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쩔 수 없는 이 절망의 벽을/기어코 깨뜨려 솟구칠 거치른 땀방울, 피눈물 속에/새근새근 숨쉬며 자라는 우리들의 사랑/우리들의 분노 우리들의 희망과 단결을 위해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줏잔을/돌리며 돌리며 붓는다 노동자의 햇새벽이/솟아오를 때까지 박노해의 시, 「노동의 새벽」중에서 80년대 노동 현장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노동의 새벽」,「시다의 꿈」,「손무덤」등의 시를 써서 잘 알려진 박노해 시인이 서울대 학우가 뽑은 진보적 인사 2위로 선정되었다. 그의 본명은 박기평으로, 박노해라는 이름은 ‘박해받는 노동자들을 해방한다’는 의미로 지어진 것이다. 고등학교 졸업 후, 섬유, 금속 공장 등에서 실제로 노동을 하면서 현실에 대해 분노하였고, 암울한 노동의 현실을 노동자의 언어를 통해 시로 풀어내었다. 그는 특유의 현실적 시어로 노동자의 현실, 노동 현장과 유리되지 않은 시를 써 나갔다. 지금은 독특한 문학적 가치를 지니며 고등학교 국어 시간에도 소개될 정도가 되었지만, 당시에는 ‘얼굴 없는 시인’으로서 활동하며, 강한 정치적 의미를 가졌다. 자신의 일상적 노동 체험을 통해 당시 정치적 상황을 형상화한 그의 시는 당시 대학생, 일반인들에게 큰 파문을 던지며, 노동 문학 뿐만 아니라 노동 운동 전반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 역시 노동 운동을 주도했던 인물로서 85년부터 서노련에서 활동하며, 85년 구로동맹파업과 87년 노동자투쟁에 참여하였다. 1989년 그는 마르크스 사상을 바탕으로 사회주의 사회 건설을 표방한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을 조직하였고, 1991년 국가보안법상 반국가단체구성죄로 1심에서 사형을 구형받았다. 소위 ‘사노맹 사건’이라 불리는 이 사건에서 그는 사회주의 이념 표방하고 실질적 활동을 벌였다는 것만으로 ‘국가 전복’의 목적이 인정되어 법정최고형을 언도 받았던 것이다. 그 후 무기징역으로 확정 선고되어 경주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그 후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면서 양심수 석방이 이루어졌을 때, 준법서약서를 쓰고 98년 8월 15일 특사로 출소하였다. 출소 후, 그는 다양한 사회 활동과 기고 활동을 벌였는데, 박 시인의 80년대 행적을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이 출소 후 그의 행동을 두고 ‘배신감’을 느끼고, ‘변절’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준법서약서를 거부하는 옛 동지들에 대해 ‘유연성이 부족하다’고 평가한다거나 ‘돈 안 되는 투쟁은 하지 않겠다’는 그의 언사, 변절이라는 평가에 대해 자신의 변신을 스스로 ‘승화’라 예찬하는 등 다소 오만한 태도는 지식인들에게서까지 부정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특히 2000년 광주에서 5·18 전야제를 마치고 벌어졌던 술자리에 그도 같이 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그의 도덕성은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그 후, 그는 단식 등을 통해 반성과 자중의 태도를 보였으며, 대외 활동도 많이 줄어들었다. 현재 나눔문화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으나 그의 근황은 잘 공개되지 않고 있다. 서울대저널의 인터뷰 제의 역시 거절하였다.