한은 만 2년이기 때문에 2년이 지나면 이들도 동남아 노동자들처럼 추방되어저야 할 불법 체류자로 전락하게 된다. 그가 알고 있는 한 재중동포는 작업 도중 손가락을 절단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경찰서에 고발된 그는 불법체류자란 이유로 인해 손에 수갑을 채운 채 치료받기를 강요받았다고 한다. 위의 같은 일들이 빈번해지자 한국에 있는 재중동포들 뿐만 아니라 중국에 있는 조선족들사이에서도 한국에 대한 인식은 심각할 정도로 나빠진 상태라고 한다. 예전에 중국 길림에서는 조선족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이 발생했는데 내용은 이렇다. 당시만 해도 조선족 사회에서의 한국에 대한 인식은 매우 좋아서 한국인이 오면 잔치를 열 정도였다고 한다. 그 지역에 홀로 와서 사업을 하다가 병이 나자 그곳의 조선족 분이 1만 5천원 정도(우리 돈으로 300만원 가량)를 들여 그를 치료해 주었다고 한다. 그는 치료가 끝나자 감사해하며 은혜를 갚겠다고 약속한 후 한국으로 돌아갔고, 얼마후에 그는 그곳에 다시 돌아왔다. 그는 감사의 표시로 그곳 사람 2-30명을 한국 땅에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고 약속고서는, 소개비로 500여 만원씩을 받아 챙기고는 사라졌다고 한다. 그 사건으로 한국에 대한 인식이 급격하게 나빠졌음은 말할 나위 없다. 서복재씨는 지금 정부에 대해 소송을 준비하고 있다. 자신과 같은 선례가 있긴 하지만 쉽지는 않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우선 변호사를 확실하게 구하는 것부터 쉽지 않은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는 만약 소송에서 승소하게 되면 한국을 미련없이 버리고 다시 중국으로 되돌아갈 예정이다. 지난 5년 동안 한국과 한국인에게 너무 많이 실망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