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9일 6시10분 속초행 버스를 기다리며.. 제주도와 남한 주변 도서(島嶼)밖에 가본 적이 없으면서, 해외에 가보았다고 큰소리치며 다니던 기자로서는 북한의 금강산을 간다는 것만으로도 많은 흥분이 되었다. 물론 우리 동포가 사는 곳으로 외국이라는 느낌이 들지는 않지만, 몇 안 남은 사회주의 국가 철저히 통제되어온 국가에 간다는 것은 분명히 새로운 느낌이었다. 12시 45분 2001호 객실 안 우여곡절 끝에 겨우겨우 어렵게 수속을 마치고 설봉호에 올랐다. 혼자 가는 것이어서 방을 다른 사람과 같이 써야 한다. 한참을 기다렸더니 통일부 통일교육원에서 행정사무관으로 계시는 분이 방을 같이 쓰게 되었다. 농공학과 71학번 선배이시고 ‘김영도’씨였다. 이번 취재에 많은 도움이 되어 주실 것 같아서 출발이 좋다는 생각을 했다. 아침부터 정신없는 출발이었는데, 배가 유유히 떠나면서 이북으로의 뱃길이 실감나기 시작했다. 1시 선내에서 ‘방북 관광 안내 교육’이 실시되었다. 관광안내보다는 오히려 ‘금강산관광’ 선전 같다라는 느낌이 드는 비디오를 보면서 진행되었다. 고배율 사진기, 일정배율이상의 망원경들 규제품목과 라디오, 북에 대한 언급이 있는 책자, 핸드폰, 지도 등의 금지품목이 설명되었다. 또한 도착할 장전항이 군사항이라서 사진촬영이 금지된다는 것, 가서 만나게 될 관리원들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말 것 등의 여러 가지 주의사항을 들었다. 2시 다시 객실에서 통일부 공무원인 룸메이트에게 어렵게 질문을 시작했다. 정말 관광만 하다 갈 수는 없으므로… 기자-금강산 관광이 통일에 도움이 되는 것 같나요? 룸메이트-글쎄요. 현대 쪽에서는 하나의 사업이죠. 지금은 사람 한 명 올 때마다 적자라고 하지만, 육로관광(도로가 연결되면 속초에서 1시간 30분 거리라고 한다.)이 가능해지면 돈버는 것이죠. 하지만 분명히 금강산 관광으로 남쪽 사람이 많이 다녀가잖아요. 그리고 북에서도 금강산에서 남·북 동포가 서로 나눈 얘기가 어느 정도 소통될 것 같거든요. 이런 것들이 다 통일에 도움이 되지 않을 까요? 드디어 5시 관광이라는 명목으로 개방은 되었지만, 이북의 금강산이 아직은 우리에게 쉽지 않은 땅임을 보여줌인지… 다시 한번 각 조의 조장(가이드가 외래어라서 조장이라고 부른다고 한다.)들이 조원들에게 주의사항을 숙지시켰다. 드디어 하선…남한에서는 장전항이라고 하지만 북에서는 고성항(남한에도 강원도에 행정구역상 고성이 있다. 북에도 고성이 있기 때문에, 남북의 강원도에 2개의 고성이 있는 것이다.)이라고 불리는 곳에 발을 디딘 것이다. 첫발을 내디딘 곳이 선착장 시멘트 바닥이었지만, 기자뿐 아니라 주위 관광객들 역시 평범한 얼굴은 아니었다. 부두를 지나 통행검사소로 갔다. 북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반드시 지나야 하는데, 본 기자 또다시 못 갈 뻔했다. 조장님의 말씀이 관광증의 사진이 너무 흐려서 안될 수도 있다고 하는 것이다. 헉…불안한 마음을 한 쪽에 접어 두고 통과도장을 찍으려는데…던져진 일갈(一喝) “이거 사진이 왜 어럽니까?” “네…그게요…사진을 스캔한 것이라…스캔할 때 잘못되었나봐요.” 그래도 순간적으로 스캔이라고 하면 잘 모르겠거니…그래서 그냥 보내주려니 하는 생각이 있었나 보다. 하지만 예상은 빗나가고. “요즘 스캔하면 디지털 카메라보다 더 잘 나오지 않습니까?” “네….그게…(기자 애써 태연한 척 하려고 씨~익 웃는다…하지만 우물쭈물한다) 제가 잘못해서 그렇게 된 것 같은데, 제 최근 사진 맞거든요.” “지나가라요!” 겨우 입북이 허가된 기자 한숨을 내쉬지 않을 수 없다. 무슨 관광이 이리도 어려운지….그래도 현재 북한주민과 처음으로 대화를 한 것은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5시30분 항구에서 온정각으로…그리고 온천장으로… 13km거리의 온정각으로 가는 동안 도로 양쪽으로 쳐진 철조망 그리고 곳곳을 지키고 있는 북한군인들을 보면서, ‘이놈의 장벽은 언제나 걷히려나!!’하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육로가 뚫리고 금강산이 관광특구로 개발되면 이 철조망은 상당히 멀리 후퇴하겠지. 하지만 걷히기 힘든 이념의(혹은 체제의) 장벽이라는 느낌이 들 수밖에 없었다. 온정각으로 가면서 왼쪽의 양진리 마을, 오른쪽의 온정리 마을을 지나게 된다. 한 건물에 하나정도의 그나마 어두운 불빛이 들어와 있을 뿐이다. 조장의 말로는 “이정도면 제가 18개월 동안 봐온 중에서도 많이 켜져있는 편입니다”라고 했다. 자가발전에 의한 전력이 들어오는 통행검사소, 온정각, 온천장의 너무 밝다고 생각될 정도의 불빛과의 차이는, ‘이것이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차이인가?’라는 되물음을 기자에게 하도록 만들었다. 9시 다시 설봉호로… 온천과 저녁식사 그리고 기념품 구경을 마치고 9시에 배로 돌아왔다. 북한영토로 규정되는 ‘호텔 해금강’과는 달리 설봉호는 남한영토이기 때문에 통행검사소를 매번 통과해야했다. 객실로 돌아와 생각을 정리하면서 눈살을 찌푸렸던 것들을 떠올렸다.. 온천장에 있던 오락기들(스키, 철권등), 온정각 곳곳에 붙어있는 세일이라고 적힌 딱지들… 금강산 관광이 분명히 현대가 이윤을 얻고자 하는 사업인 것을 인정하면서도, 순수한 통일을 바라는 사업이기를 바라는 마음이 기자에게 미련처럼 남아있었나 보다. 10시 3008호 객실 무료함을 달래고자…취재를 하고자…겸사겸사 조장들이 묶는 방으로 쳐들어갔다. 빈손으로 오는 것은 실례라는 말에 자판기에서 음료수(자판기 음료수가 1000원이었다. 쩝…)를 뽑아서 다시 갔다. 기자가 속한 ‘나조 01반’을 책임지는 조장 김재익씨와 대화를 나누었다. 기자-일하시는 거 어때요? 휴일도 별로 없겠어요. 북사람들과는 잘 지내시나요? 김재익-1달에 2박3일 코스를 10항차 운행하는데, 2번 정도 휴가를 낼 수가 있지. 물론 바쁠 때는 힘들지만. 그리고 북한 관리원들과는 친하게 잘 지내지(관광 내내 살펴본 바로는 오빠 동생 하기도 하고, 여자친구입네! 남자친구입네! 하며 서로 장난도 치곤 한다.) 기자-행락질서는 잘 지켜지나요? 김재익-초창기에 규제가 심할 때보다는 덜 지켜지지. 북 관리원과 내 바로 옆에서 버리고도 끝까지 안 버렸다고 우기는 사람도 있다니까… 기자-배에 직원들이 대부분 동남아사람 같던데…? 김재익-필리핀 사람들이야. 아무래도 남한사람 1명 쓸 돈이면, 그 사람들 2~3은 너끈히 쓸 수 있으니까. 기자-관광안내를 하면서 힘들었던 점은 무엇인가요? 김재익-연세 많으신 분들이 오셔서 무리하실 때지. 금강산 왔다고 숨을 ‘헥헥’ 하시면서도 끝까지 가려고 하신다니까. 그러고는 정상에서 기절하시곤 하지. 그럼 다 업고 내려와야되.(실제로 노인분은 아니었지만, 체중이 많이 나가시는 한 아주머니께서 엄청 무리하는 것을 본 조장의 걱정하던 얼굴이란…) 더 많은 내용이 있었지만 off the record라 삼가도록 하겠다. 12:00 4층 갑판에서 룸메이트의 코고는 소리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쫒겨나오다. 혼자 앉아서 북한관리원들의 자존심에 대해 의문을 가져봤다. 산행에 쓰일 지팡이 하나에 15$인 것을 보며, “돈주고 가는 거지뭐”라고 아주 당당하게 얘기하던 아저씨가 생각났다. 남한의 관광객들이 시혜라고 생각을 격어왔을 관리원들로서는 어쩌면 당연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항구를 둘러싼 채로 매우 밝은 빛을 발하고 있는 가로등(방호등인가?) 때문에 북의 산이 하나도 보이지 않음에도 왠지 답답함이 치밀어 올랐다. 11월 30일 7시가 다 되어서야 룸메이트를 찾아온 사람 덕분에 기상하고 씻고 밥먹고 거사(?)를 치르는 둥 바쁜 아침을 보내며 8시께 하선하기 시작했다. 또다시 주의사항을 주지시키는 조장들 고생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온정각에 잠시 들른 후, ‘만물상코스’관광에 나섰다. 적송으로 둘러 쌓인 곳을 지나 70여 구비를 넘어 주차장에 도착했다. 이동 중 차창너머로 보이는 각종 선동구호들, 관공서 입구마다 적혀있는 김일성·김정일을 찬양하는 문구들은 기자가 북한에 있음을 다시금 깨우쳐 주었다. 버스에서 내려 드디어 군인들 이외의 북한주민인 관리원들을 보게 되었다(물론 지나 다니는 사람은 꽤 봤다). 북한에서 설립한 금강산 ‘관광총회사’의 직원들이며, 남한으로 치자면 산림청 공무원들 쯤 되는 사람이라고 한다. 더구나 기자로서는 드디어 목표로 하던 취재원이 나타난 샘이라 눈여겨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번엔 교육 공무원들과 통일부에서 온 통일교육전문위원들이 많이 오는 바람에 나이가 적은 기자는 대화상대로서의 경쟁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많은 대화를 나누지는 못하고 뒤에서 조장들과 친분만 쌓았다. 그야말로 만물상 관광은 잘 한 것이다. 망양대, 천선대, 귀면암, 칠층암, 삼선암, 두더지바위, 뽀뽀하는 1쌍의 원앙 바위, 그걸 훔쳐보는 강아지바위, 등 셀 수 없이 많은 이름의 바위들. 또한 말 그대로 조물주의 장난이지…어떻게 이런 돌산들이 생긴 것인지. 겨울 개골산의 그 멋은 풍경사진은 안 찍으려고 했던 기자에게 셔터를 누르지 않을 수 없도록 했다. 9시 넘어 다시 객실 도착 룸메이트 소개로 통일교육전문위원이시며 울산과학대학 산학협력과장으로 계시는 박광수 교수와 만날 수 있었다. 구룡폭포코스로 가셨었는데, 관광은 다 포기하고 곳곳에 서있는 관리원들과 많은 대화를 하셨다고 하셨다. 그분 말씀을 조금 옮겨보고자 한다. “걔네 들은 통일의 전제조건으로 미군철수와 국보법철폐가 필요하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내가 그건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와 같은 질문이라고 얘기했지. 통일이 되면 자연히 없어질 수 있는 문제들이거든.? “내가 그 친구 보다 좀 더 낳아 보이니까 설득하는 것보다는 자꾸 질문을 하더라고. 그러면서 묻더라고. 세계질서에서 경제와 군사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중요한 것이냐고? 그 친구는 군사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하더군.” “내가 1달에 3000$ 정도를 월급으로 받는다고 하니까 믿지 않더군: “그 친구가 ‘남쪽의 개인주의 알고 있다. 이래서 통일이 되겠냐?’라고 묻더군.” “내가 보기에는 그 친구들은 꼭두각시야. 모르는 얘기가 나오면 말을 돌리고, 똑같은 말들만 하더라고. 그래도 궁금한 점은 묻고 하더군. 전에 부시가 한 얘기 있잖아. 테러조직을 뿌리 뽑겠다고 하면서 이라크와 북한 얘기. 그걸 그 친구들은 굉장히 불안해하더군. 그때는 전국적으로 비상이 내려져서 관리원들도 총을 차고 있었다던데…” 10시 40분 조장들이 많이 피곤해 하는 것 같아서, 놀러갔다가 결국 옥상으로 혼자 올라갔다. 거기서 부두에 서있던 두 군인이 장난치는 모습을 보았다. ‘차갑고 절도있는 인민군’이라는 생각이 뇌리에 박혀있는데, 그 모습은 역시 그들이라고 다르지 않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했다.(더욱이 다음날 해금강을 가는 중에 본 고참으로 보이는 군인들의 모습이란…초소 뒤에서 담배피며 껄렁한 모습으로 얘기들을 하고 있었다. 말 그대로 군기가 빠져있는 듯…) 12월 1일 전날과 비슷하게 부산한 아침을 지나서 통행검사소를 지나 해금강으로 향했다. 여러 마을을 거쳐서 가야하는 코스였다. 남한에서 보기 힘든 소달구지, 자전거나 도보로 등교하는 학생들, 바퀴(동력원을 알 수 없는 수레의)가 빠져서 난감해 하는 아저씨(3시간 후에 돌아올 때도 거의 그대로 있었음), 수줍은 듯 고개 숙이고 뒤돌아선 여학생들, 바람 빠진 자동차 바퀴를 자전거 펌프로 해결하려는 동네 청년들, 기자가 어릴 때 고향(시골이었음)에서 봤던 허름한 전봇대들 모두가 북한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 했다. ‘내식대로~~’라는 구호들에서처럼 철저하게 홀로서 온 북한의 현실을 보여주고 있었다. 소위 민통선(민간인통제선)이라고 하는 경계를 넘어 50분 정도 버스를 달려와서야 바다의 금강산 해금강을 만날 수 있었다. 탁트인 바다, 거기에 서 있는 제멋에 겨운 바위들, 저 멀리 보이는 통일전망대 모두가 감흥으로 다가왔다. 특히 남북이 지리적으로 이처럼 가까이 있음을 실감케 하는 통일전망대의 실루엣이란… 하지만 기자는 더 이상의 감흥을 뒤로했다. 어제 잠시 얘기를 나누었던 관리원이 조금 옆에 서있었기 때문이다. 잠시 목례를 하고 근처 사진을 찍으며 주위를 배회했다. 그랬더니… “왜 선생님은 풍경사진만 찍으십니까?” 앗싸!! 기회다라고 생각한 기자. “혼자 왔거든요. 그리고 돌아가서 답사기나 하나 쓸려구요.” “제가 찍어드리겠습니다.” “저야 좋지요” 이 정도 분위기가 되니 취재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리원-선생님은 어떻게 오셨길레 혼자 온 겁니까? 기자-아!!네~~(취재차 왔다고 하면 문제가 있을 수 있다길레…) 동아리에서 어떻게 기회가 되어서 올게 되었습니다. 관리원-동아리는 뭡니까? 기자-음~대학에서 전공공부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하고싶은 것을 뜻이 맞는 사람끼리 같이 하는 거죠. 예를 들면 노래하는 동아리. 연극하는 동아리..등이요. 관리원-그럼, 선생님은 어떤 동아리 합니까? 기자-저요…(머뭇거리며)전 월간지 만듭니다. 관리원-월간지는 무슨 내용이 들어가는 겁니까? 기자-우리가 생각하는 바에 맞춰서 사회를 비판하기도 하고, 대학 본부를 비판하기도 하고, 우리가 생각하는 기준에 맞춰서 기사를 쓰지요. 관리원-그런 거 쓸 수 있습니까? 검열에 걸리지 않습니까? 기자-우리가 우리 글 쓰는데 뭐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지요. 그리고 뭐라고 해봐야…언론 탄압이나 대학 탄압이라고 손해보는 것이 더 많을거에요. 차라리 그냥 두는 게 낫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테구요. 좀더 설명을 했지만 대학에서 전공 외 활동이나, 사전검열이 없다는 것에 대해서는 이해하기 힘들어했다. 여러 얘기 후 마지막 관광지 삼일포로 떠나야 했기에 헤어져야 했다. 그때, “저도 삼일포 갑니다!”라고 말해 주셔서, 거기 가서 다시 뵙기로 했다. 11시 삼일포 도착해서 가장 선두조를 따라가면서 그 관리원을 찾기 시작했다. 삼일포코스 중간쯤에 다른 관리원 분과 같이 서 계셨다. 다시 기자 사진을 찍어 주시고는 대화를 시작했다. 기자-대학에서는 무엇을 전공하셨어요? 관리원-미대 나왔습니다. 기자-어! 그런데 어떻게 이일 하시면, 그림은 못그리시겠네요? 관리원-아닙니다. 가끔 집에서 그리곤 합니다. 기자-네~근데 여기 상당히 좋은 것 같아요. 남한의 야만적인 자본주의 사회보다 좋은 것 같기도 하구요. 관리원-네 그렇습니다. 남한에서 오신 분들과 얘기하면서 먹을 걱정, 입을 걱정 필요 없는 이곳이 좋다라고 자부심 느낍니다. 기자-그런데 저도 사회주의사회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만(체제비판 얘기는 하지 말라고 교육받았지만, 남한 비판을 한번 했으므로 괜찮지 않을까 생각하며 용기를 낸다.), 북한은 조금 제가 생각하는 것과 다른 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관리원-어떤 점 말입니까? 기자-제 생각에는 사회주의에서 정보는 모두 공유되어야 하는데 이곳은 고위관료들에게 집중되어 있습니다.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검열도 있구요. 그리고 당은 일반 민중이 다가가기 어려울 정도로 권력화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데, 조선노동당은 지나치게 권력화되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구요. 관리원-… 기자-사회주의는 공부하세요? 관리원-…거의 못했습니다. 그냥 유물론인가하는게 있는 것만 알고 있습니다. 기자-네….그럼 최근에 읽으신 책이나, 가장 감명 깊었던 책은 무엇인가요? 관리원-…최근에 읽은 책은 없습니다. 가장 감명 깊었던 책은 회고록입니다. ‘김일성 회고록’입니다. 기자-혹시 당원이세요. 관리원-아닙니다. 당원 되려면 인민을 위해서 일할 수 있는 사람일 때 높은 사람의 추천이 있어야 됩니다. 기자-(탈북자를 만난 적이 있어 깜냥으로 둘러댄다.)시험 치면 되는 거 아닌가요? 그런 줄 알았는데…그럼 인민을 위해 일할 수 있다고 생각지 않으시나요? 관리원-(조금 당황하는 기색이 보이더니)…아직 준비가 안되었습니다. 기자가 만나 대화한 관리원이 그 분들 중에서 가장 아리따운(?)분이라 지나가시던 아주머니 아저씨들이 말을 자주 거는 바람에 원활한 대화가 힘들었다. 또한 정보가 워낙 제한된 곳이라 그냥 살아온 체제에 순응해서 사는 것이지, 체제에 대한 고민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다른 얘기들도 있었으나 지면의 문제와 기자의 기억력 한계로 줄이도록 한다. 돌아오는 길에 버스운전을 하시는 재중교포분과 대화를 나누었다. 기자-얼마나 여기서 일하셨어요? 운전기사-한 18개월 일했어요.(교포들의 좀 어색한 한국어였다.) 기자-일하는 조건은 중국에 계시는 것보다 괜찮은 편인가요? 운전기사-아니에요. 한 달에 330$받는데 중국에서도 버스기사 하면 이 정도 받습니다. 전에 관광객이 많을 때는 지금보다 2배정도 받았는데, 지금은 별로 에요. 버스도 71대가 있었는데, 남한으로 보내고 39대 남았어요. 기자-그럼 댁에는 몇 번 다녀오셨어요? 운전기사-한 번 중국 나가면 돈 많이 들어요. 2년 계약했는데 이제 반년 남았습니다. 전화만 가끔 하는데 한 10분만 통화해도 50$들어요. 기자-오래 계셨으면 금강산 많이 올라가보셨겠네요. 어느 계절이 제일 좋으시던가요? 운전기사-지금이 제일 좋은 것 같아요. 단풍이야 다른 곳에서도 보던 것이고, 산을 그대로 볼 수 있는 지금이 제일 좋은 것 같아요. 기자-네~~ 제가 기사에 쓸려구 하는데요 사진 한 장만 찍겠습니다. 중국보다 낫지도 않은 조건으로 계약기간 때문에 남아있는 기사분이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군다나 통화한번 하는데도 일본을 경유한 전화라 비싼 요금을 내셔야 한다는 것 역시 그분을 힘들게 할 것 같았다. 이는 북한 영토 내에서 일하는 종업원(식당, 기념품 판매 등을 담당하시는 분들)은 모두 마찬가지였다. 중국교포이면서 2년 혹은 1년의 계약기간으로 와서 고생하는데, 기본권 정도는 잘 지켜지고 있는지… 2시30분 장전항을 떠남 더 많은 시간이 있었다면, 그리고 더 많은 자유가 있었다면 그분들과 술을 한잔 기울이며 얘기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주입 받은 것을 획일적으로 대답할 수밖에 없는(기자의 추정) 관리원 분들이었겠지만, 자신이 궁금한 점을 물어올 때, 완벽하진 못하지만 대답을 해주면서, 그분들과 동포애를 얘기하면서 통일을 얘기하면서 기자는 꽤 흥분했던 것 같다. 진실된 민간교류가 가능하려면 북한의 정권이 ‘크게 부수고 크게 세우는’ 과정을 거쳐야 할 것 같았다. 진실된 민간교류만이 불협화음을 최대한 줄일 수 있는 통일의 과정이 될 것이라 확신한다. 고즈넉한 북한을 떠나 속초항에 도착했다. 서울로 오면서 보이는 화려한 네온사인들은 왠지 맘에 들지 않는다. ‘우리에게 이토록 화려함이 필요한가?’를 모두에게 질문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